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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밖에서 안으로의 세계관, 안에서 밖으로의 세계관

by 격암(강국진) 2010. 6. 14.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체계화된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어제에 기대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고 여기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서 저쪽에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여러가지 일들은 서로 결합되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질 필요가 있고 정리되고 압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살아갈수가 없으며 안으로부터의 그리고 바깥으로부터의 요구와 압력에 대처할수가 없다. 즉 우리는 스스로 내부로부터 나오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질문들과 불만에 시달리게 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 진학을 하고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꾸리는 일에 이르기 까지 대처해 나갈 수가 없다. 

 

세계관, 자아관의 구축은 어떤 정해진 하나의 답을 한번에 학습함으로서 일어 나지 못한다. 하나의 꽃이 피어나고 씨앗의 싹이 터서 나무로 자라나듯이 천천히 여러단계를 거쳐 변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세계에 대한 지금의 이해와 그림을 폐기하고 확장해야만 한다. 하나의 세계는 깨어지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와 집, 거실의 책장정도가 세계의 전부이며 그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무시되는, 그런 세계관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세계관은 내적 외적 충격과 요구에 의해 언젠가 깨어지고 다시 완전히 새로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마치 성장하면서 집이 작아져서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하는 그런 입장에 있으며 이 들어가 살 집을 만드는 방법은 큰 중요성을 가진다.  

 

원칙적으로 말해 그것이 제 역할을 하는 한 즉 당면한 내적 외적 요구를 충실히 충족시킬수 있는 한, 집 혹은 세계관 자아관은 어떻게 만들어지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집을 만드는 방식이 그 결과물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어떤 극단적인 방식이 지나치게 많이 강조되는 것같다. 이 세계관 구축방식의 양쪽 극단을 나는 안에서 밖으로의 세계관 그리고 밖에서 안으로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선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둥그런 지구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오랜동안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는 그런 그림 내지 세계관이 현실세계에서 그다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일주를 한다던가 제트기를 가진다던가 하기 전에는 땅이 평평하다라는 세계관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내적 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족한 것이었으며 둥그런 땅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복잡성만 만들어 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현대적 시각에서는 옳지 않으며 제한된 세계관이다 (즉 현대인이 겪는 내적 외적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 

 

여기 또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이 있다. 우리가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에서 정상이론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하자. 그래서 빅뱅이 있었고 어떻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입자들이 만들어 졌으며 별들이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배운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우주론은 분명 평평한 땅이라는 세계관보다 훨씬 진보되고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이지만 밭을 개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라는 것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이르려면 끝없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너무나도 엄청난 규모에서 시작하면 지구라는 행성자체가 티끌같다. 그위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티끌 같은데 1억명쯤 죽고 산다던가 당장 내일 먹고 살 음식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대학입시에 붙는다던가 안붙는다던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당장 시급한 일은 그 티끌같은 일들이라는 것이 문제다. 

 

역사적으로는 아마도 서구의 환원주의의 영향이 크겠지만은 오늘날 세계관 자아관을 논함에 있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위의 예들 중에서 후자의 방식이 많다. 즉 우리는 아주 원천적이고 기본적이고 의심할수 없는 사실까지 파고 들어서 거기서부터 온세상을 새로이 구축해 만들어 가는, 마치 아랫층에서 윗층을 쌓아올라가고 저기 바깥우주에서 세상을 만들기 시작해서 언젠가는 우리자신에게 도달할거라고 믿는 그런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밖에서 안으로의 세계관이라고 내가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줄여서 밖안 세계관이라고 하자.)

