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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규칙의 불안정성과 현실의 변화

by 격암(강국진) 2025. 10. 16.

현실은 수많은 규칙들로 이뤄져 있다. 그 규칙은 법률의 형태로 고정될 때도 있지만 문화적 규칙처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더 많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규칙도 있지만 애매해서 사람들마다 다른 경우도 많다. 규칙이란게 이렇게 절대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규칙이 없으면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범죄자는 법률적 금기를 어긴 사람이고, 패륜아는 문화적 금기를 어긴 사람이다. 불량품은 정상제품을 판단하는 규칙을 어긴 물건을 의미하며 배신자는 친구나 동업자의 규칙을 어긴 사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모든 이름은 어떤 규칙의 체계를 의미하고 우리는 그에 따라 어떤 것이 그것이라고 말하거나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러므로 어떤 고정된 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떤 고정된 체계의 규칙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변하지 않고 작동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야 말로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정신적 착란상태에 빠져서 같은 사람이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저 우리의 정신적 착각에 불과한 것인 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규칙의 체계란 없다. 심지어 자연의 법칙조차도 변한다. 그래서 고전역학의 체계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체계로 대체되었을 때 사람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더이상 구분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고전역학의 체계가 무너진 그 사건들도 이미 일어난 지가 백년이 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역학적인 현실속에서 산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학적으로 틀린 것으로 판정받은 고전역학적 법칙들에 기초하지 않은 현실은 너무 복잡해서 일상속에서 늘상 염두에 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생명의 존재라던가, 태양에너지같이 기본적으로 양자적 현상에 기초한 것에 끊임없이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현실은 이미 비현실과 섞여 있다. 과학적 법칙은 그나마 적응이 쉬운 것이다. 법률적 규칙, 문화적 규칙, 개인적 규칙들은 훨씬 더 빨리 변하고, 훨씬 더 일관성이 없다.

 

이같은 문제는 일찌기 리오타르, 데라디등이 주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버거, 쿠루만등이 주장한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지적된 바 있다. 하지만 그 철학들이 어떤 생산성있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불안정성이나 현실의 사회적 구성을 지적한 이 철학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체로 이와 같이 대응한다고 한다. 포스트머더니즘은 거대 서사를 부정하고 변화속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것을 말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을 공동으로 구상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유한성을 무시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말하는 것처럼 거대 서사를 단순히 무시하면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 구성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소통을 통해 현실을 공동으로 구상하는 것도 현대 사회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특별한 새로운 도구 없이도 가능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특히 교육적 배경이 다른 모두에게 가능한가를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정치를 보라. 현실적으로는 이런 주장은 복잡한 소통 시스템 속에서 엘리트주의가 되버리고 마는거 아닐까? 모든 체계적 교육을 혁파하면 정말 모두가 창조적이 되는 시대가 올까?  그건 그냥 사회적 문명적 파괴가 아닌가? 

 

이제까지 적절한 해결책이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이 문제의 존재감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자신 만만하게 이 세상은 하나의 객관적 현실이라고 믿으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들은 바보거나 범죄적이거나 둘 다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혹은 자신이 구축한 현실이 모두의 현실이라고 믿거나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빵을 하나씩 나눠주는 시스템이 있다고 하자. 이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군가가 빵을 받아가지 않아서 그 빵을 받지 못했다면 그건 그 규칙을 지키지 않은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저 빵을 받아만 가면 되는데 그걸 안하는 사람은 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단순한 시스템은 책상앞에서 앉아서 글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만 이건 비유일 뿐이다. 현실은 더 복잡하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상황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문맹이고, 어떤 사람은 다른 일로 극도로 정서적으로 상처받은 상태이며, 어떤 사람은 빵을 두 번받아 먹는 기술을 연구할 정도로 사악하다. 그래서 종이위에서는 그럴듯한 생각이 현실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생각도 사회적 현실만큼 복잡할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다가 인간에 대한 혐오에 빠져서는 세상을 망쳐 먹는 범죄자로 바뀔 수도 있다. 왜냐면 자기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분명한 규칙들이 있고,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의 창으로 보면 사람들이 사악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게으를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줄만 서면 모두가 이익을 볼 텐데 굳이 줄을 서지 않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뭐라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고 저게 인간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현실이 보이기 쉽다. 그것은 규칙이 무너지고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그 세상에는 이기적이라던가, 범죄적이라는게 없다. 이게 흔히 보이는 사회적 분열의 과정이다. 사람들은 상식을 파괴하고 사회적 단결은 무너진다. 남의 규칙, 남의 기분, 남의 입장따위는 따질 생각이 없어진다. 

