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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미국 이야기 6 : 독립적인 아이로 키워라.

by 격암(강국진) 2010. 2. 26.

중학교 3학년때의 일이다. 하루는 형들과 같이 쓰던 방에서 혼자 자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 사람은 어떤 이유로건 죽게 마련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우리 부모님보다 내가 나이가 어리니 언젠가는 나는 부모님이 없이 혼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전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성적은 본래 반에서 10등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도 않은 성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수업시간에 듣는 것을 제외하면 따로 공부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한덕에 나중에 대학입시시험을 볼때는 그해에 우리 고등학교 졸업생중 가장 입시 성적이 좋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내가 과외선생님을 하면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종종 하고는 했다. 선생님이 성적이 좋았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크게 바뀔수가 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크게 바꿀수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니 학생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독립적이라는 것은 자기문제는 결국 자기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이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은 미국이 다양성이 풍부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한 것 같다.

 

미국은 우선 아주 크고 인구가 많다. 천만 평만제곱 킬로미터의 면적과 3억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전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가 미국이다. 남한의 면적은 10만제곱 킬로미터정도니까 그 백배다. 같은 나라라고 해도 저기 먼 지역에서 이사온 사람이란 실질적으로 외국사람이나 다름없다. 한국 사람이 홍콩사람 만나는 거나 같다. 미국은 지역마다 분위기도 상당히 틀리다. 남부와 서부와 동부가 다르고 도시와 시골이 매우 다르다.

 

게다가 많은 이민을 받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복잡한 나라가 미국이다. 뉴욕에는 특히 수백의 인종이 모여 산다. 뉴욕의 거리를 거닐고 있으면 다수를 점하는 인종이라는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간판들이 아니라면 거기가 중국인지 한국인지 남미인지 유럽인지 알기가 힘들다.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낙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더더욱 미국 사회에는 표준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 각자가 자기 식대로 산다. 미국사회와 비교하면 한국은 훨씬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산다. 옷이나 자동차 같은 것뿐만 아니라 말하는 법, 주거환경에 결혼이나 부모 모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한국사람은 유행에 민감하고 남의 시선에 민감하다. 사실 민감하지 않아도 남들이 뭐라고 하는 일이 많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압력이 있다. 이에 비하면 미국에는 표준이 아예 없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뭐라고 간섭하지도 않는다.

 

이런 다양성과 자유는 좋기도 하지만 안 좋기도 하다. 어른인 나도 가끔은 당황스럽다. 예를 들어 동거를 5년씩이나 하면서 애까지 낳고 살면서 결혼을 안 하는 사람도 미국이나 유럽엔 꽤 있다. 전에 만난 영국인 친구는 이미 그 친구 나이가 결혼할 나이인데 자기 부모님들은 아직도 법적으로 동거상태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미국에 결혼제도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결혼제도에 관해 혼동이 온다. 예나에게 친구의 아빠 엄마는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본래 그래도 되는 거야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래서 내 딸이 커서 나중에 마구 동거를 시작하면 어쩔 텐가. 아니면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 이야라고 말해 줘야 할까. 이것도 난처하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우리는 다르다라고 가르치지만 아이에게 그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내가 진정 충분한 설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친구로 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우리 주변에 결혼제도를 부인하고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여자나 게이나 문신을 새긴 록음악 팬이나 아프칸에서 온 무슬림 교도나 무사도를 믿는 일본 사람등 여러 가지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자. 물론 이들은 모두 법을 어기고 살고 있는 것도 비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유롭게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쉽게 다른 사람 말에 끌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생활방식을 독립적으로 지켜낼 수 없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쪽집단에선 상식적인 일이 저쪽집단에선 대단히 무례하거나 금기시되는 일이 많다. 이선 저 선을 마구 넘나들다 보면 모두가 꺼려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과 다양한 문화에 끌려 다니는 것은 다르다. 어른인 나도 난처할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이를 키운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에게 다양성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옆집과 우리 집은 달라도 된다고 말하면 아빠와 딸의 생각은 왜 같아야 할까. 같을 필요 없다고? 하지만 꼬마에게 뭐든지 다 된다고 말하고 키울 수는 없다.