 

밖안세계관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편성을 가진 논리에 기반하기 때문에 일단 완성이 되고나면 우리는 아주 많은 일에 대해 기민하게 세상일에 대처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제트기나 스포츠카같은 강력한 기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고 지식이 누적될수록 이런 방식의 세계관구축은 끝없이 복잡해지고 오류에 빠지기 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만들고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며 우리를 시스템의 노예로 만든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누군가는 알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걸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기 쉽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극도로 복잡한 세계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망치로 해결될 일을 위해 공장을 지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 몇천년전의 인간이 가졌던 상황과 다르지 않은 상황에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여전히 신화적 세계관을 믿고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식과 상황이 존재하지만 실은 그 신화적 세계관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는 오히려 신화적 세계관이 권장할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슈마허는 개발도상국을 도우면서 가장 복잡한 최신 기술이 언제나 가장 바람직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정수준의 기술이 우리는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발과 유지의 문제때문에 적정한 복잡성을 가지는 세계관을 써야 한다. 언제나 가장 발달하고 복잡한 세계관이 모든 사람에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세계관의 한계를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망치로 해결되지 않을 때만 공장을 사용하면 된다. 


예를 들어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남녀는 운명적인 청실 홍실로 얽혀있다는 신화적 이야기는 분명 과학적으로 허구이지만 우리는 과연 현대철학자의 철학을 얼마나 공부해야 그런 신화적 이야기가 주는 직관적인 혜택에 이를수가 있는 것일까. 그런 시각에는 어떤 장점이 없을까. 사실 장점이 없는데 전통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란 있을수 없다. 장점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 진것이니까. 


현대철학자의 철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 마치 야구를 하는데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푸는 것같은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바깥쪽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아무리 공부하고 생각해도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생활에 까지 도달하지 않는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보통의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유리되어 있다. 그래서 들뢰즈의 책을 10년을 읽었다는 철학자가 일상생활에서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황당하고 막연하기만 해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걸 전공해서 10년간 읽은 사람이 그런데 일반인이 취미삼아 가끔 들어서 과연 일상생활의 요구를 들뢰즈의 철학으로 충족시킬 수가 있을까.

 

문제 중의 하나는 번역에 있다. 오늘날,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언어로 그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순간, 다른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다른 나라의 땅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그 나라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해서 우리도 따라하려고 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들의 머리와 감정으로 우리의 머리와 감정을 대체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번역이 필요없는 클래식음악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속으로 세계적 명곡이라더니 이런게 뭐가 좋아라고 생각하면서 듣는 경우가 많다. 책과 철학은 말할것도 없다. 우리는 자기 생각이 필요하고 최소한 우리 철학자가 필요하다. 


또 다른 문제는 전문화다. 요즘은 물리를 하는 사람이 물리학자가 아니고 철학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가 아니다. 물리학 학위를 따고 대학교수자리라도 가진 사람이 물리학자고 철학강사라도 하고 책이라도 써야 철학자다. 즉 어떤 시스템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시스템의 일부인 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드는 작은 일꾼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해결해 낼수 있는 복잡하고 거대한 해답의 작은 일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세부사항을 파고 또 판다. 따라서 그들에게 뭔가를 물으면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으며 잘 하는 일 즉 세부사항을 파고드는 일에 열중하게 되기 쉽다.

 

경제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일을 하면서 학계에서 살아남는 것과 기업을 운영하고 주식에 투자하는 일을 하는 것은 서로 굉장히 다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나 시골의 농부가 철학교수보다 인생에 대해 더 깊은 지혜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들은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생각을 한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써보고 작동하는' 세계관을 만들고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다른 책을 언급하거나 전체 문제는 이건데 나는 이 작은 이부분만을 논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고에 있어서 어떤 다른 권위를 끌어다 대지 않는다. 그들은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야 말로 독립적 사상가일 수 있다. 


밖안세계관은 세계가 지독하게 커진 오늘날 -즉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의 범위가 커지고 복잡해진 오늘날- 우리를 시스템의 노예로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결국 저기 멀리 바깥쪽에서 시작해서는 중간에 집을 다 짓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그런 집을 다 지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게 된다. 보다 소박하게 자신의 집,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종종 비웃음을 사고 비과학적이고 시대에 뒤진것으로 공격을 받는다. 그들은 물론 논쟁에서 이기기 힘들다. 잡스런 지식으로 가득 차서 남을 공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종 열광적인 시스템의 맹신자가 되어 자기를 키우기 보다는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에 온통 자기 시간을 쓴다. 


