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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으며 1

by 격암(강국진) 2010. 12. 17.

어제부터 틈틈히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모르나 이책은 한때 철학좀 공부해 보겠다는 학생들이 교과서삼아 읽곤했던 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생때 저는 이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30이 넘어서야 읽었죠. 이제 이책을 다시 읽으면서 이책에 대한 느낌이나 내용에 대해 몇가지 써볼까 합니다. 

 

나는 왜 이책을 읽는가

 

우선 말해 둬야 하는 것은 나는 이책을 왜 읽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냥 이책이 좋은 책이니까 훌룡한 책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소금도 많이 먹으면 독이되듯이 나는 반드시이책이 모든 사람에게 득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실은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읽는 것은 자기 자유지만 어떤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책을 뛰어넘을 생각이 없으면 이책을 읽는게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마도 대개는 피해가 될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이 이책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 써두겠으며 여기서는 우선 나는 그럼 왜 이책을 다시 읽는가를 몇마디 하고 넘어갑시다. 

 

우선 나는 이책을 체조처럼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이책을 읽는 것은 수학연습문제를 풀듯이 멀리는 동서고금의 서양철학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차이점이나 해석의 문제 그들의 생각의 기반을 생각해 보는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며 가까이는 이책을 쓴 이진경이란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와 대화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나는 이책은 부질없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살면서 우리는 많은 부질없는 짓을 하면서 살지만 말입니다. 동서남북이 모두 막혀있다면 부질없는 짓이라도 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좋을지 모르죠. 정리보다는 혼동을 위한 독서인셈입니다. 제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의 경우는 십중팔구 그런 의미를 가질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는 철학을 쉽게 소개한다는 공개된 책의 기본취지를 생각했을때 나는 그들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의 앞머리부분에서 문제에 대한 답은 상당부분 문제설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을 저자는 합니다. 저는 바로 똑같은 말을 이책전체에 대해 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동서고금의 서양철학자들의 생각을 나열하면서 주로 근대나 탈근대란 것은 무엇인가와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나열되는데요. 이런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저는 가상의 한국드라마광인 한 일본여자의 이야기를 해야 겠습니다. 

 

한 일본여자가 한국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소지섭이며 장동건이며 배용준이며 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그들이 어떤 드라마에 나왔으며 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사에서 어떤 유행을 가져와서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하는 이야기를 죽 하는 것이죠. 만약 제가 소지섭이 누구야 하고 묻는다면 그 여자는 흥분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못봤다면 한국드라마에 대해 안다는 말을 할수 없다면서 흥분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남녀주연급 배우뿐만 아니라 조연에 프로덕션에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죽하려고 하다보면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집니다. 

 

그럴때 누군가가 질문할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자세히 알필요가 있는가. 그중에 누구하나 모르면 마치 전체에 대한 이해가 무너진다는 식으로 말해서 우리가 모두를 알아야 하는 것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들은 왜 중요한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럼 아마도 그여자는 눈을 껌뻑이다가 말하겠지요. 한국드라마 재미있잖아라던가 한국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국드라마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던가. 첫번째의 경우는 자신의 취향을 말하는 것이고 두번째의 경우는 지식의 현실적 유용성을 말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첫번째는 개인의 취향이며 두번째의 경우도 반드시 한국드라마를 통해서 이해한 한국이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철학개론서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이진경씨를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기분나빠할지 모릅니다. 저는 이진경씨를 좋은 필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를 메시아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할뿐이며 사실 이책은 한국에는 철학을 한다기 보다는 철학의 오타쿠가 된 사람이 많다라는 세간의 비판에 부합하는 냄새가 좀 납니다.  

 

우선 철학을 배운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돕는다는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이해와 설명이 매우 간략합니다. 이진경씨는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라는 한줄로 그러므로 철학은 가치있다는 식으로 하고 본론인 서양철학의 세부사항에 공간을 크게 할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철학하기를 생각하기로 말한다면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도울까하는 문제를 자기나름대로 깊게 생각하는 것이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지식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부분은 간략히 넘어가고 길고 긴 책내용속에서 이진경씨는 남의 철학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나쁠것은 없으며 이진경씨의 작업이 그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저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이런 류의 책을 읽었을때 이진경씨의 설명이 다른 사람의 설명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혼동만 줄 가능성이 큽니다. 자제한다고 하지만 페이지 페이지마다 개념의 홍수를 이루며 말장난같은 단어들이 나열됩니다. 물론 그것들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며 스콜라철학이며 하는 것을 한두줄로 정리하면서 넘어간다면 말장난과 간략한 설명은 구분이 힘들어 집니다. 이진경에 대해 누가 세줄로 정리하고 넘어간다면 이진경씨는 나름대로 할말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분량의 한계가 있는데 끝없이 이야기를 할수는 없지 않는가라는 반론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들은 흔히 분량의 문제이며 시간이 있다면 더 말할수 있다고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다름 단락에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체를 말하는 주체가 없는 책

 

근대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진경씨도 말하듯이 그것은 주체와 객체 특히 주체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낸다는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근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남의 이야기만 잔뜩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먹을거라고는 양파와 당근뿐인데 날마다 당근만 먹습니다. 먹어치운 당근의 양이 몇트럭이나 됩니다. 반면에 먹은 양파는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입으로 양파야 말로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것 아니겠습니까?

