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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0. 9. 27.

이 책은 얼마전에 작고하신 법정스님의 책으로 류시화가 법정스님의 말을 모으고 각 꼭지마다 머릿말을 붙여서 만든 책이다. 이 책은 반복되는 말도 많고 길지도 않은데다가 복잡한 논리도 없는 책이니 어찌보면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읽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말은 그 유명한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주종을 이루며 자유를 얻어라, 자기가 되라, 자연속에서 살아가라라는 메세지가 반복되고 있다. 사실 어린애가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수히 들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면 심드렁하게 읽게 될수도 있는 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책에서 어떤 지식을 얻는다기 보다는 이 책이 어떤 음악같고 늘 마시던 한잔의 차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법하다. 다시 말해서 뭐하나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한글자 한문장을 읽는 것이 휴식이 되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것이다. 


내게는 윤오영의 수필집이 그런 책에 속하는 책인데 작은 책을 많이도 읽었지만 그래도 책을 다시 펴보면 또 다시 세상을 떠나 휴식하는 느낌을 준다. 이 산에는 꽃이피네도 분명 그런 종류의 책으로 어떤 지식을 배워 안다기 보다는 휴식을 시켜주는 책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말에 이 책을 한번더 읽으면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법정의 이 메세지를 오독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법정의 메세지를 욕심내지 말고 착하게 이웃도우면서 되도록 단순한 삶을 추구하면서 가난하게 소유하지 말고 살아가자는 정도로 알고 말것이다. 이 말도 맞다. 하지만 이 말만큼 틀린 것도 없다. 


먼저 가진다는 것이 뭔가를 생각해 보자. 아주 유명한 불교의 설화에 개울을 처녀와 건넌 스님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인즉슨 두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아리따운 처녀를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수도승중의 하나가 그 처녀를 업어다가 개울을 건너게 해주었다. 그렇게 하고 길을 또가다가 보니 한 수도승이 처녀를 업었던 수도승을 비난한다. 수도승이 여자의 몸과 접촉했으니 좋지 못한 짓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처녀를 업었던 수도승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그 처녀를 내려놓고 온지 오래지만 당신은 아직도 그 처녀를 들고 있구려. 


이 이야기가 주는 메세지는 문맥에 따라 여러가지 일수있겠으나 나는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자 인용해 보았다. 무소유에서 가장 쉬운 무소유가 눈에 보이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다. 억지로 이것저것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쉽다. 물론 평범한 직장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쉬울리 없지만 그 쉬울리 없는 일이 실은 버리는 일중에서는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다 버리고 산속에서 짐승처럼 산다고 한들 머릿속에서는 도시의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이 가득차 있고 욕망과 쾌락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것이라면 버린게 버린게 아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흔한 이야기다. 나는 단지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뭘 가졌는지를 인식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뭘 가졌는지를 모르며, 자기가 뭔가를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젠 자신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친구를 가지는 일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건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친구를 가진다는 것이 친구를 소유하는 일이 되고 마는 일이 아주 많다. 심하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날마다 이 친구 저 사람 만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주변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 시간과 돈을 쓰는 무소유의 실천자, 이웃사랑의 실천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 내부에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의 생활은 친구를 소유한 것이고 그 소유에 자신을 빼앗기고 만것에 지나지 않을수 없다. 


자신을 가진 것과 자신을 가지지 않는 것은 단하나의 행동과 특징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좋은 음표가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닌것 처럼 하나의 행동과 특징이 반드시 길게봐서 좋은 결과만을 나타내지는 않으며 남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도 본인은 그저 기계적인 윤리관에서 행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따. 라. 서. 누군가 훌룡한 사람의 거죽을 흉내내는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법정은 출가한 스님으로서 자신이 처한 환경속에서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하고 행동한다. 나는 결코 법정을 비난하거나 이중인격이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지만 법정은 무소유이되 영향력있는 유명인이었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 인물이었다. 한마디만 하면 온 사회가 신경을 쓰는 사람의 '침묵'과 백마디 천마디 해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의 침묵은 또 다르다. 법정은 부처를 죽이라는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이 되라고 외치는데 누군가가 법정의 껍데기를 흉내내고 있다면 그것만큼 법정의 메세지를 거꾸로 이해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법정이 가진것은 내가 가진 것과 다르다. 내가 가진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가진 것과 다르다. 가진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관념들, 경험들, 이론들이다. 서로 가진 것이 다르니 무소유해야 할 것도 다르다. 


