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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자료, 재미난 것들

[스크랩]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빠진 들뢰즈

by 격암(강국진) 2009. 10. 21.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빠진 들뢰즈

혹은 화이트헤드철학에서 본 들뢰즈적 영화읽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진경의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을 중심으로-

                                                                              



  <차례>

Ⅰ. 들어가며

Ⅱ. 몸말

    1. 화이트헤드철학의 몇 가지 개념들

    2. 이진경의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에 나타난 들뢰즈 비판

Ⅲ. 나오며






Ⅰ. 들어가며


1. 본 글의 전략

이 글은 화이트헤드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본, 들뢰즈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들에 대해 그 허술한 구멍들로써 느낀 바에 근거하여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은 들뢰즈의 철학을 비판하지만 그 텍스트는 우리나라에서 들뢰즈 사상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정우와 더불어 이진경의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라는 글1)을 살펴봄으로써 그 작업을 수행코자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들뢰즈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고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방대한 작업에 비해서 현실적으로 지금은 내게 할당된 자료와 시간이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진경의 텍스트 하나만 갖고 이를 비판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진경의 그 글은 글의 목적상 들뢰즈의 사상을 소개하는 성격의 글이기에 고맙게도 들뢰즈의 저서인 「의미의 논리」나 「차이와 반복」등에서의 글을 잘 인용하면서 기술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논지는 거의 직접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게다가 이진경의 글은 알프래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 <현기증>을 통해서 들뢰즈의 철학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영화적 이해와 그에 따른 영화예술론에 대한 고찰도 조금 곁들였음을 밝힌다.

오늘날 영화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 있어서 후기구조주의 미학을 따르는 자들은 많았어도 화이트헤드철학에 기저한 신(新)미학의 입장에서 영화라는 주제를 다룬 사람은 내가 알기에는 거의 없으며, 이 부분은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알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초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서적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조차 드문 아주 난해한 철학자에 속한다. 비판적 독설가인 김용옥조차도 화이트헤드 앞에서는 꼬랑지를 말면서 모멸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낀다고 시인할 정도며,2)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미래의 대안적 철학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은 먼저 화이트헤드철학 중에서 본 글의 논지와 관련성이 짙다고 보는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해서만 대략 소개하고 곧바로 이진경의 텍스트를 비판하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사실 화이트헤드철학을 전부다 소개한다는 것은 과도한 무리요 지면상으로도 과도한 것이기에 여기서 굳이 화이트헤드철학을 죄다 소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3) 결국 본 글이 의도하는 궁극적 목적은 화이트헤드철학을 통해 이진경이 기술하고 있는 들뢰즈 사상의 치명적 약점들을 들추어내는 것이며, 이로써 영화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조망들을 가져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2. 들뢰즈의 철학과 후기구조주의4)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이 영화미학에 있어서 그 주도적인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음은 명백한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까지도 많은 영화비평가들과 영화이론가들은 들뢰즈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적어도 들뢰즈를 모르고서 영화미학과 영화비평을 논할 순 없다고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기까지 한 걸로 보인다. 이것은 영화뿐만 아닌 모든 문화상의 텍스트를 들뢰즈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추세와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질 들뢰즈.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언급한 적은 없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 놓고서 평가하고 있음은 사실이며,5) 그렇기에 합리성에 대한 회의를 표방한 푸코나 <차연>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데리다와도 곧잘 비교되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 자신을 열렬한 맑시스트라고 공공연히 표방한 적은 많았다. 이것은 데리다가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닌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언급한 점에서 봤을 때, 둘의 사상은 적어도 모종의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것은 둘 다 반(反)플라톤주의자인 동시에 니체의 후예라고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둘 다 헤겔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공통되고 있다. 어쨌거나 거시적인 고찰에 있어서 들뢰즈의 사상이 다원주의적 전망을 갖게 하는 점이나 푸코가 매우 좋아했던 철학자라는 점에서 볼 때도 적어도 들뢰즈의 사상은 포스트구조주의의 흐름에 있는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들뢰즈가 실재론을 거부하는 포스트구조주의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들뢰즈의 형이상학 자체가 실재에 대한 논의가 아닌 오히려 실재에 대한 논의를 뛰어넘어 표면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미 생산을 위한 사물의 배치를 다룬 정치유물론이었다는 점에 있다.


3.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위치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에 대두된 포스트모던 사상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해체적 포스트모던>deconstructive postmodern이라는 흐름으로써 근대성에 대한 반발과 이에 대한 다원적이고 해체적 경향을 띠고 있는 조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는 <해체적 포스트모던>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독단으로 군림했던 근대성을 폭로하고 해체를 염두에 두고는 있긴 하지만, 이를 해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대안적 세계관-혹은 코스몰로지로써의 형이상학-을 축조하려는 사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를 <건설적 포스트모던>constructive postmodern이라고 불린다. 유기체철학자인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은 바로 이 두 번째의 흐름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그렇기에 첫 번째의 사상적 흐름과 친화적이면서도 동시에 변별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디에 속할까? 내가 보기에도 들뢰즈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형이상학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인 <해체적 포스트모던>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 진다. 그것은 분명 합리주의 대한 해체적 전망으로만 나아가고 있진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에 속하는 것인가? 하지만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물의 너머에 있는 고찰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효과들의 장(場)에 관한 담론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 아닌 <형이상학적 표면>에 대한 체계라고 불린다.6)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철학은 이점에 있어서 포스트모던의 두 흐름 사이의 완벽하게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걸로 판단되어진다. 생각해보면, 흔히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新실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데 비해, 들뢰즈의 형이상학이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들뢰즈의 체계는 사물의 근원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의미발생의 정치역학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 사상들은 <존재>보다 <생성>을 강조하고, <관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고 있지만, 예컨대 포스트모던의 첫 번째 흐름인 <해체적 포스트모던>은 조금 극단적인 경우로써 <보편>과 <실재>에 대한 회의로 인해 이 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단일하게 해석하려는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는 여지자체가 봉쇄되고 있다. 이들에게 남아있는 건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주류 담론에 대한 저항과 폭로 그리고 다양한 담론적 공간확보에 대한 치열한 전략적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이란 것도 바로 이 점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 내에서의 대안인 것이다. 영원한 진리란 없고 그것은 다만 사회적 과정 속에서 형성될 뿐이기에 대체로 진리 인식에 대한 회의나 혹은 다원주의적 진리관인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보편>과 <실재>를 회의하지만 이들처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버리진 않는다. 그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합리주의를 옹호하는 지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그는 적어도 이 세계에 대한 다양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입각점으로써의 해석자체마저 봉쇄된다면 우리에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회의주의와 냉소적인 비판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봤다. 요컨대 진리란 실용적인 의미로써도 요원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이성은 바로 인간의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기능으로써,7) 우리가 이 세계의 다양한 경험적 사실들을 해석함으로써 얻어지는 그 효율성마저 버린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오염된 이성이라고 해서 진리를 향한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모험은 끝장나야만 하는 것인가? 화이트헤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충분히 인지하고서 새로운 건설적 구성을 얘기하기에 어떤 면에서 <해체 이후의 철학자>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실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재를 과정이라고 봄으로써 이를 극복할 뿐이다. 화이트헤디언들을 일컬어 <초상대주의>자 혹은 <신실재론>자라고 얘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8)