 

근대를 넘어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모던철학의 자세만이라도 나는 가졌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철학, 자신의 느낌을 숨기고 뒤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진경씨의 철학책보다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더 모던철학을 더 잘말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거의 소설의 전체내용이 나에 대한 것입니다. 소설에 줄거리가 너무 없어서 이게 소설인가 싶을 정도의 것도 있는데요. 전체분량의 대부분을 자신의 상상이나 독백으로 채워넣기 때문입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매우 진공속에 홀로존재하는 개인같은 느낌이 납니다. 가족도 별로 없고 그런것에 얽매이지도 않으며 사랑에 빠지더라도 나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한 욕구를 저변에 깔고 있으며 누가 뭐라고 하건 내식대로 산다는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이게 주체아닙니까? 철학사 줄줄히 이야기하면서 남의 이야기 정리만 하는 것이 주체입니까? 저는 반드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체적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체적인 것이란 우선 나의 생각을 가지고 나의 시각을 분명히 하고 이것은 나의 해석이란 것을 보다 분명히 하면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은근슬쩍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절대적으로 옳은 논의를 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로 자신을 숨기고 달성될수 없는 중간자적인 공평한 입장에서 이사람은 이렇고 저사람은 저렇고 하는 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태도야 말로 중세적인 것이며 뭐가 진리인지는 모르나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이중에 어느것이 진리인지 찾고 있다는 태도가 깔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오타쿠들의 자세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이진경씨를 인문오타쿠로 폄하하는것같이 보이지만 저는 반드시 그렇게 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진경씨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많이하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며 다른 사람은 오히려 훨씬 더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책을 쓸수도 없으며 쓴다해도 제가 읽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진경씨를 비판했지만 자기 책을 썼다라는 점에서 이진경씨가 주체적이라는 점은 인정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것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남의 이야기는 아무리 길게해도 잘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남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건 그것은 큰 착각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에 대해 백권의 책을 쓴다고 그게 스피노자의 이해의 완결판이 되겠습니까. 남에 대해 정말로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통한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진리를 깨달을수 있으며 서로 그것을 깨닫고 있다라는 것을 전제했을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이 없다면 글로 씌여진 남의 생각 백년천년읽어도 진의는 알수 없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그걸 잘정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불이 났던 시대에 물을 준비해서 불끄자고 말했더니 후세사람이 그런 문맥은 떼어버리고 그는 물을 중요시 하는 물중심주의자였으며 후세에 돌을 중요시했던 누군가와는 다르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세사람은 홍수가 나서 댐을 만들고자 돌을 모으고자 했던거라면 정말 이 두사람은 다른것일까요? 

 

철학과 굴뚝청소부가 우리 주체적인 인간이 되자라는 말을 하는 것이 본론인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중세적으로 살아보자고 하는 책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 양파와 당근의 예처럼 이 책전체의 흐름이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책을 능가하고 넘어설 용의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경우 근대를 배우기는 커녕 중세의 농노신세로 떨어지고 맙니다. 바로 개념과 지식의 늪에 빠져서 나중에는 자신을 더더욱 잃고 이진경같은 지식높은 분이 뭐라고 하면 나는 잘 모르지만 많이 아는 분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식의 로보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철학을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것일까요? 

 

맺는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과거의 문제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입니다. 얼마전에 블로그때문에 한국에서 나름 이름있는 젊은 철학교수의 강연의 개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요는 랑시에르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바로 지식나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전공자들의 토론이 아니라 일반대중을 위한 것이라면 누군가의 철학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당시대적인 언어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개요를 가진 댓글을 단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길 한국에서는 40대쯤되는 철학교수가 자기철학같은 것을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자기 철학운운하려면 한국에서는 은퇴하고 7-80쯤되어서 이야기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전에는 바로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하는 것처럼 동서고금의 철학지식을 줄줄히 나열해서 듣는 사람들을 비주체적으로 만들고 중세의 농노로 만드는 것이 한국 철학교수들이 해야할 직업적 소명이란 고백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철학은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위험한거라는 대중적인식이 있는 것이며 그 인식은 사실 옳습니다. 다그런건 아니라고 해도 많은 철학전공자들이 호시탐탐 누군가를 자기 노예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마치 숙주 뱀파이어에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된 차세대 뱀파이어가 다른 희생자를 찾듯이 그들은 자신을 잃고 누군가를 숭배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고 자신을 잃게 만들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붉은 이빨을 내미는 것입니다. 

 

 제가 주체 주체했습니다만 주체적이 되는 것 자의식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번도 주체적이지 못해본 사람이 주체의 해체를 논하는 것은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달리는것 걱정하는 셈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우선 주체를 가져야겠지요. 자기 생각이란 것이 없이 제아무리 세상을 둘러봐야 노예밖에는 될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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