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이공계의 위기 이야기가 나온 지는 오래 되었다. 한국의 대학교수로부터 이공계 대학원에서 대학원생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도 벌써 꽤 되었다. 한국은 벌써 수십년 전부터 과학의 중요성을 외쳐왔다. 그러니 한국인은 과학의 소중함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럴까? 한국에서는 과학이 뭔가에 대해 착각하고 과학을 홍보한다는 것이 오히려 과학을 모욕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이 세상 일들을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데 있어 기준이 되는게 뭘까. 그 기준은 경우마다 달라보이지만 결국 생각해 보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간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법학이나 의학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그것들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흥미가 있어서 하는 것일 것이다. 아니면 돈 잘 버는 직업이라서 그걸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고 그런 것들이 강조되지도 않는다.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재미있는 의학상식이나 법학상식이야기가 나올지라도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이 강조되는 것이 법과 의술은 숭고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에 있어 정의가 뭔가에 대한 것이며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것이다. 장난감가지고 놀듯이 즐겁게 가지고 놀만한 것이 아니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사회에서 인간보다 중요하게 있을리 없다.
법률이나 의술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직업을 권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법학이나 의학은 돈을 많이 벌어주는 고마운 학문이라고 선전되는 일은 별로 없다. 법학이나 의술은 돈이나 명성이나 재미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있는 학문이다라고 말해진다. 개나 바위나 시금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한국에서 대개 과학자보다는 돈도 잘 번다.
그럼 과학은 어떤가. 한국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면서 과학을 선전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확히 이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과학은 재미있는 것이다. 과학은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며 많은 돈을 벌어주는 학문이다. 티브이며 라디오며 서점에서는 마치 서커스를 선전하는 것처럼 과학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선전이 많다.
부모들은 과학자가 돈을 못 번다고 자식들에게 과학을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선전매체는 과학이 우리나라를 부자 만들어 준다고 돈 잘 벌어주는 학문으로 강조한다. 일반인들은 과학자는 인생의 지혜가 좀 모자란 괴상한 인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인생이 뭔지, 인간의 삶이 뭔지 알고 싶다면 모름지기 철학 책을 볼일이다. 과학은 철학과 관련이 없으며 법학이나 의술에 관련된 윤리 같은 것과는 관련이 없다. 대부분 이렇게 믿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수도 있다. 법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수 있겠는가? 의학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수 있겠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수 있는가? 좀 불편하지만 대부분의 복잡한 과학연구 따위 없어도 우리는 인간적으로 사는데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인간적으로 산다는건 뭘까.
한국에서 과학은 인간에 대한 연결점이 잊혀져 있다. 결과적으로 알게 모르게 별로 중요하지않은 일로 취급된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그것이 그저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거나 지적 유희를 위한 학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과학이란 전자레인지 사용자에게 있어서 전자레인지를 만드는 법 같은 것이다. 전자레인지 사용법만 알면 될 뿐 만드는 법이야 일반인이 알 필요가 없다. 과학이란 한국에서 그저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선전을 얼마나 하건 과학진흥책을 얼마나 쓰건 과학발전에는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실 성공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재미있으니 네 평생을 투자해보라고 광고하는 셈이다. 이걸 광고라고 본다면 기본이 잘못 된 것이며 실제 과학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하면 왕관을 가져다가 왕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못을 박는데 쓰는 셈이다.
미국은 19세기말 이래로 세계과학계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해왔으며 특히 아인쉬타인이나 페르미 같은 유럽과학자들이 세계 2차대전을 즈음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이래 세계 과학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해 왔다. 미국은 전화기를 만들었으며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나라고 원자탄을 만든 나라며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달착륙선을 만든 나라고 인터넷을 만든 나라다. 이런 미국에서는 과학이 어떻게 다를까?
