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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으며 2

by 격암(강국진) 2010. 12. 17.

주체와 객체

 

서양철학사를 읽으면 앞의 글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것이 핵심적 단어로 등장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렇다면 왜 동양권에서는 이런 것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주체라는 것, 그에 따르는 문제점 그리고 동양의 경우등에 대해 몇가지 여기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중세철학의 거두인 아우구스 티누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절대적 진리란 존재한다는 예로서 들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이성적 사고만으로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존재한다같은 문장은 생각해 보면 매우 미묘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서양철학의 온갖 문제점을 시작시킨 원흉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참치에는 대뱃살이란 부분이 있습니다. 참치를 많이 먹는 일본에서는 사치스런 고기의 대명사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대뱃살이 참치에 존재하는가. 이 문장은 거의 의미가 없는 자기 순환적인 질문입니다. 대뱃살은 물론 참치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대뱃살이 뭔지를 정의하고 이름붙이고 참치의 몸뚱아리를 갈라서 이 부분이 대뱃살이라고 한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여기를 대뱃살이라고 하자고 이름붙이고 참치에는 대뱃살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웃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거기에 정의를 주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 되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뭐뭐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이미 그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자체는 이름과 정의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고 질문을 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존재합니다. 다만 영역을 나누어 여기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만 묻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게 준 정의와 주어진 상황이 부합하는 가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방안에는 날개달린 인간이 있는가 라고 물었을때 날개달린 인간이란 우리의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날개달린 인간이 뭔지 압니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존재는 상상속에 있고 지구위에서는 발견된 바 없다는 것뿐이죠.

 

만약 어떤 것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없습니다. 롱장이란 것이 있고 롱장은 정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롱장이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조금만치도 정의가 없으니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를 따져볼 방법도 없습니다. 

 

이 이름을 주고 정의를 주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한 까닭은 나는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때문입니다. 즉 나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나를 탄생시키고 나서 질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우리는 이미 '나'에게 정의를 주고 그게 뭔지 압니다. 그래놓고 아무 제한이 없이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물론 존재하죠. 이미 질문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이 미친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나의 정의를 모른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러면 질문은 롱장의 존재에 대한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이런 미묘하고 말장난같은 이야기는 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정의를 한다는 것은 대뱃살을 참치몸통에서 갈라내듯이 세상에서 그부분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테두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테두리를 치고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상이 테두리의 바깥과 안으로 되어 있다면 그 둘은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테두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바깥과 이어져 있지 않고 이미 바깥이라면 안쪽과 이어져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을 물질과 마음으로 구분한다고 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질과 마음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순간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럼 나는 나아닌 세상에 대한 진리를 어떻게 알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와 내가 아닌것은 단절되어 있으며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인것도 아니고 나 아닌것도 아닌 것이어야 해서 나와 나아닌것이 서로 소통한다면 2원론은 3원론이 되고 3원론은 다시 4 5 6원론으로 끝없이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 서양철학의 주요주제라고 하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다 주체가 주체아닌것과 분리되어져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고 결국 답은 없습니다. 모두가 헤매다가 결국 일반적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신을 등장시켜서 얼머부리고 맙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소개하는 유명론과 실제론의 논쟁도 여기서 기원합니다. 신을 믿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 관념이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단절된 세계가 되고 유명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그저 이름 뿐일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왜 이같은 문제로 고민하던 공자나 부처, 노자나 장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경우, 그들은 결코 모든 것을 안다거나 정의할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나 노장은 물론 공자도 사후세계같은 것에 대해 논의하기를거부합니다. 인과 같은 개념은 정의가 없이 사용됩니다. 부처는 수십년을 말씀하시고 내가 말한 법이 없다고 하시고 법도 버리라고 하셨죠. 노장은 도는 통나무처럼 쪼개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에서는 무한히 존재하는 무지 혹은 신비를 인정하면서 사고하기 때문에 분리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절대적 신의 존재같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인식론이니 윤리학이니 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절대적 인격신이나 주체를 등장시켜 온갖 착각으로 정신적 고민을 가졌던 서양의 그것에 비해 오히려 훨씬 우수한 시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서양의 사고방식이란 부모님이 전기콘센트에 손대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인데도 고지식하게 난방기구를 켜지 않는 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수 있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서양을 보면 동양이 정신적으로 뒤진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사실 애초에 누가 더 위니 아래니 하는 소리는 하나마나한 것입니다. 서양이라고 해서 합리주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서양의 근대이전에는 동양의 사고방식이 훨씬 유연하고 포용력이 컷습니다. 그리고 더 커다란 사회적 포용력을 보여주며 더 커다란 국가를 만들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물론 산업혁명이후 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부터입니다. 주체적 인간이란 엄밀한 사고를 하는데 훨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훨씬 뛰어난 기계와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도 더 뛰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을 내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합리주의는 윤리적 발달까지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다시말해 산업화는 결국 인간을 기계부품이나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악성자본주의를 발전시킵니다. 

 

그것이 극대화되어 극명하게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근대의 위기입니다. 계몽주의에 반대해서 직관을 강조하는 낭만주의가 나오고 서양에서는 중국과 인도 문화가 유행합니다. 불교나 노장 유교서적이 연구됩니다. 20세기 미국의 히피운동은 선불교나 인도신비주의철학에 대한 추구와 맞물리면서 일어나고 인간해방 자유를 부르짓습니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한두마디를 하고 이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주체적이 된다는 것은 합리주의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과 내가 분리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윤리적 허무주의가 발생합니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일원론으로 피해갑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아무도 겪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세상과 강렬하게 분리하려는 욕망은 어쩌면 인격적 절대신의 억압이 그토록 싫었기 때문일것입니다. 중세적 시스템의 억압에 지나치게 반발해서 나만 주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애초에 주체운운하다가 생겨난 그 문제를 피해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보다 훨씬 훨씬 전에 부처님이나 공자님이나 노장이 다 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스피노자를 그들에게 소급시켜 버리지는 않습니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니까 다르게 말하고 다른 걸 아는 것도 있겠지요. 저는 스피노자가 어떻게 했다를 말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왜 스피노자 철학이 19,20세기 서양철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가 근세가 시작될때 근세의 문제를 이미 돌파한 사람으로 말해지는가를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말할뿐입니다. 

 

우리는 21세기를삽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를 확립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모르면서 자신은 합리적으로 살고 과학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를 확립하기는 커녕 남의 흉내내느라고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는 확립했으되 그렇게 만들어낸 주체 혹은 자아란 실은 세상과 분리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와 가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모릅니다. 여러가지 병들에 대한 처방전이 돌아다니는 가운데 처방은 모두를 위해서 하고 각 개인은 자기가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약을 먹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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