 

미국의 부모들은 항상 어린아이를 따라 다니려고 노력한다. 어린 아이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이가 만나는 사람들도 부모들이 강력하게 선택하여 조정한다. 미국에서는 아이들끼리 골목에서 잘 놀지 않으며 1990년대부터 플레이데이트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플레이데이트란 아이들이 서로 같이 놀 수있도록 부모들이 약속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플레이 데이트는 단지 아이들만 노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부모들도 놀이터에서든지 각자의 집을 방문해서 부모들끼리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같이 보낸다.

 

요즘은 미국에서 플레이 데이트는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일단은 나라가 크니까 주변에 친인척이 있는 경우도 우리나라보다 적은데다가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주는 경우도 우리나라보다는 적다. 그러니까 그만큼 이웃끼리의 서로 돕기가 더더욱 중요해 진다.

 

미국도 전에는 아이들이 그냥 골목에 뛰어나가서 자기들끼리 아무나 만나고 놀다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플레이데이트가 유행하게 된 이래로 아이들은 이제 서로 좋다고 그냥 놀 수 없다. 부모들이 서로 약속을 정해야 하며 따라서 부모들끼리 서로 좋아하지 않거나 부모가 바쁘거나 부모가 플레이데이트 같은 것을 정하는데 미숙하다면 아이들은 외롭게 클 수 있다. 일이 이렇게 흐르다보니 플레이 데이트는 아이들의 놀이수준을 넘어 어른들이 서로 친교를 맺는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이라도 하나 유모차에 밀고 동네를 기웃거린다면 그렇지 않으면 사귀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사귀게 되는 기회가 오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같으면 부모들이 서로 자유시간을 가지겠다고 서로 애 봐주기 하는 것을 선호 할 것이다. 미국도 물론 그런 것을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부모들이 항상 애를 따라 다닌다. 아이들 생일파티에도 부모가 다 따라와서 함께 파티를 한다. 일본이나 한국 같으면 그냥 보낼만한 거리에도 아이를 혼자 학교에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이것은 치안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도 지역에 따라 상황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환경의 다양성도 이런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이가 누굴 만나서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다양성이 넘치는 환경이란 그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환경이란 의미도 있다. 미국에서 어린 아이는 항상 부모 곁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한국이나 일본보다 강하다.

 

나라마다 아이에 대한 교육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할 때 내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여기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있다. 거기에 아이들이 줄을 서있는데 한 아이가 그만 욕심에 우리 아이 앞으로 새치기를 한다고 하자. 우리가 뛰어가 그 아이에게 항의를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스라엘이라면 아마 자기 아이가 속이는 걸 봐도 그냥 못 본 척 하고 말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 아이에게 다른 어른이 야단을 치려고 하면 얼른 뛰어와서 항의한다. 우리 아이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난 아이를 건드린 적도 없는데 내가 그쪽 아이를 폭행이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시키지 않는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 사이에게는 매우 친근하게 대하지만 조금 낯 설다 싶으면 자기가 잘못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자면 아이 기 죽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엄마라면 다가와서 사과할 것이다. 사과는 하지만 호들갑을 떨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아이들일이 아닌가.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르다. 아이에게는 엄하게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벌로 노는 시간을 중단하고 그냥 집으로 데리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존중 받는 것은 독립적이지만 규칙을 지키는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다. 그러나 자유에는 대가가 있다. 규칙을 안 지키면 안 된다. 규칙은 중요한 자유의 댓가다. 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다는 것은 규칙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그런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규칙은 규칙이며 떼쓴다고 봐줄 수 없다. 학교에서 숙제를 베끼거나 시험에서 컨닝을 하는 것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미국에서는 한마디로 어릴 때부터 떼쓰는 것을 봐주질 않는 부모가 많다. 한국 사람이 보기엔 좀 정이 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아직 작은 아이에게도 엄격히 규칙이란 것을 적용하고 귀엽게 군다고 봐주지 않는다. 한국보다 일찍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대우하면서 그만큼 의무를 요구한다. 막연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준 선택권 안에서 선택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아이가 빨리 받아들이고 그 틀 안에서 주관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양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