법정은 많은 것을 버리고 일찌감치 출가를 한 사람으로 스님이라는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니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이 당연히 가지는 것중에도 애초에 그런 것 가진바 없는 것이 있고 남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이 가지게 된 것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법정이 대학입시며,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며, 자식 교육이며, 가족들의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스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얽히는 일에서 애초부터 상당부분 떠나있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법정은 당연히 여러 법문들을 많이 읽고 익혔을 것이다. 읽고 익히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지 모르나 그것도 무소유가 되기전에는 소유다. 출가한 중이 되었으니 교회에는 갈 수가 없고 목사가 되었으니 절구경을 갈 수 없다면 뭔가가 되어서 더 부자유해진 것이다. 그것은 소유다. 법정은 바로 불법을 무소유하기 위해 평생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그가 돈을 가졌다고 한들 얼마나 대단히 가져봤을 것인가 그가 남보다 더 많이 가졌던 것은 불법이었고 그걸 무소유하는 일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무소유의 메세지를 심드렁하게 이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아니라면 대부분 가지지 않는다는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자신이 뭘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런 책에서 더 많은 소유할 계율이나 비법이나 지식을 찾는다. 통장이나 몸에 걸친 장신구가 아니라 머릿속에 집채만큼 쓸데없는 것을 소화불량으로 들고 있으면서도 버리는 일이 뭔지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뭔가 더 기묘해 보이는 지식을 찾아 더 소유해 보겠다면서 떠난다. 무소유하는 일도 하나의 지식이나 비법으로 소유해 버리고  만다. 


세상이 불법으로 가득차 있던 시대에는 우리는 불법을 무소유해야 했을 것이며 세상이 기독교의 계율로 가득차 있다면 기독교의 계율을 무소유해야 할것이다. 세상이 자본주의 논리나 막시즘이나 과학만능주의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들을 무소유해야 한다. 


그런데 무소유한다는 일은 단순히 그걸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다. 그건 개울에서 업어준 여자의 몸을 억지로 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에 무식한 것이 과학을 무소유하는게 아니고 단순히 재물을 가지지 못한 것이 재물을 무소유하는게 아니다. 공산당은 싫다고 반공논리에 열을 올리는 것이 막시즘을 무소유하는게 아니다. 


무소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보다 더 커지는 것이다. 그 한계를 보고 품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돈의 한계를 볼때 자본주의를 무소유할 수 있고 과학의 한계를 볼때 과학을 무소유할 수가 있고 막시즘의 한계를 볼때 막시즘을 무소유할 수가 있다. 무소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과학과 막시즘의 유용성을 인정하되 그 한계를 보는 것이 자본주의, 과학 그리고 막시즘의 무소유다. 커지고 커져서 온세상을 다 품고도 남을 정도가 되면 온 세상을 무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따. 라. 서.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고 공부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지식을 찾아 헤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일수도 있다. 산에서 홀로 사는게 아니라 직장에서 자기 가게에서 자기 연구실에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 고민하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소유에 자기를 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동시에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재벌처럼 돈이 많아져도 그 사람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고 길거리의 노숙자로 살아도 가진것이 너무 많을 수도 있다.  


따, 라. 서. 이웃사랑이 중요하다니까 그걸 그저 주어진 윤리적 계율로 알고 그걸하거나 법정이 책을 가지는 일도 너무 많은 소유라고 말했다고 해서 자기 책도 다 가져다 버리고 쓸데없는 지식 머릿속에 넣지 말라고 하니까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자기는 가난하니까 이미 무소유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짚어도 크게 잘못짚은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실은 삶과 행동은 정신과 둘이 아니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흉내내는 삶을 살면서도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사실이다. 될수 있으면 간소한 삶을 살고 고독을 느끼고 고독한 시간을 가져보고 이웃에게 뭔가를 주는 경험을 하고 쓰잘데기 없는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일을 피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준비하는 일이 되기는 할것이다. 


법정류의 메세지는 분명 이 세상에 흔하다. 문제는 무위를 먹고 노는 일로 생각하듯 무소유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는 점이다. 수학과 물리학, 거대한 기계, 거대한 조직, 장사, 연구, 즐기고 노는 문화활동은 왠지 무소유에 반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일부는 무소유란 그저 낭만적 헛소리라고 무시하고 일부는 실제로 반문명적으로 사는 것을 계율로 받아서 그렇게 산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나는 기계가 싫소 나는 여기를 걷겠소 하는 식이다. 그러면 사고가 난다. 실은 무소유의 메세지는 그것보다 훨씬 큰 이야기다. 너무 작은 눈으로 그걸 폄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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