서양에서 철학의 역사를 논하면 그게 거의 과학의 역사와 겹친다. 우리가 박사학위를 가르쳐 Ph. D라고 부르는데 실은 이게 철학교사라는 뜻이다. 물리학박사도 수학박사도 Ph. D다. 서양 문명의 원류로 삼는 그리스에서 철학자와 과학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플라톤이 수학을 모르는 자는 자신의 아카데미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근세를 연 철학자 데카르트는 유명한 수학자이며 유명한 철학자 칸트도 실은 뉴톤역학을 공부하고 천문학을 연구한 과학자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수학책처럼 썼다.
이런 것은 매우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도 한국에서는 철학과 과학은 엄격히 다른 것이라는 인상이 있다. 논어나 도덕경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과학적 의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이황이나 이이도 과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된다. 인간윤리는 과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다.
이것은 말도 안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세상이란 어떤 곳인가하는 것은 윤리와 인간의 가치판단의 핵심에 있는 문제일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동설이나 진화론이 격렬한 사회적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아무 의견도 없이 신비스럽게 윤리를 논하고 처세를 논할 수가 있었을까?
조선시대에 과학기술이 존재했고 철학도 존재했는데 이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따라서 과학이란 우리조상들이 수천년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분야가 된다. 4원소론을 말하던 그리스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의 음양오행을 말하던 사람들은 종종 비과학적인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만다. 한국에서 말하는 과학이란 철학이 거세된 기술만을 말한다. 인간에게의 연결점이 끊어진 잔재주고 유희이며 돈 버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이런 식이라면 과학적인 엄밀함이 국민들의 정신에 유입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과학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는 과학적 결과들이 계속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토의되고 있다. 지동설이나 진화론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게 결국 사회를 바꾼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와 개념이 사회로 계속 유입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분야와 일반인들이 끊임없이 소통하며 미래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셈이다.
몇몇 실험 이야기를 해보자. 스키너는 1930년대 미국 하버드에서 쥐를 훈련시키는 작은 상자를 만들었다. 그 상자 안에서 쥐는 지렛대를 누르면 음식으로 보상을 받는다. 이 보상이 쥐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스키너는 여러가지로 보상을 주는 방법을 바꿔보았다. 한 경우는 보상이 정확한 규칙에 따라 주어진다. 예를 들어 지렛대를 두 번 누를 때마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경우는 보상이 나오는 게 운에 달려있게 했다. 어떨 때는 한번만 눌러도 음식이 나오고 어떨 때는 여러 번 눌러야 음식이 나온다. 스키너는 음식이 부정기적으로 주어질 때 쥐가 지렛대를 누르는 강한 습관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훈련을 하고 난 후에 보상을 더 이상 주지 않아도 쥐는 오랫동안 습관을 유지했다.
이 결과가 주목 받았던 것은 쥐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 이 실험이 뭔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도 이렇게 훈련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키우고 학교를 만들고 교도소를 운영하는데 있어 우리는 이런 결과를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때 열심히 한 만큼 그때마다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이따금씩 깜짝 놀라게 해주는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스키너의 쥐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도박이나 주식거래에 중독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생이 주는 보상이 비정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자체에 중독되어 언젠가 터질 인생의 대박 만 기다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살인자는 도덕적으로 나쁜 게아니라 나쁜 환경이 교육시켜서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인간이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자동기계라면 우리는 안락사를 원하는 개인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개인의 의견이란 어차피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걸 절대적으로 존중해 줘야 할까. 과연 과학은 윤리와 상관이 없나?
1950년대의 할로우는 육체적 접촉과 애착의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할로우는 철사로 만들어져 있지만 먹이를 주는 인형과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먹이를 주지 않는 인형을 만들었다. 그는 이 인형들을 우리에 넣고 그 안에서 어린 원숭이를 키웠다. 어린 원숭이들은 먹이를 먹고 나면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원숭이로 돌아가곤 했다.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 뒤로 숨고 달라붙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실험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단순히 먹을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애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과학적 실험들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아이가 애착을 가진 어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별다른 일이 없이 그저 같은 방에만 머문다고 해도 말이다. 스키너가 말하는 것처럼 보상과 처벌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우리는 아이들을 안아줘야 하고 올바른 정서적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아이가 자라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어른에게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고독한 인간은 건강하지 않다.