 

일본의 엄마라면 얼른 뛰어와 대단한 사과를 할 것이다. 죽을 죄를 졌다는 표정을 짓고 연신 고개를 숙인다. 아이에게도 그러지 말라고 얼른 말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아이는 아이다. 일본사람은 아이가 충분히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믿고 대접해 주지도 는다. 그만큼 아이가 져야 하는 부담도 적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성이 없는 개가 우리 집 마당을 더럽혔다고 개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인만 사과하면 된다. 아이는 얼마 안가 같은 짓을 할지 모른다. 아이는 자신이 아이이기때문에 많은 비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일본의 아이는 떼를 쓰기도 하지만 어른에게는 복종한다. 미국아이들과 비교하면 행동양식이 훨씬 어린애 답다. 자기가 어린애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는다. 떼를 쓸 자유가 있는 것이다. 비이성적일 자유가 있다. 권리를 포기해서 의무도 포기하며 무리한 책임감에 짖 눌릴 필요도 없다. 미국의 아이들은 얼마 자라지 않아 귀엽다라는 표현에 모욕을 느낀다. 그들은 더 많은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의무도 있다. 때로 어린 아이가 어른인척 할려고 고생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반면 일본의 아이들은 귀여워 보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나이가 상당히 들어도 그런 경우가 많다.

 

자유란 결국 이성적 능력에 대한 신뢰로 주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규칙을 엄하게 적용시키면 그런 시스템에 적응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빨리 개발 할 것이다. 아이들을 믿지 않고 자유를 주지 않고 그야말로 애처럼 취급하면 아이들은 자기 머리를 써봐야 소용없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아이로 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세상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독립적인 아이로 키워야 할 필요성은 증대하고 있지만 여러가지 경우를 일반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각자의 환경과 전통과 믿음에 따라 아이를 키우고 사회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는게 몸에 좋다고 갓난아이를 무리하게 달리게 하면 다리만 상할것이다. 독립심이라던가 이성적 판단능력의 훈련도 그렇다. 주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이런 저런 전통을 소신 없이 뒤섞으면 엉망이 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한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만난 한 한국 학생이 그래 보였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영락없이 한국식이다. 청소며 빨래에서 심지어 학교 숙제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상당히 들었는데도 부모에게 의존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행동에 부모는 간섭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에게 뭘 받을 때는 한국식이고 부모가 뭔가를 요구하면 개인주의인 미국식인 것이다. 합리적으로 부모에게 뭘 요구하는게 아니라 약속을 안 지키고 떼를 쓴다. 그럴 때 보면 일본아이 같지만 부모를 무서워 하거나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미국식이다.

 

불행히 요즘은 좋아졌지만 해외에 사는 교포 중에 한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외국에 산다고 한국어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미국식으로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면 될지 모르나 사실은 그게 미국식이 아니다. 부모가 한국사람으로 한국식으로 생각하며 아이를 키우는데 그게 미국식일 수가 없다. 문화적 정체성 혼란은 재미교포들이 흔히 겪는 것이다. 자기 행동의 기준을 잘 모르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은 지나친 것이고 무엇은 모자란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때로 누구에게 속는 것 같거나 비난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 중에 요즘 아이들이 독립심이 약하고 자긍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거 혹시 어른들의 교육이 나빴던거 아닐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래걱정에 전전긍긍해서 결국 다들 주변사람이 하는 대로만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이 아닐까? 학교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며 평생 어릴 적 한문교육 조금 받은 것이 전부인 나이많은 할아버지들을 만날때가 있었다. 지식의 양으로 보면 이분들이 아는 것은 어린 학생들보다 더 적을 것이다. 무슨 지적인 일에 종사하신 분들도 아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대단히 조리가 있고 나름의 소신과 논리가 뚜렸한 것에 놀랄때가 있다. 이런 분들을 보면 학교가 반드시 학생들을 발전시키기만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교육에서 독립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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