Ⅱ. 몸말


제 1 장. 화이트헤드철학의 몇 가지 개념들


1. 화이트헤드철학의 성격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의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은 사변철학, 즉 다름아닌 형이상학이지만 이것은 이전까지의 플라톤의 철학이나, 포이에르바하와 맑스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했던 독일 고전 관념론과는 다른 형이상학임을 알아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보면서,9) 이전까지의 서양철학이 갖고 있었던 오류들을 지적하고는 플라톤的이면서도 플라톤을 넘어서는,10)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였다. 그의 유기체의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패러다임을 극복하며 양쪽을 통일시킨다.11)

그는 이전의 서양철학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그 자신의 독특한 용어들을 창조하여 정밀한 유기체적 세계관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그 자신의 창조적 용어들로 인해 치밀할뿐더러 아주 난해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이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뜻과 관련한다.12)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한계를 명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고 참신한 용어들을 구사하며, 놀랍게도 그것은 감탄을 자아 낼만큼 정확한 언명을 포착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2.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형이상학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형이상학이지만, 결코 비역사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생의 위대한 결실인 하버드 대학시절에 저작된 이 형이상학은 그가 수십 년간 쌓아 온 케임브리지 대학시절의 수리논리학과 런던 대학시절의 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의 대표작인 「과정과 실재」는 수학과 물리학적 개념의 기초 위에 서 있는 작품이다. 그의 철학은 합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이 함께 공유된다. 사변철학에 대해 유명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보자.


“사변철학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로써, 그 <해석>은 경험의 여러 사항들이 그 철학적 도식에 의해 <적용가능>하고 전반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사항이 하나도 없는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13)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사변철학의 이상인데, 여기서 <정합적>, <논리적>은 합리적 측면이요, <적용가능>과 <충분>은 경험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14) 그렇기에 사변철학(형이상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로써의 학문이며, 충분히 예증된 최선의 선택으로서의 올바른 사변철학(형이상학)은 다른 학문의 오류를 검증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을 일컬어 자주 <추상관념의 비판자>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15)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이상학의 실제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명제의 정확한 분석이다. 그것은 단지 형이상학적 명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저녁의 식사에는 쇠고기가 있다>라든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이 전적으로 일상적인 명제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어떤 특수 과학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사실들의 한 유(類)genus는 그 우주에 대한 어떤 공통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한다.”16)


이처럼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목표는 다른 게 아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소박한 것이다. 바로 우리 일상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 형이상학이 의도하는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거나 이와 유리된 설명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오류를 지닌 것이 된다. 가장 궁극적인 진리는 이 우주 안의 그 어떤 사소한 부분이라도 배제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결국은 이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17) 이 우주 안에서 단절되고 유리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물리학, 생물학, 윤리학, 사회과학 등등-그 학문의 주체자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과학적 언명 뿐 아니라 종교, 일반 상식에까지 우리는 그 어떤 사유의 틀을 갖고서 대화를 나누고 논의를 개진해나간다. 즉 모든 일상 경험의 언명에까지도 그 어떤 심층적인 형이상학적 전제가 이미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제된 형이상학적 이해가 만약 올바르지 않거나 치명적인 구멍을 가진다면 이것은 오류에 기반한 독단적 언명이 되기 쉽상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명명하면서, 근대과학의 오류를 바로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진경이 기술하는 들뢰즈의 논리도 바로 이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3.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을 주요 창시자로 하는 근대 과학은 자연이 질료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질료 각각은 시공간의 우주 속에서 어느 한 지점씩 정렬되어 있다고 봤다. 즉 17세기의 뉴턴 물리학은 사물이 뉴클리드적 시공의 좌표상의 일정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며, 근대 과학 철학은 그들이 기초 개념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단순 정위>(simple location, 단순히 위치를 점거함)를 구체적 사실로써 받아들였던 것이다.18)

그렇다면 우째서 이런 잘못을 범하게 되었는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단순하게 놓여있는 개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즉,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인 그 환경과의 관계, 연관에 있어서 보지 아니하고 고립적으로 그 환경에서 떼어서 본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 사물의 본질마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다른 사물과의 관계성을 떠난 독립적인 물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연 과학은 사물을 개체적인 것으로 판단했으며, 시간과 공간의 좌표는 절대적인 것이라 전제했던 것이다. 뉴토니안 패러다임은 어떤 면에서 시간과 공간조차도 뒤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근대 과학의 아둔함을 이른바 <단순 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 또는 저 유명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명명한다.20)


4. 어디까지 바위이며, 어디까지가 뒷동산인가?

이런 오류의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뒷동산의 바위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개 그 바위는 뒷동산 위에 부동적(不動的)으로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외부의 역학적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까지나 정지해있을 것이며, 일정한 시공의 자리를 변함없이 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정태적이거나 고정적인 자리매김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바위의 침식과 퇴적은 지속적이기에 매순간 바위의 모습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나와서 그 바위를 어디까지가 바위라고 선을 그을 수 있으며, 어디까지가 뒷동산이라고 구분할 수 있겠는가.21) 그 바위는 뒷동산을 포함한 전체 우주와 끊임없이 연대성을 맺으며,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바위라는 <이름>22)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마찬가지로 뒷동산이라는 이름 또한 추상화의 소산이며, 근원적으로는 뒷동산이라는 이름을 넘어선 그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23) 이름을 넘어선 그 무엇은 이 전체 우주와 연관되어 있다. 

