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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랑없이 사랑하고 신없이 신앙하기.

by 격암(강국진) 2010. 6. 1.

우리는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먼저 잊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랑이란 말을 머리에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신을 믿고 싶다면 신이란 말을 머리에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내가 되려면 나라는 말을 머리에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말들을 세상 사람들이 쓰는 의미대로 쓰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사랑과 그 신과 그 나는 사실 객관화된 남의 것인 셈이다. 그것은 관념화된 간접적 경험에 기반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틀린 생각들로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그것을 해치는 역할을 한다. 
 
여러 현인이나 철학자들은 그래서 관념의 구조를 해부하고 이해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그것들을 해체하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의 구조를 해부해서 그것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이르지 못하고 관념의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 더 많은 관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영원히 헤매는 길잃은 양들이 세상에는 또 많다. 관념을 해체하러 갔다가 더 많은 관념에 눌리는 셈이다. 
 
우리가 쇼핑몰에 갔다고 하자. 거기서 우리는 요즘 유행하는 세계 아이스크림 대회의 우승상을 받은 아이스트림을 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먹을때 우리는 우리의 혀이상으로 우리의 머리로 그걸 먹는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라는 관념을 먹음으로서 만족감을 느낀다. 혀가 보내는 신호는 그 문구에 휘둘려 상당히 많이 무시된다. 당신의 혀는 아마도 이 아이스크림이 맛있기는 하지만 이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할 가치는 없다는 신호를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머리는 관념을 먹으면서 쾌락의 기쁨에 젖어 이 아이스크림이 없는 세상에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젓가슴을 우리의 손으로 만진다고 하자. 아마도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은 그것만으로 대단한 흥분과 즐거움을 누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관념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눈을 감고 느낄수 있는 촉감의 차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촉감의 차가 그 자체로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버스속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선 여학생의 손이 당신의 손을 덮었다고 할때 당신은 굉장히 흠칫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은 다른 할아버지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당신의 심장은 급격히 안정화된다. 모든 것이 그저 당신의 머릿속에 있던 관념이었다. 
 
그나마 위에서 들었던 예에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던가 손으로 촉감을 느낀다는 1차적 경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복잡해 지면서 우리는 더더더 많은 경험없는 관념에 빠져든다. 우리는 평생 재벌들이 사는 별장에 들어가 볼 일이 없고 한번 타는데 수천만원이 드는 비행기를 탈 일이 없으며 세계 최고의 호화로운 음식들을 먹어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날로 생생하게 화면을 통해, 3D 입체영상을 통해 우리에게 배달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그런 경험을 관념화해서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완벽한 사랑이 정의되고 관념화해서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게 된다.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기반으로 더 추상적인 관념을 만들고 그것을 추상적인 공간에서 경험한다. 이제 직접적인 삶의 경험은 거의 망각되고 우리의 두뇌에 전달되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뇌는 그저 허공에서 만들어진 관념을 소비하는데 바쁘기 때문이다. 
 
오래된 관념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기존의 언어를 새로운 의미로 쓴다. 그러면 또 뒷사람은 부지런히 그 새로운 언어의 의미에 주석을 달고 그 언어를 쓸줄 아는 사람은 지적인 허영을 부린다. 그리고 나면 이제 그 새로운 단어는 새로운 관념이 되어 그 창조주도 모르는 뜻이 되버리고 만다. 
 
유명한 인물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이다. 너무나 강한 이미지는 우리가 그들을 진짜로 만날 수가 없게 한다. 체 게바라, 니체, 제임스 딘, 사르트르, 들뢰즈라는 이름들은 모두가 관념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마치 영화배우처럼 좋아한다. 대중은 철학자를 천재나 영웅으로 만들어 그들을 매장해 버린다. 그들을 평범한 대중속의 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그들의 메세지를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아주 특별해서 우리의 경험과는 다른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신으로 떠받들때 부처님의 말은 영원히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다. 오늘날의 세상에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오신다면 불교도에게 배척받고 기독교도에게 배척받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행해지는 것은 이런 이유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뜻을 진정으로 알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쪽이 훨씬 빠를 것이다. 너무도 많은 오염된 관념들이 그 이름들에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을 잊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두가지 의미에서 참이 아니다. 하나는 모든 관념을 잊어버리고 텅빈 마음을 가져도 우리는 스스로 관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관념이 없는게 아니다. 관념이란 자전거나 망치같은 도구고 인간의 능력이다. 우리는 원하면 언제든지 관념을 만들어내서 쓸 수가 있다. 
 
두번째는 관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관념을 소유하는 한 우리는 관념을 얼마든지 가지고 쓸수 있다. 즉 관념을 잊어버린다는 게 반드시 모든 관념을 쓰지 않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언어의 한계성을 알고 자기 내부의 목소리, 직관의 느낌, 1차적 경험의 소리들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관념화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더욱 만족스럽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관념에 빠져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온 세계를 뛰어다니지만 마음을 비우고 보면 내가 느끼는 행복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없거나 내가 추구해온 것들이 아니라 다른것이 필요할수 있다. 우리는 그저 식빵을 만들고 싶을 뿐인데 대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을 수 있다. 
 
인간사회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교감이다. 시스템이 그것을 대신해 줄것을 기대하면 안되고 필요이상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 자체를 희생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힘을 합치면 아주 복잡한 것들을 많이 만들수 있다. 그러나 그 기반에 있는 것은 사람들간의 교감이고 진정한 지성이다. 뭐가 필요한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필요하다. 
 
세상은 독서를 권한다.  여기에도 큰 문제는 있다. 한국인들의 마음속은 엉터리 관념으로 가득차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더 많은 관념을 퍼부어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많은 지식이 우리를 구원해 줄거라고 믿는 진보주의자는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지식의 신도가 되어 좀더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과시하면서 사람들을 더 더욱 노예가 되게 한다. 지식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필요한 지식이 좋은 것이다.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알아내는것은 오직 나의 내적인 느낌을 키움으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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