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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으며 3

by 격암(강국진) 2010. 12. 19.

주체의 해체

 

앞의 글에서 근대의 시작과 끝은 결국 신으로 부터 독립한 주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주체의 문제는 결국 나를 정의하고 분리해 냄으로서 나는 나아닌 내 밖의 저세상을 어떻게 이해할수 있으며 진리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하는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침착히 고찰한 결과 알 수가 없다라는 결론을 낸것이 바로 회의론자 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흄의 지적을 읽고 그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유명한 비판3부작을 쓴 철학자가 바로 칸트입니다. 칸트가 흄의 문제를 해결해낸 방식은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잘려나온 주체가 세상을 알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 칸트는 우선 그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세상에서 잘려나온 주체안에서 보석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이전의 것 즉 선험적인 부분을 주체는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은 경험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려나온 각각의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각각의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흄의 사고에 따르면 고립된 섬으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세상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 선험적인 부분을 말하고 우리 모든 인간은 이 부분들을 공유한다고 함으로서 보편적 진리개념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성에서 선험적인 부분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모두에게 통하는 진리라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주체는 세상과 분리된 채이기 때문입니다. 분리는 진정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여전히 어떻게 진짜 세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칸트의 이론은 결국 독단적인 주장이라고 비판받습니다. 칸트를 비판한 피히테와 헤겔이 해결책을 찾은 것은 스피노자의 일원론입니다. 즉 모든 것은 애초에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는 것이고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피히테는 절대 자아라고 했고 헤겔은 절대정신이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논의의 시작과 끝은 사물에 어떻게 정의를 주고 존재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엄밀한 정의는 수학의 기본이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엄밀성이 수학의 이상입니다. 수학은 결국 현대과학기술을 만들어 내는 기초적 정신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를 추구한 것은 현대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를 열심히 추구할경우 바로 근대철학의 병을 앓게 됩니다. 그것은 가치의 실종이고 주관적 허무주의입니다. 나를 더욱 정밀히 탐구하고 정의하여 세상에서 잘라낼수록 우리는 완전히 세상과 갈라져 홀로 존재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오히려 세상을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가 세상일에 대해 바보취급받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가치의 문제야 말로 과학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온 오늘날 그래서 진짜 중요한 철학의 문제가 된 것이며 제 개인적 인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아예 이런 문제는 논할수 없다며 다른 주제만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의 말이란 그야말로 이것이 철학인지 말장난인지 알 수 없거나 아니면 아예 언어학이나 심리학 뇌과학과 구분이 안되는 분야를 그냥 말로 떠드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즉 엄밀한 과학방법론이 없으면서 과학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죠. 

 

소쉬르 이후의 철학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이야기하는 것을 마무리 지으면서 언급하고 정리할 사람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입니다. 이들이 그들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라지는 점은 어떻게 말하면 진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를 적어도 포기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라고 하면 그냥 나였는데 프로이트는 우리안에는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결정은 전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주체의 문제이며 근대철학의 중심이라고 할때 이들이야말로 현대철학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마르크스는 나는 누구인가 대신에 나는 어떤 사회적 관계를 가지는가하는 질문을 물었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했다는 마르크스는 같은 것도 그것을 접하는 사람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돌멩이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돌멩이는 살인무기로 쓰일수도 있고 댐을 만드는 재료가 될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바로 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의 문제가 근대철학에서 실종되거나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한 철학자로 소개됩니다. 우리는 뭐뭐란 무엇인가대신에 뭐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고의로 이 세 사람에 대한 소개를 한두줄로 정리했습니다.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원전을 읽거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직접 읽기바랍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사실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꼭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쉬르이후의 논의를 생략해 버리는 것도 그래서 입니다. 

 

철학자 백사람의 개념과 결론을 대충들어 아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백해무익합니다. 남들이 대충정리한 것을 다시 대충정리하면서 이름만 죽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르크스나 니체보다 훌룡한 철학자인가도 확실치 않기 때문에 더그렇습니다. 백명 천명의 혼동을 일부러 머리에 집어넣고 같이 혼동될 필요가 있을까요. 피히테의 자아란 보통말하는 자아가 아니고 니체의 권력의지란 보통말하는 권력욕이 아니고 하는 식의 이야기를 그저 머리속에 집어넣는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 세상에 진짜 문제는 두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과학적 합리주의고 또하나는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우리는 어떻게 과학적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된 지식을 만들고 유지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상한 철학을 배워서 자랑하기 위해 이런 질문이 필요한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도구로서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웁니다. 그안에서 방법론을 배웁니다. 과학자가 아니라도 셀러리맨이나 주부도 할일을 적고 생활을 조직하고 어떤 조직안에서 활동하며 논리적 눈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근거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용없는 말장난 숫자장난에 속고 모르는것을 안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이 가치를 느끼고 판단을 내리는가. 어떤 식으로 판단에 이르는 것이 필요한가. 우리는 이것도 고민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 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지금 당장 바로 여기서 필요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걸 잊어버려야 합니다. 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가능한 경우에 필요한 도구를 전부 다 구하고 시작할 필요는 없겠죠. 지금 각자의 앞에 있는 문제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준비하고 살다가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더 구할 수도 있겠죠. 또한 질문을 잊지않고 고민한다면 어디선가 모두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철학자들이 내린 결론과 같은 것 혹은 그보다 훌룡한 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옛날 철학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그 개념속에서 뒹굴다보면 자칫하면 밥짓겠다고 황무지개간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바보짓이 될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 쌀집이 있는데 말이죠. 살피는 일을 잊고 시야를 좁게해서 저기에 답이 있다고만 생각하게 되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양명학에서는 지행일치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만약 행하는 것이 없다면 진짜로 아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훌룡한 것을 알면 힘써 행하라는 말이 절대아닙니다. 진짜로 안다는 것은 도덕체 체험이나 신을 접한 체험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중요한 것이고 진짜로 그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아는 것과 자신의 삶이 달라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아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인의 찌거기도 찌거기라고 하는데 별별 철학자들이 남긴 조각난 파지들을 신주모시듯해서는 인생이 아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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