그렇다면 안에서 바깥으로의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필요한 만큼의 복잡성과 해상도와 규모를 가진 집, 그런 세계관과 자아관을 쓰자는 것이며 저기 멀리 바깥이 아니라 우리 자신 우리 스스로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키워 바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상적인 구조를 가진 집한채를 만들고 복제해서 모두가 똑같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른 집에서 자기의 집을 키우고 가꾸며 살자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을 따르자면 우선 우리는 직관적 느낌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임시방편으로 쓰는 이 세계관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필요에 따라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물위에 뜬 아메바나 짚신벌레쯤으로 여기는 자세를 취한다. 짚신벌레는 물리학따위는 모른다. 그저 자기 주변의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논리적 이해, 체계적인 세계관만을 기대서는 그것에 따라서만은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많은 일상적 상황앞에서 우리의 직관에 의존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감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특히 가치판단의 문제이르면 이것이 정말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적, 일상적 내적 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든 세계관을 사용한다. 물론 책도 안 읽고 사람들에게 배우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보를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 이상으로 자기 성찰이 중시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세계관을 믿고 그것에 의존하는 태도를 취한다. 독립적 사상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사색하고 성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에만 빠지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남의 말만 듣고 그저 그런가보다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안밖 세계관을 택한 사람이 오히려 밖안 세계관을 택한 사람보다 더 바쁘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수도 있다. 게을러서 안밖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가 있지만 걷듯이, 외식할 수 있지만 때로 스스로 음식을 만들듯이 살아있기 위해 귀찮은 것을 참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두개의 길중의 하나는 학자의 길이고 하나는 수도승의 길이다.  학자의 길을 따르는 밖안세계관은 바깥에서 출발해서 안으로 들어온다. 남의 말을 배우므로 처음에는 속도가 빠른 것같지만 이 길은 자기에게 도달하기가 참 힘들다. 따라서 우리를 외부의 노예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수도승의 길을 따르는 안밖 세계관은 만약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자각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경우, 극도의 보수적 사고방식이 되고 미신적 사고방식이 되고 만다. 많은 시간을 자기 수양을 위해 써야 하며 게으른 사람이 택할 수 없는 길이다. 


어떤 방식이던 제대로만 행한다면 궁극에는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바깥에서 시작해서 안으로 도달하고 다시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나 안에서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아가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나 이 모든 과정을 마친다면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안밖 세계관쪽이 보다 현실적인것 같다. 적어도 같은 정도의 강도로 강조되어야 한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스템은 사람들을 시스템의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 그것이 시스템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못한 밖안 세계관의 추종자들은 시스템의 맹신자가 되어 불신자들을 가차없이 공격하고 비웃는다. 그들은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반면에 완성되지 못한 안밖 세계관의 추종자들은 대개는 조용히 자기만의 성채에 머물러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더 많은 자극과 정보를 추구하기 보다는 이미 가진 문제만이라도 해결하기 바라고 이미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밖안 세계관의 추종자들은 피리미드 사업자들같이 뭉치고 거대해지는 반면 안밖 세계관의 추종자들은 대개 독립적이고 외로운 존재들이며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사라져가는 종자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밖안 세계관의 방식이 더욱 우월해서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두 양극단에 대해 말했을 뿐이며 양쪽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길도 쉽지는 않다. 사람의 에너지와 시간은 유한하다. 게다가 두가지 방식으로 두 개의 세계관을 동시에 만들면 그 둘의 충돌이 만들어 내는 긴장의 문제도 있다. 그래도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게 이렇게 새삼스레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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