사실 잘 따져보면 뒷동산의 바위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개념화된 사물들이나 종교적 교리들 그리고 심지어 TV나 신문에 보도되는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들까지도 그 자체는 실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의해 의식되고 나타나는 전체적 지속으로서의 사건이며,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시공의 변용이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차원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절대>가 될 수 없다. 요컨대 상호반영을 떠나서 물자체(物自體)를 운운하는 것은 사유의 추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한다.24)


5. 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사물인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사물을 <현실적 존재>auctual entity 또는 직접 경험의 내용을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고 불렀다.25) 여기서 분명히 말하지만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개념임을 밝혀둔다. 화이트헤드철학에서 <현실적 존재>를 모르고서는 그의 철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적 존재는 데카르트가 말한 실체와 유사하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관계성의 범주가 성질의 범주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26)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drops of experience이며, 과정process의 미시적 단위들이다.27)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아주 마이크로한 세계를 기술하는 용어인데, 사실 현실적 존재를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이같은 표현을 어떻게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위험하면서도 참으로 막막한 것이다. 알듯 말듯 하면서도 아라까리한 이같은 표현은 머리 속에 실날같은 번쩍임처럼 떠오르기 때문에 쉬운 설명이란 게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철학에서 현실적 존재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한 핵심적 용어다. 만약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화이트헤드철학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꼭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일단은 과정의 미시적 단위라는 문구에 먼저 주목해 주길 바란다. 이점을 인지한다면 화이트헤드에게서의 현실적 존재는-신을 제외하곤- 곧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와 같은 뜻임을 곧잘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난 후 일단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를 한번 떠올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달리 사물에 대하여 ‘구성적 위치’로써 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관계적 위치’로써 점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물론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언급함에 있어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 중요성에서 등급이 있고 그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28) 거듭 얘기하지만, 현실적 존재에 대한 개념은 화이트헤드철학의 전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건이며, 화이트헤드철학의 많은 부분이 현실적 존재에 대한 언급에 치중하고 있거나 이와 관련되어 있기에 꼭 알아둘 필요가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29)

이러한 현실적 존재들은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불연속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 존재가 객체적으로 불멸하여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한 연속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화이트헤드가 말한 현실적 존재는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과도, 양자역학이 얘기하는 물질의 비물질성과도 대응된다고 할 수 있겠다.30)


6. 이미지와 사유로써의 현실적 존재

영화가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프레임>이다. 들뢰즈는 이 프레임이 <이미지>image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보는 이 세계 안의 모든 사물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적 존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으로 느끼는 사물들은 현실적 존재의 <결합체>nexus나 조금 더 복잡한 구조를 지닌 <사회>society에 다름 아니다.31) 그렇기에 영화의 프레임을 형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수많은 알갱이들-이것은 빛의 성질처럼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지닌다-인 현실적 존재가 매순간 생성, 소멸32)하면서 이뤄내고 있는 결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 존재가 빛을 형성하고 있는 다른 현실적 존재들과 역동적으로 관계함으로써 관찰자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일 뿐이다.

관찰자의 지각 양태는 저마다 다르고 불완전하기에 똑같이 하나의 텍스트를 보고서도 각자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은 다른 걸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텍스트 안에서 작가가 의도한 사유는 불가피하게 이미지에 의해 방해를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텍스트와 관객과의 상호적 만남에서 발생하는데 이러한 상호적 관계에 의한 이미지가 텍스트를 대하는 관객에게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새로운 사유로 굴절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것은 관객이 확률적 실재로써만 텍스트를 접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은 본래적으로 텍스트에 내재해 있는 작가의 사유에 대해 근사치로 접근할 수는 있어도 백퍼센트 완전히 고스란히 인지될 순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지는 바로 영화라는 텍스트에 있어서 오독(誤讀)을 가능케 하는 요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 오독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끝없이 발산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이접적으로 생산시킨다.

그렇다면 반면에 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현실적 존재의 내적 현실이며, 현실적 존재가 내적으로 갖고 있는 주체적 통일성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것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바로 이미지에 의해 생산되는 다양한 의미들에 대한 개념적 평가로써의 수렴을 떠맡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 사유가 없다면 이미지는 관찰자와 외부적으로 관계하면서 그저 이접적인 의미들을 생산해낼 뿐이다. 이 때 하나의 유(類)적 의미는 다른 의미와 전혀 정합성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사유는 바로 이미지의 이런 사태를 구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통일성이라는 사유가 없다면 텍스트를 대하는 관객은 작가와 그 어떤 연속적 통일성도 가질 수 없으며 파편적이고 조각난 것들의 영화 해석만이 무질서하게 나열될 뿐이다. 관객은 텍스트 속에 내재한 사유를 인지함으로써 그제서야 그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 위계를 부여할 수 있는 개념적 가치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적으로 사유가 이미지보다 우위에 서서 군림해오며 더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근대라는 세계는 계몽이라는 미명하에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면서 독단적인 행세를 해왔었다. 다원성을 무시한 하나의 일자적 해석만을 강조하다보니 그것은 동시에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우위성을 역전시켜 사유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이미지의 우위성을 주장한 철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들뢰즈였다. 그는 말하길 “이미지는 사유가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케 한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전적으로 들뢰즈의 이같은 언급은 그동안 홀대받아 왔던 이미지에 대한 중요성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맛보았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들뢰즈의 영화이론을 이미지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열렬히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러한 역전적 도식은 여전히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미지에 대한 이접적 의미 생산과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과 느낌만 부각된다면 그또한 이미지의 무책임성에 지나지 않잖은가. 작가적 사유에 대한 왜곡과 굴절에 대한 책임은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미지나 사유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거나 우위에 있다는 그런 주장은 오류가 있다고 본다. 정신과 물질이 모든 존재의 양극적 요소이듯이 이미지나 사유 또한 모든 예술적 텍스트의 양극적 요소일 뿐이다. 즉, 사유는 바로 텍스트의 내적 생성에 해당하며, 동시에 이미지는 바로 텍스트의 외적 생성에 속한다고 봐진다. 이미지는 관객에게 텍스트에 내재한 작가의 사유를 그 자신의 사유로써 파악되게끔 만드는 매개이기도 한 것이다. 관객이 새로운 담론을 주도하는 의미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한다.


