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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가장 생산적인 시간, 여분으로 사는 시간

by 격암(강국진) 2010. 8. 24.

2010.8.24.

 

지금 내가 사는 7층 아파트에서 내 사무실까지는 약 1km정도의 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약간의 아침운동을 하고 이 길을 걸어서 사무실로 온다. 

 

나의 하루중 가장 생산적인 시간을 들라하면 그것은 바로 이 길을 걷는 그 짧은 시간일 것이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좋고 이 길을 걸으면 여러가지 생각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르곤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좀더 걸어볼 생각으로 일부러 돌아서 사무실을 올 때도 있으나 그래서는 되지 않는다. 반드시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이 어떤 대단한 길인 것도 아니다. 이 길의 절반쯤은 연구소에 도달하기까지의 길로 그저 슈퍼앞을 지나고 5-6층짜리 주택사이를 걷거나 연구소의 외벽을 따라 걷는 길일 뿐이다. 중간에는 내가 항상 무단횡단하는 넓은 도로도 하나 있다. 연구소의 안쪽은 조경이 잘되어 분명 아름다운 길이나 그 길은 그다지 거리가 길지도 않다. 그런데 왜 이 길이어야 할까. 왜 이 길을 아침에 걷는 것이 생산적일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을 차린 이 무렵이 내가 가장 활기에 넘쳐있을 때이다. 머리에 들은 이런 저런 시끄러운 생각도 모두 지워져 버렸고 몸도 푹쉬어서 활력에 넘친다. 나는 항상 기억력이 너무 나뻐서 걱정스러운 편이지만 그래도 하루를 지내면 이런 저런 일들이 머릿속에 남아서 저녁쯤에는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쌓이는 것 같다. 밤새 다 잊어버려도 아무 일도 나지 않는 쓸데 없는 걱정인데도 그렇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떠서 머릿속이 깨끗해 졌을때 나는 가장 생산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 길이 변화가 있는 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아침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몇명인가 보게 되고 슈퍼앞의 물건이 변한다던지 버스정거장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길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조경이 잘되어 있는 곳에 이르면 봄여름가을겨울마다 변화를 느낀다. 꽃이 피거나 풀이 자라거나 나무가 물이 오르고 지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된다. 

 

실제로는 나는 이런 주변 풍경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내 생각에 잠겨서 그길을 느릿하고 한가하게 걷는 편이지만 만약 그 길이 변화없고 사람없는 삭막한 콘크리트 길뿐이었다면 나는 그 길을 걷는 것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변화는 항상 우리에게 자극을 주고 왠지 모를 힘을 주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집에서 똑같이 살면서도 새로움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사람도 있거니와 나는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했나 보다. 그래서 여행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버스정거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계절마다 변해가는 초목들을 보면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기쁨이 된다. 

 

마지막으로 진짜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길이 바로 출근길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해야할 일을 다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길을 걸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말하자면 할 일을 다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여분으로 하는 일이다. 일이라는 표현은 의무같아서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너스랄까. 뭔가가 생각나면 좋은 일이고 아무 일도 없어도 아까울 것은 없다. 출근길에 그 길을 걷는 것말고는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무실까지 오는 가장 짧은 길을 택해서 걷지 않고 좀더 생각하기 위해 돌아서 오면 그 길은 더이상 가장 생산적인 길이 되지 못한다. 나는 생각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에서 시간을 더 쓰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이다. 이제 그것은 더이상 여분으로 사는 시간이 아니게 된다. 내가 그것만을 하기 위해 낸 시간이다.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일도 이렇지 않을까. 우리가 만약 눈뜨고 숨쉬고 잠자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여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훨씬 많은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루 하루 일년 일년 우리의 인생이란게 뭔가 재미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건 보너스가 될 뿐이고 뭐하나 더 좋은 일없어도 아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는 태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까? 

 

아침마다 일어나 하루분의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혹은 하루분의 암기하기를 하거나 매일하는 화초에 물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좋다. 이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운동을 하면 혹은 암기를 하면 혹은 화초에 물을 주는 것으로 자신은 충분히 중요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나머지 하루는 여분으로 사는 시간같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인생을 의무로 사는게 아니라 여분으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일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맹자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라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에 주목하지만 실은 진짜 주목해야 할것은 일을 하지 않는 쪽이 아닐까. 아침에 출근하고 근무시간을 보낸후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대개 이제 나는 하루분의 일을 했구나. 나는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낼 자격을 얻었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남은 시간은 여분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고 따라서 이 여분의 시간이 실은 가장 생산적인 시간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일이란 것은 어찌보면 한편으로 이 '여분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분의 일을 하고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하루를 허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남은 하루를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루분의 일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침부터 잠잘 때까지 초조하다. 자기 자신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데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아마도 생산적인 생각을 한다던가 보다 넓고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 문제를 바라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본인이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대인의 생활이 그런 것도 있다. 근무시간은 하염없이 늘어나고 그나마 남은 시간도 뭔가 혼자 있는 시간으로 보내는 경우가 없다. 수동적으로 티브이를 보거나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로 나머지를 채우고 마는 것이다. 출근길을 느릿하고 여유롭게 걷는 속에 있는 생산성이 거기에는 없다. 초조하게 쫒기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것은 그저 생활의 한 방편일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아침 출근길의 마음과 같은 상태를 하루종일 유지할 수는 없으며 이러저런 이유를 생각해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뭔가 여유란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오늘 아침의 출근길에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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