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손에게 너는 왜 사람을 죽였는가라고 하지 않는다. 생각을 한다고 해도 아마도 이젠 어쩌지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런 태도속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우리는 통상 나라고 하면 그것을 손과 발을 가진 이 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객관화, 타자화하는 세계를 가지고, 반대로 그저 당연하게 내 몸의 일부처럼 나의 일부처럼 생각하는 세계를 가진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행동은 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만약 이것이 나의 일부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일어났는가?, 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불러 일으킬 것인가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객관적, 타자적 사고다. 반면에 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에게 어떤 일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앞에서 말한 살인자처럼 이제는 어떻게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슬픔을 느끼거나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다. 당신의 아들이나 딸이 칭찬을 받는다면 당신은 내 아들은 왜 칭찬을 받았을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기분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주체적이고 사태를 직면하는 태도다. 하지만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칭찬을 받는 것을 보면 당신은 그는 어떻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그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이러한 태도를 구분하여 한번 더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가 나를 정의하면서 습관적으로 이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계속 해서 객관적이고 타자적인 사고가 옳다고 배우고 그렇게 하려는 습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에 익숙해지면 사랑이나 존중 그리고 가치같은 것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게 된다. 그 같은 것들은 사실 내가 어떤 다른 것을 나의 일부로 여기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의 앞을 흐르는 강이 멋지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쁜 사람들이 있다. 그같은 일은 흔하기 때문에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지만 우리가 객관적이고 타자적인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그같은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라는 것이 이 몸뚱아리가 전부라면 내 아들딸도 내가 소유하는 집도 아니고 그저 마을 앞의 강이 예쁘고 멋지건 말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 없이 자연히 나와 우리 마을, 나와 우리 주변의 환경을 일체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같이 객관적이고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근거없고 심지어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고, 그래서 그 같은 것을 깨닫는 일이 심지어 어떤 심오한 깨우침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저 강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국가든, 강이든, 가족이든, 마을이든 어떤 것에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나와 한몸으로 생각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인지 아닌지를 사안마다 따지는 것은 일단 제쳐두자. 그 전에 우리는 이같은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그같은 사고 방식은 결국은 이 몸뚱아리 하나밖에는 세상에 내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말 현명한 깨달음의 결과인가? 게다가 관습적으로 우리는 이같은 분석적 사고를 우리 몸에서 멈추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당신은 왜 당신의 손발은 당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신발이나 옷처럼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왜 아닌가? 즉 객관화 타자화는 우리의 몸에 심지어 뇌에도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도, 우리의 뇌도 벗어던지고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뇌만 남겨두고 육체를 그저 집이나 신발같은 물질로 여길 수 있고, 뇌에서 전두엽을 빼고, 후두엽, 측두엽을 빼는 식으로 계속 뇌도 부분으로 잘라나갈 수 있다. 그 끝에서 우리는 뭘 만나게 될까? 완전히 자유로워진 나? 진정한 나? 아니다. 우리는 허무와 좌절을 만난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관계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안에 생명의 신비를 가진 원소가 없듯이 이 세상에는 나의 본질을 가진 어떤 물질이 있는게 아니다. 물론 저 화성의 돌멩이는 내 아들 딸이나 내 몸에 비하면 나라는 것의 더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뇌는 우리 집앞의 소나무보다 나의 본질에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어딘가에 깨끗하게 선을 그어서 이 안쪽을 이루는 것이 나고 이 바깥쪽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단지 이 몸뚱아리일 수 없다. 우리는 수 많은 것들이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애정은 우리를 만드는 핵심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강에 대한 사랑을 버린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 이겠지만 그것은 같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같은 것은 우리가 개인주의적 환원주의적 미친 소리를 약간만 뒤로 하면 누구나 아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짐승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단지 먹고 살아남기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세상에 뭔가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서 평생을 바쁘게 뛰어다닌다. 그 모든 것이 관심과 애정과 가치의 문제다. 그것들없이 우리가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이 없어도 나는 나라는 말은 마치 연극 무대가 없어도 로미오는 로미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서구의 개인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 미친 소리는 내가 보기엔 그들의 강렬한 기독교적인 종교와 관련이 있다. 즉 신과 연결되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전부를 등져도 나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도 물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그건 신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강렬한 종교적 배경이 없이 이 세상이 없어도 나라는 게 존재한다는 생각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근대 이데올로기가 강렬한 종교적 배경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개인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생각 즉 앞에서 말한 객관적이고 타자적인 생각은 널리 퍼졌는데 이제 종교는 거의 힘을 잃었고, 세상에는 크고 복잡한 시스템만 남았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생각하면 미친 소리인 생각, 강렬한 종교심없이는 정당화될 수 없는 생각만 남아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고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 끝은 소시오패스나 매국노가 되기 쉬운 길이다. 그런 생각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나 국가나 이웃이나 세상에 대한 애정을 그 뿌리부터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조롱할 정도다.
종교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시대는 갔다. 심지어 근대적 발전이 빛나는 미래를 보여주던 시기도 끝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찌기 근대의 모순을 느꼈지만 그것이 정말로 근대를 끝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간에는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개인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즉 객관적이고 타자적인 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알라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AI는 근대 시대를 끝낼 힘이 있다. AI를 쓰는 사람들은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근대적 개인주의를 믿는 것은 마치 공화국의 시대가 왔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어떤 왕가의 백성이라고 믿는 봉건주의자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좋은 예는 독점적 소유다. 만약 이 개념을 조만간 크게 고치지 않는다면 수천만대의 로봇을 소유한 사람이 온 세상의 부를 거의 다 가지는 일이 올수도 있다. 아니면 그 이전에 사회가 붕괴되던지 말이다. 이제까지 당연하던 것은 이제 더이상 당연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근대를 돌아보고 그것을 다시 한번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육도 당연히 바꿔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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