7. 화이트헤드가 보는 예술론

유기체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일차적으로 예술이란 여러 구체적 사실에 의해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에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실들을 배열조정하는 어떤 선택활동이라고 밝혔다.33) 나는 일단 예술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여기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경험에다 패턴을 부여하는 모든 행위들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미술, 음악, 패션, 요리, 바둑 뿐만 아니라 보기 좋은 글씨체나 하다못해 아이들의 공기놀이나 해를 쳐다보기 위해 등을 구부리는 것조차도 일단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그러한 현실태가 단순한 사실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을 막는 선택활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문화적 매개를 통한 예술적 습관은 현실태에 드러나는 실존적 사실들을 실존적 가치로 이해하고 향유하도록 하는 습관을 길러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예술은 곧 문명이다.

하지만 이 모든 류(類)적 예술들은 당대의 사회적 상황 혹은 여건과 결부되면서 저마다의 모든 류적 예술들에 <중요성>importance에 따른 하이어라키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같은 화장실의 변기인데도 유독 마르셀 뒤샹의 변기만이 왜 보다 더 예술적 가치로 인정될 수 있을까?(물론 뒤샹은 예술작품에 대한 패러독스적인 의미로써 그 변기를 전시회장에 들여놓았지만) 텍스트에 대한 의미생산의 체계가 구성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텍스트가 갖고 있던 본래적 사유는 그 시대의 다양한 효과를 지닌 정치적 담론들과 깊숙히 연루되면서 그만큼의 다양한 의미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실재는 처음에서 그만큼 멀어지지만 이로 인해 그만큼 또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형되고도 있는 것이다.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서로간에 주객의 파악에 있어서 불연속적인 연속성을 가지듯이 텍스트와 관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텍스트를 통해 작가의 사유에 근접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유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제 2 장. 이진경의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에 나타난 들뢰즈 비판


1. <사고>와 <사건>에 대하여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이라는 이 글은 이진경이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을 갖고서 들뢰즈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글이다. 먼저 그(혹은 그녀)는 <사고>와 <사건>에 대한 개념적 차이를 언급하면서 <사고>란 사물의 상태가 시․공간적으로 유효한 것이며 사실에 관한 범주에 속하고 반면에 <사건>은 어떤 사물의 상태나 사실을 다른 상태나 사실에 연관짓는, ‘관념적’성격이 개입된 범주로 보고 있다. 영화 ‘현기증’에서 주디의 죽음을 두고서 의사가 하는 일은 죽음의 신체적 원인을 찾는 것이고 경찰이 하는 일은 죽음의 비신체적 원인을 찾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이진경은 들뢰즈가 보는 사건이란 바로 사고의 계열화가 이뤄짐으로써 나타나는 차원으로 보고 있다(이진경의 글, p.18.).

그러나 사고나 사건이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일까? 나는 먼저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주디의 죽음의 신체적 원인은 비신체적 원인이랑 결부되어 있고 그것은 후자의 단서로써 기능하고 있다. 또한 이진경은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을 사건이 아닌 사고로 보고 있는데,(p.18) 그러나 내가 볼 때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자체도 하나의 사건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이진경은 <사고>라는 것에다가 사회학적인 서사적 구조를 덧입힌 것을 <사건>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사고라는 것 안에는 이미 사회학적 서사적 구조가 녹아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는 사실 자체를 볼 때도 그것은 이미 그 속에 복잡하고도 심층적인 내러티브를 깔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사건은 사고의 계열화가 이뤄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고란 사건이 표면화되는 어느 한 지점을 지칭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경은 왜 이같은 언급을 했던 것인가? 잠시 뒤에 언급할 것이지만 그의 이론은 <상태>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것으로 기술하는 데서 그 자신의 모든 이론의 근본적인 오류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진경에 의한 들뢰즈가 보는 사고란 어떠한 사물(사람)의 임의의 상태 또는 사실을 말하는 듯하며 여기에 서사적 의미가 개입되면 그것을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죽은 매들린의 추락과 죽음은 사고이지만, 이러한 하나의 동일한 사고 또는 사실이 등장인물들간의 계열화를 따짐으로써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사건(매들린의 죽음)이 여러 특정자들의 상황과 결부되면서 다양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차원에 불과하다.


2. <임>과 <됨>에 대하여

그는 사건의 개념과 연관된 중요한 구분 가운데 <임(있음)>etre과 <됨>devenir의 구별을 언급한다. 물론 전자는 존재를, 후자는 생성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있음>이 사물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됨>은 사물의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말한다(pp.25-26). 이것은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아주 베이직한 기초 개념이며 이것 위에서 들뢰즈는 그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하나하나 쌓아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들뢰즈가 축조한 이 기초개념이 만약에 오류로 판명되어진다면 그의 철학은 치명적 구멍을 야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자, 여기서 그가 보는 <됨>이란 무엇인가? 바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라고 했었다. 나뭇잎이 ‘붉다’는 특정의 상태를 나타내지만 ‘붉게 된다’는 이전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의 변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들뢰즈가 보는 생성이란 것도 결국은 상태의 계열화에 의한 것임을34) 보여주는 징후적 언급이다. 즉 들뢰즈가 보는 사건은 <있음>들에 대한 특이점으로 향해있는 그 어떤 배치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있음>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 혹은 계열화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는 얘기와 결국 같은 얘기다. 그렇기에 들뢰즈가 말하는 <됨>이란 <있음>을 완전히 거부하는 개념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적어도 <있음>이라는 그러한 상태가 있다는 것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다. 나뭇잎이 ‘붉다’는 것이 그에게서는 이미 추상이 아닌 사실의 영역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물론 나뭇잎이 ‘붉다’라고 할 때 이것은 언어의 소통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정작 나뭇잎이 붉은 상태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추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란 나뭇잎이 붉게 되어가는 과정상의 한 켠을 꽁꽁 얼려버린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죽은 개념일 따름이다. 한번 잘 생각해보자. 유동하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과연 이런 개념이 사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변화와 유동의 한복판에 있는데 어떻게 사물이 정지되고 정태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러한 경우란 것이 존재할까? 그런데도 들뢰즈는 사물의 고정된 정태적 상태를 인정한 채로 그는 ‘됨’을 얘기하고 변화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자신은 들뢰즈의 사상이 왜 유물론과 친화적인 것이었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그를 유물론자로 볼 만한 것도 이 베이직한 사유에서부터 이유가 있음직 하지 않은가.


