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그릇의 크기

by 격암(강국진) 2010. 9. 21.

2010.9.21.

 

우리는 그릇이 크다는 둥 작다는 둥, 타고난 그릇은 어쩔수가 없다는 둥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때로 이 말처럼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말이 없습니다. 차라리 너그러운 사람이라던가 아는게 많다던가 하면 알기가 쉬울텐데 그냥 그릇이 크다라고만 해버리면 이게 무슨소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은 이 그릇이 크다라는 이야기는 종종 아부할때 자주 쓰는 말이 되곤합니다. 사장이 낭비를 해도 그릇이 크다고 하면 말이 되고 작은 일을 꼼꼼히 챙기질 못해도 그릇이 크다라고 해도 되고 뭐 그러니까요. 

 

그릇이 크다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말일까요. 이 그릇의 크기라는 것은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의 크기가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똑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의 크기가 서로 틀릴리가 없지 않는가하고 과학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살아가는 세상의 크기라는 것은 우리가 신경을 쓰고 애착을 가지고 어느정도 이해도 하는 그런 세상의 크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를 생각해 봅시다. 아주 어린 아이는 심지어 친구도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이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나 아빠의 관심,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장난감이 전부입니다. 이 아이에게도 집을 넘어서 그 도시, 그 고장 나아가 미국이며 유럽, 달이며 화성이며 은하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은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애매하게 존재하는 존재의 경계선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집안의 마루, 우리 가족정도가 그가 존재하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이 가진 세계를 확대해 나갑니다. 그것은 외부로 부터 밀려오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고민하고 관찰해서 바깥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일어나기도 하며 별다른 이유없이 성장에 따라 자연히 그렇게 되기도 하는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처제가 있습니다. 그런 처제가 생기기 전만해도 저에게 있어 인도네시아란 나라는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제가 있게 되자 갑자기 세상에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뉴스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뉴스나 방송에서 인도네시아에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더 주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란다고 해서 그 아이가 사는 세계가 반드시 넓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혹은 운이 나빠서 우리의 세계는 아주 작은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나의 세계는 작은 채로 남아있기 쉽습니다. 나는 그 보호막의 바깥쪽을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아서 매우 안정된 직장을 일찌감치 잡고 적당한 취미와 생활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도 매우 작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안에서 충분히 행복하며 그 세계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는 그 세계의 바깥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릇의 크기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어떤 사람의 그릇의 크기는 타고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타고난 그릇운운하면서 요즘세상에서도 마치 귀족의 자식들은 본래 타고난 그릇이 달라서 큰 일을 하게 되어 있고 천민의 자식들은 타고난 그릇이 작아서 아무 일도 못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타고난 것 이상으로 보고 듣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타고난 그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큰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란 것의 차이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릇의 크기에 대한 이런 이해를 통해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의 크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세계여행을 많이 한다고 그릇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칸트는 평생 자기가 살았던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고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이성, 윤리의 궁극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살았으니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의 넓이란 단순히 한나라정도의 규모가 아닙니다. 

 

그릇이 크고 넓은 사람을 꼽아보자면 우리는 우선 장자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자는 글속에서 스스로 작은 나무에서 살아가는 벌레나 새처럼 살지말고 천하를 덮는 새, 바다를 채우는 물고기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럴때 우리의 삶은 방향과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는 것, 보는 것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느끼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때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나는 오목을 두고 있는데 누군가는 바둑을 두고 있더라고 하면 그런 사람을 관찰하고 고민함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넓힐 수 있을지 모릅니다. 비밀의 문은 아니지만 어떤 문을 열어제치면 우리가 알던 세계는 허구이며 아주 작은 구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왜 그릇의 크기같은 것을 따지고 고민할까요? 마지막으로 이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오늘의 생각을 마칠까 합니다. 이제까지 저는 그릇의 크기는 넓을수록 좋다라고 말한 면이 있지만 사실 그릇을 크게 한다는 것, 자신이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억지로 이룰 수 없고 그렇게해도 좋을게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 인연이 닿아서,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다보면 세계는 넓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 무슨 세계 역도 선수대회처럼 각자의 그릇의 크기를 비교하고 경쟁해서 자랑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큰 그릇이 작은 그릇보다 우월한게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애초에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다른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삶의 경로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위인들을 보면 그들은 장기간의 투옥을 당한다던가 매우 어려운 가정형편에 고생했다던가 하는 고난을 겪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그런 고난을 극복하는 가운데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더욱 넓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위인들의 삶을 꼭 부러워해야 할까요? 그렇게 고생하고 극적으로 살았던 것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행복한 가정꾸리면서 한세상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백배는 행복한 삶일 수 있습니다. 게으른 삶을 찬양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앞에 떨어지는 인생의 경험 이상의 것을 위해 뛴다는 것은 그릇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기회를 놓치는 착오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눈앞에 이미 행복이 있는데 파랑새를 찾아 헤메는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릇이 크니 작니 하지만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큰 사람의 눈에는 모두가 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걸 자랑하거나 부러워 할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이상 찾지 않는다.  (0) 2010.10.13
사랑의 기술  (0) 2010.10.08
가장 생산적인 시간, 여분으로 사는 시간  (0) 2010.08.24
낭비된 시간  (0) 2010.08.04
결핍과 만족  (0) 2010.08.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