 

악성댓글 하나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데 요즘은 기술이 너무 좋아서 쉽사리 나의 말이 세계 전체로 퍼질 수도 있다. 연예인이나 정치가처럼 혹은 의사나 경찰관이나 텔레마케터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본래 감정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 이제는 점점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고립되고 폐쇄적이 되어가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타인의 현실이 나를 상처주고 공격하는 것이 두려워서다. 규칙의 불안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이 문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대개 이 문제를 회피한다.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문제자체를 사소한 것으로 말하거나 반대로 이건 어차피 해결불가능한 문제이니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누구에게나 주어진 과제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되건 그것은 반드시 두 가지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먼저 이 규칙의 불안정성 혹은 현실의 불안정성을 인식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으면 해결이나 문제의 완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자꾸 회피하려고 한다. 이 현실의 불안정성이 사회적 구성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서 지적된 것이 이미 수십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다고 해도 그렇다. 그 결과 우리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말하면 이것은 인간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꾸 규칙을 찾아서 그게 옳으며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돌산을 보면서 그걸 굳이 해골처럼 생겼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진화하던 시절의 환경에서는 이것이 올바른 생존방식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환경은 계속 그 원시적 환경과는 달라져왔다. 인간은 본래 수억, 수십억의 사람과 실시간 소통하며 살게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제 마치 물위로 올라온 물고기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 문제의식과 생각의 변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게 철학적 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포함해야 할 또다른 핵심적 부분은 그래서 수단이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해결할 핵심적 부분인 새로운 도구의 부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문제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갈 것이다. 물위로 올라온 물고기는 폐와 다리가 필요하다. 수렵채집인이 문명이 되었을 때 글자를 쓰고 읽는 법을 배워야 새로운 환경속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의 새로운 도구로 인간을 확장하지 않으면 새로운 환경에서 살 수 없다. 우리는 유전적으로는 여전히 원시인이다. 그러니 새로운 도구, 새로운 수단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새로운 도구는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지만 AI다. 우리는 생각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도 바꿔야 한다. 우리가 문명의 시대이래 신문과 책을 보급하고 도서관을 만들었듯이 AI를 보급하고, AI를 위한 인프라를 건설해야 한다. AI는 본래 빠른 정보처리를 위한 도구다. 그것이 모두에게 가능해 지도록 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동시에 수없는 기계와 인간과 서비스들과 연결된 망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인구가 늘어나고 기술이 발달하고 소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그런 상태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의 타고난 판단력은 체계적인 확률적 분석과는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문제를 외면한다고 삶이 단순해 지지는 않는다.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도입해야 삶은 다시 단순해 질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망 사이에서 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다. 인간은 문자를 발명한 이래 침팬지나 고릴라같은 영장류 이웃과는 전혀 다른 동물이 되어 살아왔다.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사회의 크기는 훨씬 더 커졌고 문명의 힘은 그 이상으로 커졌다. 이제는 더욱 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못할 때 문명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거대한 무게 때문에 저절로 붕괴할지 모른다. 정치와 윤리는 타락하고 분열된 사람들은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이다. 현실의 불안정성을 지적했던 문제의식의 끝은 그래서 AI의 발달로 결론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문명적 파국과 비극으로 결론내려질 수 있다.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AI도 마찬가지다. AI를 쓰기 나름에 따라서 현대 사회의 문제는 해결되는게 아니라 극적으로 증폭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바라보는 적절한 관점이 필요하다. 인류가 당면한 시대적 문제가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당면문제는 생산력의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는 생산력으로 치면 과잉이다. 그것이 오늘날 환경문제와 보호무역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AI를 단순히 생산력 증대의 도구로 쓰면 어떻게 될까? 비극은 즉각 훨씬 더 심각해 질 것이다. AI는 인간을 증강하는 도구로 쓰여야 한다.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에 주어진 폐같은 것이어야 한다. 달라진 환경속에서 인간들이 떼죽음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 일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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