3. 존재와 생성의 문제

그렇다면 존재와 생성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존재와 생성의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강조된 것은 존재였지 생성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생성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만 강조되고 있을 뿐 파르메니데스 이후 모두들 <변하지 않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과연 존재와 생성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화이트헤드는 존재란 바로 생성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즉 <있음>은 없고 단지 <됨>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을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 따른 의식상에 떠오르는 지각에 있어서 <있음>으로써 느끼고 그것을 그렇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은 변화와 유동을 겪고 있는 과정상의 한복판에 있을 따름이다. 과정상의 임의의 한 지점을 쪼개고 쪼개서 본들 그 또한 언제나 <과정>process이라는 내적 구조를 가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화이트헤드에게서는 <과정>이 곧 <실재>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최소한의 단위적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 사건이란 곧 <현실적 존재> 그 자체밖에 없다. 그 이후에 기술되는 사건들은 전부다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 또는 <사회>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임의의 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로써 사건이며, 인간현상이란 것도 그 자체로써 현실적 존재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에 속한다.

현실적 존재는 앞서 얘기했듯 이 우주를 형성하는 궁극적 사물로써,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험상의 방울들이며 과정상의 미시적 단위이다. 이것은 다(多)에서 일(一)로의 <합생>concrescence35)이라는 내적인 과정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에포크>epoch36)를 갖고서 순간에 생성하고 순간에 소멸한다. 그러나 순간에 소멸되는 것은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직접성일 뿐 현실적 존재는 자기초월체로써 영원히 객체적으로 불멸한다. 그렇기에 첫 단추 하나의 어긋남이 지속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사에 빗대어서 볼 때도 임의의 한 인간이 한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그 자신은 죽지만 이후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 무엇으로 그는 남아있는 것이다.

다시 들뢰즈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이진경에 의하면 들뢰즈는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으로 나누는데,37) 일반적으로 사물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적인 요소의 혼합이라고 말한다(p.26).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인간의 의식이 개입된 언어상의 지평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이진경이 인용한 들뢰즈의 언급을 따로 떼어서만 본다면 이것은 정확히 유물론자의 얘기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상응하는 얘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들뢰즈가 보는 사건이란 것도 이 신체적 상태가 다른 신체적 상태와 계열화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말한다(p.28). 참으로 그렇다면, 만약 들뢰즈를 생성의 철학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평가라고 하겠다. 들뢰즈는 말하길 사건이란 언제나 사물의 신체적인 상태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한다(p.29). 따라서 내가 보는 들뢰즈는 결코 진정한 의미로써의 생성의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본다.


4. 들뢰즈가 보는 <사건>개념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던 것도 상태가 아닌 과정상의 사건의 범주에 속할 뿐이다. 경찰이 본 것은 전체가 아닌 일부에 대한 목격에 의해서 수행된 해석으로 인해 찰리는 그만 불행히도 공산주의자로 몰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들뢰즈가 <이중인과성>이라고 불렀던 개념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복합인과성>38)으로 봐야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인과성을 언급하는 이 지점에서 이진경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주의깊게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중 인과성에서 <실체>를 신체적 원인과 결부시킨다. 실체가 밑에 존속한다는 것은 단지 이런 뜻에서만 이다. 즉 그것은 신체적 차원에서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는 신체적 원인이라는 것이다(LS.16-17쪽). 결국 들뢰즈는 원인 내지 실체의 자리에 신체적인 것을 놓고 의미나 이데아를 결과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플라톤적 사유를 전복한다. ...(중략)... 사건의 의미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을 신이나 본질, 이데아 등과 같은 어떤 초월적인 항으로써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적인 항들의 위상적인 관계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즉 ‘의미’는 계열 안에서 주장한다.”(p.30).


이로써 의미생산의 지점은 결과적인 것이고, 그것은 무한히 미분화될 수 있는 관계항들의 지점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참으로 이것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보는 유물론적 사유와 흡사한 도식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39) 플라톤적 사유에 대한 전복이란 플라톤이 강조한 개념을 역으로 뒤집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사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이미 행해졌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헤겔적 사유에 대한 전복이다. 서양의 철학들은 헤겔에까지 이르러 그것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헤겔이 바로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독일 고전 관념론의 완성자라고 평가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들뢰즈가 왜 그토록 플라톤과 헤겔을 싫어했는지도 이제서야 감이 오지 않는가!


“이중 인과성의 개념은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경계선에 사건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미란 이 두 가지 측면의 접경지대에서 두 가지 측면을 잇는 계열화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p.31).


여기서 이진경이 언급한 밑줄 친 문장을 자세히 분석해 보자. 즉 이 문장은 “들뢰즈가 보는 사건의 개념은 <상태>적인 것(=신체적인 것)과 상태에서 상태로의 변화의 효과(=비신체적인 것)의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문장으로 보여진다. 즉 의미는 바로 상태적인 것과 결부된 비상태적인 것의 접경지대에서 나온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얘기이다. 들뢰즈가 누차 인용했다는 발레리의 말, “가장 깊은 곳은 피부이다”(p.31)라는 말의 의미도 바로 들뢰즈에게서 가장 중요한 관건들은 현재 결정되어 있는 사물의 상태들의 배치를 통한 의미생산이 정작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것을 극명하면서도 압축적으로 강조한 언급이었던 것이다.

