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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결핍과 만족

by 격암(강국진) 2010. 8. 3.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온세상이기도 하고 혹은 아주 좁은 단칸방같은 곳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이 세계에 무수히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아주 어린시절부터 알지만 그 대부분의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저 작은 골방 하나에 따뜻한 침대, 책이나 오락거리, 한두명의 친구와 가족이 온세상인 경우도 많다. 어린 아이의 경우 이것은 반드시라고 할만큼 그렇다. 어른들의 경우도 많은 경우는 그저 집과 직장, 취미공간정도가 온 세계를 이루며 그 바깥쪽에 있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뭉뚱그려져서 치워져 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결핍을 느낀다. 그리고 이 그리운 과거의 세계는 이 결핍때문에 붕괴하고 만다. 과거의 세계가 지상낙원 같은 곳이라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여러가지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안에서의 악의 근원 혹은 고통의 근원을 이해하고 있다. 뭣때문에 내가 고통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자. 이 아이의 이웃에는 못된 친구가 하나있다. 장난감을 빼앗아 가거나 놀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주먹을 휘두르고 밀치기 일쑤인 친구다. 이 친구는 워낙 힘이 세서 이 아이는 자신이 이 친구를 힘으로 누를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친구를 X라고 부른다면 X는 악의 근원이고 고통의 근원이다. X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이 아이의 하루는 즐거운 것이 되거나 슬픈 것이 된다. 

 

비슷한 것으로 우리는 인간은 먹어야 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먹어야 산다라는 사실이 악의 근원이고 슬픔의 근원이다. 우리가 이 X를 잘 다루면 하루는 만족할 만한 것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하루는 고달픈 것이 된다. 

 

내가 말하는 붕괴를 부르는 결핍은 이런 종류의 슬픔이나 고통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이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결핍은 사기당한 기분, 억울한 느낌을 만든다. 우린 우리가 어떤 사회적 규칙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를 하면 우리는 그 행동에 대해 어떤 댓가를 기대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규칙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붕괴를 부르는 결핍이란 이 세계의 어딘가가 뭔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않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고 하자. 그 중의 하나인 순진한 한 청년은 다른 남자와 여자를 같은 만큼 좋아하고 그 우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과 호의를 의심치 않는다. 그는 그 우정이 마음에 든다. 두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룩된 그 세계안에서 그는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어느날 이 청년은 다른 남자와 그 아가씨가 실은 몰래 연애를 해왔다는 것, 비밀리에 자신을 빼돌리고 둘만의 데이트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럴 때 앞으로의 일들 뿐만 아니라 그간의 모든 일들은 다시 해석되기 시작한다. 청년은 사기당한 기분이 들고 이용당한 기분이 든다. 합리화할 수 없는 옛 세계의 결핍이 느껴지고 이 청년은 이것이 세명으로 이뤄진 우정이라는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명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세울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세계는 다른 규칙이 성립하는 다른 세계여야 한다.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이 부자 병원의 원장아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도 그렇다. 둘은 순수한 우정을 나누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진학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번번이 생기는 기회의 불공평, 거기에 계급적 착취라는 시각이 더해지는 순간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윤리적, 사회적, 정신적 세계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단단하던 우정은 위화감을 주던 결핍이 뭔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순식간에 붕괴할 수도 있다. 

 

결핍은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사기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뭔가가 공평하지 않다. 뭔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하나의 세계는 결핍때문에 붕괴하고 우리는 종종 이런 붕괴때문에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때문에 이런 결핍을 느끼는 것은 권장되어지고 심지어 찬양되는 경우도 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고의적으로 결핍에 대한 자각을 주입하려고 한다. 작은 세계를 떠나서 더 큰 세계로 오라는 것이다. 

 

결핍은 또한 에너지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결핍이란 혁명이기 때문이다. 결핍이 만들어 내는 붕괴는 쌀한말에 물고기 열마리라는 교환조건의 붕괴같은 것이다. 이 교환조건이 계속 지켜진다면 어부가 부자가 되기위해서는 헤아릴수 없는 수의 물고기를 잡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딘가에 사기가 있어왔다. 이 사기, 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이해하면 우리는 단숨에 큰 부자가 되는 길을 발견할수 있을 것같기도 하다. 우정이 환상이라면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빼앗으면 그만이 아닐까? 따라서 결핍으로 세계가 붕괴하면 어떤 사람은 좌절하지만 어떤 사람은 큰 열정을 품고 새로운 세계로 달려간다.

