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소설과 가상적 세계의 종말

by 격암(강국진) 2010. 5. 24.

2010.5.24

나는 오늘날 소설이라는 장르가 그 힘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도 가끔 들었다. 문제는 왜 그럴까 하는 것이다. 왜 소설은 힘을 잃을까. 내 생각에는 이렇다. 소설이란 작가가 현실을 기반으로 구성해낸 가상적 세계에 대한 기술이며 그것이 때로 사실 세계 자체를 보는 것보다 더 깊고 확실한 통찰력을 주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 짐에 따라 이러한 작업이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아주아주 내가 오랜동안 욕했던 이야기가 하나있다. 그 이야기는 실종사건에 대한 것인데 시종일관 불가능해 보이는 실종사건이 일어나고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추리와 고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갑자기 그 이유가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외계인들이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욕한 이유는 최종단계에 이르기 까지 이 이야기속에는 외계인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계인은 그냥 난데없이 나왔다. 이것은 이 이야기가 최종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외계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닫힌 공간이었다는것을 말한다. 이야기가 구성한 세계속에는 외계인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외계인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끝이난다. 

 

이것을 어떤 인과론적인 세계로 보자. 우리가 어떤 가상세계를 구성할 때 우리는 그 가상세계에 나타난 것들이 서로간에 상호영향을 미쳐서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한다. 그렇지 못할 때 이 가상세계는 매우 엉터리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 삼각관계를 그린 소설이 있다고 하자. 한 여자가 A냐 B냐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야기 끝에 가서 알고보면 이 여자는 이제까지 한번도 언급된 적 없는 옆집 유부남의 숨겨놓은 애인이었다라는 것이 밝혀지고 바로 끝이난다. 이 이야기는 매우 엉터리다.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인과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이 가상세계 안의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존재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면 모든 이야기가 들으나 마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닫힌 세계이어야 한다. 그 세계안의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이야기가 풀려나가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세상이 아주 천천히 변화하던 시절 우리는 어떤 마을, 어떤 도시, 어떤 일군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잘 묘사한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닫힌 세계를 구축하기가 쉬웠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세계화의 시대, 빠른 교통수단, 전자통신의 시대에 이제 그것은 너무 힘들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이제 다음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돈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순결해 보이는 여대생이 한순간에 도회지 클럽에서 마약 섹스파티를 벌이는 캐릭터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다. 여자를 패고 매춘을 시키는 남자가 순정을 가진 남자로 보이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순진한 어린애가 한순간에 비정한 마피아의 보스보다 잔인한 짓을 다른 아이나 어른에게 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단순화되고 닫힌 가상세계를 보게되면 요즘은 그것을 디즈니 스럽다라고 말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다루는 이야기들  특히 고전으로 여겨지는 인어공주, 백설공주, 라푼젤같은 동화들이 보여주는  따스하고 부드럽고 결함없는 그 세상은 오히려 어쩐지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느낌이 난다. 진짜 현실세계 같지 않다. 따라서 디즈니 영화는 쉬렉같은 영화로 바뀌기도 했지만 현실의 복잡성과 엽기성은 따라가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다실말해 오늘날 이야기들은 그 설득력을 점점 잃는다. 소설이란 장르가 종말한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있는 닫힌 가상세계의 구축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소설가 이거나 도서관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가지고 재구성해낸 가상세계이지 실질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배역들이 존재하고 그 배역들이 서로 영향을 비치면서 인과관계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세계는 개개인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배끼고 수정하면서 만들어 진것이다. 그 중요한 원본에는 신화가 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된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의 원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좀더 복잡한 이야기를 참고해서 개인적 신화를 만들어 간다. 그 개인적 신화 혹은 한 개인의 정신세계는 서점에서 파는 것처럼 신나고 줄거리가 명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의 전부를 다 설명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지루해지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 가상세계는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삶의 연속성을 지키고 인과응보를 믿으며 정체성의 일관성따위를 유지할 수가 있다.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의 원천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가 혼돈에 빠지면 그는 극심한 불안증에 빠지게 된다. 다음순간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렇다. 갑자기 성실하다고 생각한 남편이나 부인이 바람나서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버리는 미래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어떨까. 쌍동이 빌딩 테러사건은 미국인들의 세계관안에 전쟁터라는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렸고 많은 미국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국민을 보호할거라는 군인과 대통령이 국민을 이용하고 속인다는 생각에 빠지면 어떨까. 이 모든 삶은 불안하지 않을수가 없다. 

 

소설의 종말은 단순히 유행하던 모자가 이제는 유행이 끝났다라는 정도로 이야기될 것은 아니다. 소설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말될 수가 없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은 이야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가상세계를 머리속에 가지고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가상세계를 수정하는 일을 거의하지 못한다. 새로운 현실속에서도 과거에 집착한다. 머릿속의 이야기가 망가지면 회복되기도 어렵다. 

 

이야기 만들기가 완전히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모든 가치적 윤리적 기준이 붕괴된 사회다.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아니라면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사람이 살기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 드라마, 소설등에서 이야기를 본다. 그 이야기들의 설득력을 보면 그 사회가 어느정도 건강한가를 알 수가 있다. 오늘날 많은 이야기들의 설득력이 추락하고 있다. 세계는 건강하지가 않다. 소설은 종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말 될 수가 없다. 이 모순적인 두 개의 말은 어쩌면 인간의 몰락을 예언하는 것이거나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독서와 글쓰기 > 쓰고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쓰기가 어려운 이유  (0) 2011.08.06
가벼운 소설에 대한 단상  (0) 2011.06.20
독서의 진화  (0) 2010.05.24
비우는 인문학, 채우는 인문학  (0) 2010.02.17
연작 에세이의 모순성  (0) 2009.12.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