이진경은 ‘매들린이 죽었다’는 명제는 어떤 사실을, 특정한 사물의 상태를 지시할 뿐 그것은 영화 전체에서 그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p.32). 그러나 <현기증>에서 전개되는 캐릭터의 상황에 따른 세 개의 계열들은 매들린의 죽음을 배제하고선 결코 논의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결국은 이진경은 “매들린의 죽음에 관한 모든 언표는 매들린의 죽음에, 좀더 신체적인 지점을 말하면 매들린의 시신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p.36)라고 기술한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들뢰즈가 바로 존재보다 생성을 우위에 둔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가 우위에 두고 있는 생성이란 것도 사물의 정태적인 것에 포섭되어 있는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실상 그것은 <됨>(생성)이 아닌 것이 <됨>(생성)의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오호 통재라.. 사실 난 이런 오류 투성이의 이론이 무슨 대단한 이론인 양 떠받들어지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영화이론가들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국외는 학자적 식견이 좁아서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국내의 내가 아는 영화이론가들은 그랬다.


5. 주체의 해체와 동일성 문제

들뢰즈가 보는 사건은 계열화에 달렸으며, 계열화는 단순한 사실들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달려있다. 각각의 사실의 배열들은 사건을 함의하고 사건은 동시에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 때의 양식(良識)은 의미를 생산하는 이러한 계열화에 특정한 하나의 방향성을 부여한다고 말한다(p.37). 그런데 여기서 영화<모던타임즈>에서 찰리는 양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주체로써의 어떤 동일성도 갖지 않는 분열적 주체라는 것을 이진경은 주장하고 있다(pp.40-41).40)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물론 찰리는 노동자에서 정신병자로, 공산주의자로, 죄수로, 경비원으로, 웨이터로, 가수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이것은 정작 표면으로만 봤을 경우엔 사실이다. <모던 타임즈>의 찰리를 생각할 것 없이 직접적으로 우리 이웃들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IMF의 상황 때문에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해도 그는 단번에 거리로 내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지경이다. 거리에 내쫓기면 필시 찰리가 당했던 유사한 신세들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자. 나자신은 항상 동일한 주체를 가진 자였던가? 크게 보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군인으로, 사회인으로 항상 변화를 겪는 과정상에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진경의 말대로 정작 주체의 동일성이란 없고 단지 주체에 대한 분열과 해체만 있는 것인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나’라는 존재에 내재한 주체적 형식은 그 어떤 주체적 지향을 깃점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임과 변화를 겪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서의 주체적 지향은 그 어떤 자아실현을 향한 충동이요, 그에 대한 유혹으로써 받는 느낌에 해당한다. 즉 내가 보기에 <모던 타임즈>의 찰리가 갖고 있는 주체의 동일함은 바로 절박한 생존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찰리에게서의 동일성은 착한 인간애를 가진 자로써의 먹고살기 위한 생존이 그에게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였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현실을 추동하며 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놀랍게도 꿈과 환상인 셈이다.

인간은 생의 끝날까지 단일한 계급을 갖는 존재가 아닌 다차원적 계급을 갖는 존재다. 그 옛날 헤라클레이토스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인간은 어느 한순간도 같은 동일자의 모습을 지닐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순간순간마다의 이 사회 안에서의 계급적 위치도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사실이다. 화이트헤드에게서 관계성은 존재의 부차적인 요소라기보다 필연적인 요소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존재의 한 쪽을 차지하는 성질일 뿐이다. 또한 관계성은 존재자의 주체적 결단과 맞물려 있다. 주체적 결단은 관계망으로 얽혀있는 현실태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 자신의 내재적 원인에 해당한다. 사회적 관계상의 지표는 바로 그 자신이 직면한 물리적 환경과 이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가능태들에 대한 주체적 결단이 인과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사회적 공간에서 드러난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인간의 다면적 정체성은 바로 이것과 관련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를 추종하는 이진경은 주체자가 사회적 지표상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사태들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주체자 자신의 주체적 지향이야말로 동일자로 작용하고 있음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41)


6. 지각과 언어적 진술에 대하여

또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있어서도 여전히 이진경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물의 상태는 언제나 현재와 연관되어 있다. 어떤 나뭇잎이 ‘붉다’는 것은 그 나뭇잎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앞으로 붉게 되겠지만, 혹은 이전에 붉은 적이 있지만, 현재는 푸른 나뭇잎에 대해 ‘붉다’는 진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상태는 과거나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사물의 상태를 다루는 한 현재는 과거나 미래와 분리되어 있다.”(p.42).


이 무슨 궤변인가? 어찌보면 이진경의 이러한 언급들이 맞는 얘기로 보일 수 있을 진 모르나 화이트헤드언들이라면 금방 눈치챌, 구멍이 뻥뻥 뚫린 얘기라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나뭇잎이 ‘붉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언어적 진술의 차원일 뿐인데, 여기서 이진경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인간의 두 가지 지각의 양태에 대한 분석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과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 바로 그것이다. <인과적 효과성>이란, 말 그대로 어떤 사물에 대한 느낌이 과거로부터의 계승으로 고스란히 정착되는 지각양태를 말한다.42) 이것은 현시적 직접성보다 근원적이며, 그렇기에 모호하고, 불분명하다.43) 하지만 이것은 <물자체>에 대해 아주 가깝게 근접해 있는 지각양태다. 그렇기에 화이트헤드가 보는 실재란 <모호한 총체성>vague totality에 다름아닌 것이다.44) 현시적 직접성이란 세계의 <연장적> 관계extensive relations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지각양태이다.45) 즉, 이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물에 대하여 취사선택된 최종적 스크린을 생각하면 된다. 그렇기에 현시적 직접성은 뚜렷한 명확함을 갖는다.