 

낡은 규칙은 무너졌고 새로운 규칙이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혁명이 아닌가? 그 새로운 세계, 반은 바깥 세상이 만들고 반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세계가 과거의 세계보다 더 좋은 세상이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작고 따뜻하고 단순한 세계를 그리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어른의 세계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 그냥 무지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결핍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결핍은 끝없는 것이며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발전과 성장이 멈추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죽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결핍은 열정과 에너지의 근원이다. 따라서 결핍은 권장되어져야 하며 계속되어져야 한다. 결핍을 열정과 에너지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들은 끝없이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고 더 복잡한 세계로 비약한다. 그들은 하나를 이룩하는 순간 다른 쪽으로 또다시 전력질주하기 위해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만족해서는 안된다. 만족이란 두려운 일이다. 손에 들어온 것은 항상 충분치 않고 완벽하지 않다. 한계를 계속 넘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원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지 어딘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도전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핍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만족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족주의자들은 도전주의자들이 인생을 낭비한다고 느낀다. 도전주의자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속 불안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만족주의자들은 말한다. 도전주의자들은 끝없이 찾고만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찾지 못한다.

 

만족주의자들은 자신과 세계와의 조화를 생각하며 자신을 거대한 유지가능한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우린 다만 그것을 느끼고 깨달으면 충분하다. 반면에 도전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온세계를 만들어 내는 창조주처럼 생각한다. 나아닌 모든 것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만들어 질것이다. 세계는 항상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세계는 붕괴되어져야만 한다. 

 

누가 옳은가. 나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위해 이글을 썼다. 결핍이냐 만족이냐. 내 글을 전에 읽어본적이 있는 사람은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 둘 다 옳지 않다는 느낌이다. 진정한 결핍, 혹은 제대로된 결핍은 결코 고의적으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 일부러 나는 이게 부족해, 이걸 얻어야 해라는 식의 목표를 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전주의자는 어쩌면 끝없이 자신의 주의를 스스로가 만든 목표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결핍을 깨닫게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에 이런 말이 있다. 

 

멈추는 것을 알아야 정해지는 것이 있고, 정해지는 것이 있고 난후에야 차분해 질 수 있으며, 차분해 지고 난후에야 평안해질 수 있고 평안해진 후에야 사려할 수 있으며 사려한 뒤에야 성취가 있다. 

 

(김미영의 대학중용 번역에 따르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출곳이라고 했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이라고 했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 옳겠지만 나는 여기서 이렇게 쓰는게 마음에 들어 약간 고쳐서 인용했다. 이렇게 썼을때 보다 내마음에 드는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대학을 표절한 나의 문장이라고 불러도 좋다.)

 

우리가 도약할 다음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적 현실이상으로 우리의 생각과 선택에 의해서 이룩되어지는 것이다. 배우자의 불륜을 알고 우리는 지옥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천국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모든 시련이 기회가 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우리는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변화와 시련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하되 성장에 대한 조급증때문에 억지로 결핍을 만들어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도전은 평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겐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가만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급증을 가지고 마구 주물러서 급하게 완벽해 지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서서히 다른 상태로 변화하고 여러가지 부분들이 서로에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끝없이 변화한다. 

 

우리 국토는 자연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므로 모든 인위적인 개발을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인간의 영향이 이미 닿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따지고 보면 다 인공이다. 다만 오랜 시간 우리가 좋아하는 삶을 살면서 자연과 호흡하고 변화시켜온 것과 일조일석의 생각으로 자연을 다 밀어내고 새로 만들기를 하는 것과는 다를 뿐이다. 

 

만족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만족한 상태에 도달한 것이 결코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거나 세상의 모든 신비를 다 알아낸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너무나 따분한 곳일 것이다. 만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우울증 환자가 될뿐일 것이다. 

 

만족한 사람이 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거대한 무지를 인정하고 그 거대한 무지는 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책으로 가득찬 도서관의 한귀퉁이에서 자 내가 이제 이 책들을 모두 다 읽고야 말리라라고 각오를 다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물며 이 세상 전체를 앞에두고 그런 각오를 다져봐야 부질없는 짓이 될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어차피 유한하게 시작한 우리의 삶은 유한하게 끝날 것이다. 뭔가를 이룩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거대한 우주적 시각에서 보면 하찮은 것이다. 누구의 삶이나 어떤 시각으로는 하찮고 어떤 시각으로는 위대하다. 문제는 앞으로 뭘 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나는 뭘 보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책에 집중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책장에서 어느책을 꺼내어 읽을 것인가.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읽지도 않은 책이 내게 필요한 책인지 중요한 책인지 읽기전에 어떻게 아는가. 도전주의자들은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는다. 자기가 모르는 책이 있는 것에 괴로워 한다. 그래서 보고 있는 책보다는 아직 열어보지 못한 책에 더 눈이 간다. 엉터리 만족주의자들은 애초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책이든 경험이든 부질없는 짓이다라고 할지 모른다. 그게 만족한 사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평정심을 지키며 살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도전이,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책이 저절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학적 논리의 결과가 아니다. 그냥 우리는 거대한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신을 믿는 종교와 다를것이 없다. 우리앞에 나타날 결핍자체를 포함하는 거대한 세상을 생각할때 결핍은 이제 세계의 붕괴가 아니라 계절이 바뀌는 것이나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자연의 섭리가 되고 만다. 화를 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닐것이다. 문제는 올바른 때에 분노하고 올바른 때에 슬퍼하고 올바른 때에 기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떤 잘못된 느낌을 가지지 않는것, 그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만족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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