이런 과학적 결과들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이 결과들 자체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스키너의 언어이론은 노엄촘스키에 의해 비판되었으며 그 밖의 스키너의 주장도 미국에서 크게 반박되었다. 이는 미국이 자유를 소중히 하는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훈련 받은 대로하는 환경의 노예라면 자유를 주장할 권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또 원숭이는 원숭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논란과 토론의 결과 이상으로 과학적 결과에 대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스키너는 1975년의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월든2같은 유토피아 소설을 발표하고 언어학습에 대한 책을 쓴다. 그가 쓴 자유와 존엄을 넘어라는 책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사회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중서적이다. 할로우는 종종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CBS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신문과 방송들이 그들의 결과를 연이어 보도했다. 이런 사회에서 과학은 인간과 분리되지 않으며 윤리나 법과 무관하기는커녕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과학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믿고 논쟁을 벌이는 사회에서 과학은 사회의 문화에 자취를 남긴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과 단어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대중에게 파고들게 된다. 맨하탄의 놀이터에서 만나는 엄마와 아이는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엄밀한 과학적 논쟁의 영향은 그들에게도 살아 있게 된다. 그들도 어디선가 강화니 애착이니 하는 단어를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논쟁이 대중문화를 바꾸는 예는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은 한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계촌법이 자세하게 존재하여 친척간에 촌수라는 것을 따지고 사람들간의 관계에 따라 수많은 호칭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서열관계와 예법이 내려온다. 미국이나 일본은 전혀 이렇지 않다. 일본인 친구가 있다면 장인이 일어로 뭐냐고 물어보라. 그런 말이 있지만 대부분 답을 모른다. 그냥 아내의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만큼 호칭이 세분화 되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계촌법이 대중에게 널리 퍼진것은 분명 조선왕조시대의 성리학이 오랫동안 예법에 대해 토론하고 규정을 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유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우리말 안에 있는 호칭을 쓰는 것만으로도 유교적 영향력은 그대로 우리 정신에 남는다.
최근에는 황우석교수 줄기세포 논쟁이 우리나라에서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논쟁의 핵심에 있었던 것은 과학적 결과의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 의미가 아니라 줄기세포란 기술이 가져올 수있는 산업적 가치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세포가 뭔지 생물 기술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인지도는 크게 증가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한 사회의 전문가가 과학적 지식을 가진 것과 사회적인 논란으로 대중이 이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후자의 경우는 과학이 대중문화의 일부로 녹아들게 되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대중은 과학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대중에게 과학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주려면 지나치게 과학을 그저 재미있는 흥미거리로 쑈나 서커스처럼 선전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보다는 과학적 사고가 개인들에게 어떤 인생의 지혜를 주는 가를 강조해야 할것이다. 과학은 달라붙은 유리컵을 떼어내거나 자석가지고 장난할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수출을 많이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게 아니다. 무엇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을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이해하는 노력은 아주 중요하다.
미국에는 과학자만 있는게 아니라 과학이라는 문화가 있다. 과학적 결과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만들고 이것이 문화 속으로 녹아 들어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뉴스위크지를 보건 뉴욕타임즈를 보건 미국의 대중 언론에는 대개 최신의 과학계 소식이 등장한다. 서점에 가보면 최신 과학의 해석과 영향에 대한 책들이 헤아릴수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쌓여있다.
미국은 과학의 나라다. 미국이 강조하는 자유도 과학적 발전이라는 비전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의 선두에 설수 있게 해주는 것도 과학기술이었다. 미국에서 과학은 단순히 과학자의 일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과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돈이 안 되는 순수연구에 대한 투자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한국사람들은 스스로 과학을 뭐라고 생각하는가부터 점검해야 하는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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