인간이 언어를 기술하는 지점은 바로 <현시적 직접성>에 해당한다. 언어란 인간의 의식과 경험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나뭇잎이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상에 확고부동하게 여겨진 사태를 두고서 이를 기술하는 차원일 뿐이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뭇잎은 붉은 확률이 많을 뿐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에 고전역학을 적용해도 아무런 불편을 못느끼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나뭇잎이 붉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오차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통념화된 언어상의 기술로써 의사소통화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의식에 명석판명하게 나타나는 사실들은 <물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사태가 아니라 바로 간접적인 사태에 해당하며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지각양태에 의해 해석된 사실들에 속한다. 사실 고전역학을 포섭하고 있는 양자역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과학적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진경이 보는 시간이라는 것도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처럼 그렇게 쪼개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어떻게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분리될 수 있는가? 나로써는 사물의 상태를 다루는 한 현재가 분리된다고 보는 것자체가 유물론자의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우리에게 오로지 있는 것은 영원한 현재일 뿐! 물론 그 현재는 인과적이며, 양극성적 방향을 갖는 과정적 사태에 해당한다. 그것은 결코 사건의 가장 최소단위이자 과정의 미시적 단위인 현실적 계기를 앞지를 수 없다. 즉 화이트헤드의 시간론에서는 사물의 상태라는 걸 다룬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경험하는 세계에 있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과정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들뢰즈가 얘기했다는 <아이온적 시간>이랑 흡사할 런지도 모르나 적어도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분리하는 시각은 화이트헤드체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구도인 것이다. 과거란 영원한 현재 속에 <객체적 불멸성>으로 남아있으며, 미래는 영원한 현재 속에 이미 품고 있는 가능태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에.


7. 차이화하는 운동

이진경은 사건의 의미는 계열화의 양상에 따라 결정되며 그 또한 계열마다 다르다고 말한다(p.45). 그러면서 이진경은 사건이 한편으로 발산하지는 않고 수렴하는 상이한 계열들의 집합이 있음을 얘기하면서 사건의 <특이점>을 언급한다. 들뢰즈는 동일한 특징을 갖는 사건들의 집합을 <이념적 사건>이라고 부르고, 그 집합을 이루게 하는 특징을 <특이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특이성을 설명하는 이진경의 표현을 따른다고 한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특이성이란 것도 결국 각 계열의 항들 사이의 관계에 대응하는 것이며(p.46), 이것은 결국 상태와 상태 사이, 즉 영화로 치자면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지칭하는 것(혹은 경계)으로 소급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무한히 미분화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미분적 양상에 따라 사건은 상이한 계열로 전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로 들뢰즈에 따르면 의미란 바로 상태와 상태를 연결하는 관계항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언급이 믿기지 않는다면 이진경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보자


“사건의 개념은 계열화를 통해 하나의 사실이 상이한 의미를 갖는 상이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어떤 하나의 동일한 사실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사건들이란  상이한 계열들로 ‘차이화하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상이한 의미를 뜻한다. 각 계열이 형성하는 의미란 이처럼 차이화․미분화하는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다.”(p.51).


“...(중략)... 들뢰즈는 차이화하는 운동을 ‘임’과 ‘됨’, 사물의 상태와 사건,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이중성 속에서, 그 경계선상에서 포착한다.”(각주28번: p.52).


이상과 같은 언급을 보고서도 들뢰즈의 사상에 뚫려있는 치명적 구멍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참으로 큰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들뢰즈의 가장 큰 치명적 오류는 무엇인가? 그는 적어도 바로 이 <임>이 있다는 사실자체만큼은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함으로써 들뢰즈는 그 자신이 고안한 개념들을 자기의 철학적 체계를 위해 하나씩 축조해 나가고 있다. 또한 그가 보는 <됨>은 <임>에 대한 계열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할 때 결국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화하는 운동’이란 것은 바로 모든 사물의 상태에 대한 경계지점에서 일어나는 운동일 뿐이며, 제아무리 데리다가 말한 <차연>의 개념보다 구체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명백히 오류를 담지한 추상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상에 있어서의 들뢰즈의 논리는 작가의 사유가 집약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내러티브상의 연속적 장면에 해당하는 프레임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프레임과 프레임사이의 경계에서 무한한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히 미분될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미분화에 의해 그 어떤 하나의 동일한 사실도 상이한 의미로 나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영화에서 <미장센>보다 <몽타주>를 곧잘 더 중요시하게 평가하는 이유도 알만하지 않은가.

들뢰즈는 자신의 사상을 ‘사건의 철학’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고 한다(p.53). 들뢰즈가 보고 있는 사건화는 양식과 공통감각과 관련하는 일정한 반복이 불가피하게 포함된 것이다(p.53). 들뢰즈는 여기서 사건의 반복적 계열화가 만들어지는 그 특정한 조건에 주목하면서 이를 <지층>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지층들을 구별하는 층들의 배열양상을 또한 <배치>라고 하며, 이러한 배치 안에서 반복되는 사건들이 갖는 특이성을 가장 극도로 추상한 것을 <추상기계>라고 부른다(p.55). 이러한 들뢰즈의 논리는 결국 역사유물론적 전개로 나아가 양식화된 의미를 낳는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정치성을 띤 이론으로 발전한다(pp.56-57). 결국 들뢰즈가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반복적 계열화로 나타나고 있는 기존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다양한 탈주 공간에 대한 확보요, 공통감각으로 점철된 근대성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러한 시도들은 아마도 막스 베버적 계열이 아닌 마르크스적 계보에 있는 사회학자라면 들뢰즈의 이러한 이론들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비춰졌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Ⅲ. 나오며


요컨대 철학상에서 들뢰즈가 의도하는 ‘차이화하는 운동’ 혹은 ‘미분화하는 운동’이란 사물의 상태를 더욱 원자화하는 운동이요. 쪼개어 나눈 것을 의미발생을 위해 새롭게 배치하는 운동일 뿐이다. 이러한 철학을 깔고서 표방되는 정치적 전략은 당연히 기존 체제에 대하여 기존의 있는 것을 <가로지르기>하거나 혹은 <탈코드화>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진경에 의해 기술된 들뢰즈의 사상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이나 운동, 사건 같은 개념들은 내가 보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현대적 유물론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들은 잘못된 추상관념을 구체적인 것으로 오인하고서 그 자신의 형이상학을 축조시키고 있다하겠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시도는 내가 보기에 분명 실패했다고 보며, 이러한 들뢰즈의 구라에 마냥 놀아나고 있는 현재의 학계풍토에 대해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이 들뿐이다-어디 그런 경우가 한 둘이랴만-. 물론 들뢰즈 철학에 대한 비판과 평가는 그의 저서를 꼼꼼이 읽어보고 해야겠지만 그러지 않고 부득이 이진경의 텍스트하나만 갖고서 들뢰즈의 사상을 고찰했다는 점은 이 글이 갖고 있는 치명적 약점임을 솔직히 시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국내에서 들뢰즈 사상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진경의 쓴 한 편의 글에서조차 이렇게 오류와 모순투성이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하물며 들뢰즈 저서를 꼼꼼이 조사해본들 더할나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내게는 아직 들뢰즈나 데리다의 사상들이 전체 학문의 사상사에서 한 번 쯤 짚어볼 필요는 있다고 보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엔트로피 증가에만 기여할 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바이다.

푸코나 들뢰즈가 우리시대에 권위있는 철학자로 군림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플라톤이나 맑스가 권위를 갖고 있는 것만큼이나 오류를 간직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미 학계에서 주류화되어 있는 거대담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푸코 자신이 얘기한 것처럼 중심화를 지향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그 압도적인 리얼한 권위에 굴복당하는 것이며, 저도 모르게 비판이 불허된 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하고 맞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무지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중세시대 사람들이 어찌 코페르니쿠스의 망언을 이해하였으리요.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데카르트의 언급도 몇 세기가 지난 현대에 들어서야 겨우 그것이 근세철학의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니 어찌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들뢰즈 같은 어처구니없는 구라에 놀아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으랴.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제아무리 화이트헤드라고 하더라도 예외일 순 없으리라. 그런데 나 자신이 게 중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을 그나마 젤루 좋아하는 이유가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아는 그 어떤 철학 중에선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통해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설명이 가능하고 손쉽게 해결을 보고 있는 점이 큰 매력이자 이유였다. 하지만 정작 놀랍게도 화이트헤드철학의 진짜배기 매력은 딴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철학사상 마저도 내버릴 줄 아는 그 대담성과 진정으로 열려있는 개방성에 화이트헤드철학의 더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본다. 그는 자기자신의 철학이 비논리적이거나 경험상에서 조금이라도 오류를 보인다고 한다면 주저없이 내버릴 것을 권한다. 형이상학의 범주란 언제나 자명한 독단적 언명이 아니라 일반적인 관념들에 대한 시험적인 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6) 즉 화이트헤드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사변철학을 열렬히 옹호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는 인간의 허약한 통찰력과 관념과 언어의 모호성과 불완전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그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사상가였다.47) 적어도 학문의 역사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인간이 최선의 선택으로써 지지할 수 있는 확률적 사실에 불과하기에 끊임없이 이를 적용하고 검증하는 작업을 그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문명은 이를 통해서 창조적 전진을 향한 새로움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끊임없이 정정하고 수정하는 ‘관념의 모험’이란 것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얘기다.48)

아무튼 나의 이 글이 어케보면 별 것 아닌 하찮은 꼬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진 글일 수 있겠지만 나의 이 글은 들뢰즈를 비판하는 함에 있어서 전혀 설득력이 없는 비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부분이 있다면 명확하게 짚어주었으면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언제라도 정정하고 나의 비판을 철회할 용의는 있다. 20세기의 철학은 주로 형이상학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반형이상학적인 논의로 철학의 중심을 옮겼다. 그런데도 이러한 주도적 흐름과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상한 철학자는 거의 몇 안되는데, 화이트헤드가 바로 여기에 속하고 들뢰즈도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형이상학이란 코스몰로지를 논하는 자리이며, 그것은 모든 궁극에 관한 체계를 수립하는 학문이다. 본래적으로 철학의 기능이 바로 궁극을 탐구하는 것에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형이상학은 패러다임 중의 패러다임이며 어느 한 시대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송두리째 바뀐다는 것은 바로 정신사의 대변혁과도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근대를 지배했던 뉴톤-데카르트적 세계관이 현대의 양자물리학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충격이 오죽했으랴만.49) 하나의 형이상학은 당연히 다른 형이상학과 어떤 식으로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유동하는 사물에 대한 해석이 가지는 설명력을 통해 승부를 가를 수 있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패러다임이라고 보고 있다. 오히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동양의 노자사상이나 불교의 세계관이랑 더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들뢰즈의 사상도 도가사상과 연관된다고들 떠들지만, 화이트헤드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서구의 철학 사상 중 그 어떠한 철학보다도 동양의 패러다임과 친화적이었고, 그럼으로써 동양의 철학과 종교와의 대화에 많은 결실을 맛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 동양과 서양의 정신사가 화이트헤드철학에서 풍성하게 대화했던 사례를 나는 일찌기 철학사에서 본 적이 없다. 화이트헤드의 철학만큼 물리학, 생물학, 종교학, 신학, 동양철학, 미학 등등에 발을 뻗치고 있는 철학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작 문제는 이러한 정신사의 대변혁을 예감하는 자는 아직도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양자역학적 인식은 아직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날로 복잡하고 다분화되고 있는 실정에서 있는 것을 분석하고 쪼개고 나누어 보는 차원에서 이를 하나로 수렴하는 차원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多)와 일(一)은 존재의 양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다가올 제3밀레니움의 시대가 더없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경험상에서의 자연과학적 성과와 모순되지 않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진가는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3밀레니움의 시대에 경험상에서 양자역학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과학적 성과가 발견된다면 아마도 그 땐 어쩔 수 없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수정하거나 버려야 할 줄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화이트헤드철학이 현재까지의 서양철학사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써의 철학이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런 판단이 어쩌면 성급한 독단적 판단으로 들릴 수 있으리란 건 나 자신 또한 잘 인지하고 있는 바이다. 솔직히 내가 원하는 바램도 누군가가 나의 이같은 생각을 철회토록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나 자신도 화이트헤드철학을 넘어서서 보다 진보한 걸음을 내딛고 싶은 맘또한 간절하다. 즉, 언제나 나의 사상을 깨트려봄으로써 보다 더 깨어지지 않을 것을 열망하고 싶은 것이다. 진정한 합리성이라면 그 자신의 부정성마저도 극복할 줄 아는 합리성이어야 하지 않는가!



출처 : 루이의 도서관...
글쓴이 : 루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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