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적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많은 사상가를 끌어들였다. ( 내가 서평을 쓴바 있는 많은 책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양명학연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의 기술, 인간을 묻는다, 이분법을 넘어서- 모두 이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한데 특히 문명적 발전이 가속화되온 지난 몇백년간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따라서 이제는 그저 머리좋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해결하겠지 라고 생각할 그런 사회적 문제라기 보다는 개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듯이 챙기고 사색하고 공부해야 할,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오류에 빠져들기 쉬운 문제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적 마음이 없는 사람은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는 사람이나 고속도로를 뛰어가는 사람과 같다. 도구적 존재로서 과학, 시스템적 분석, 수학적 사고, 체계화된 지식의 힘은 대단히 커져서 누구나 그 힘을 사용하고 있다. 과학적 마음이 없는 사람은 도구적으로 무능하다.
반면에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가치판단적으로, 윤리적으로 무능하다. 그래서 사회를 가득채운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미친듯이 달리는 기차나 스포츠카의 부품처럼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강한 부하를 받으며 일하고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허무함에 빠지는 혹은 남을 해치는 부질없는 권력, 돈, 명성에 대한 욕심에 빠지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다.
오늘날 인문학-과학의 분열문제가 사회적 수준을 넘어 개인차원에서도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가 된 이유는 그만큼 사회가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보다 버스를 운전하는 아이는 빨리야 달리겠지만 보다 위험한 상태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문학과 과학을 평화롭게 공존시키는 것이 어려운데 사람들은 한시도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여러가지 교육을 받고 입시공부에 어릴때부터 뛰어들어서 초중고 교육은 물론 대학도 당연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석사 박사까지 받는데다가 매일같이 업무와 관련된 공부를 한다. 공부는 나쁠게 없지만 뭘 공부하는가가 문제다. 시스템화된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전문화된 분야의 공부다. 한마디로 기계의 부속품이 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행동, 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직업이 우리의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사는 범인을 잡고 검사는 기소하고 판사는 판결하고 누군가는 죄인을 관리하거나 사형을 집행한다. 그 과정속에서 사람들은 점점더 빨라지고 정밀해 질것을 요구받으며 자기일에 매몰되어 간다. 사람을 다루고 있어도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며 죽도록 열심히 일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삶의 전체적인 의미, 자기가 하는 일의 전체적인 의미는 보이지가 않는다.
거기서 답답함을 느끼고 뛰쳐나가거나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반문명적으로 보이는 사회운동가거나 그저 불안하게 구석방에서 늙어가는 노인들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문제가 뭔지 관심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문제는 그저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개 이 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자 가해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하는지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문제다. 과학과 인문학중 어느쪽으로 사회가 크게 기울었다 싶으면 반드시 학살과 독재가 넘쳐난다.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공산주의 혁명같은 걸로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도 그런 것이고 자유를 찾는다면서 마약으로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 사이비종교가 넘쳐나는 것,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뒤에 숨어서 도덕적 가치적으로 썩어버리는 것도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과학덕분에 생존하고 있다. 전기만 끊겨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조속한 시일내에 죽을 것이다. 반문명적 태만이 대안이 될수도 없다. 과학의 발전을 막을 방도도 없다. 스마트폰의 시대에 삐삐가 좋다고 모든 사람을 삐삐 쓰게 만들수 없는 것과 같다.
월슨이 이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은 계몽주의적이며 과학만능주의적이다. 과학적 접근을 통해 미신적 믿음을 걷어낼수 있다고 그는 믿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 계몽주의 이래의 철학적 사조를 정리하고 왜 낭만주의적 사조에 계몽주의가 좌초했는가 그리고 그리고 본인은 왜 포스트 모더니즘을 좋아하지 않는가를 기술하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이제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이 저지를수 있는 실수를 피해서 본래의 계몽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의 과학적 이해라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통섭이라는 이 책 자체는 매우 유익하며 이따금 지루하지만 많은 부분이 대개는 매우 흥미롭다. 이 책에서 윌슨은 방대한 분야에 걸쳐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과학적 혹은 인문학적 사실들을 본인의 여러가지 희망내지 추론과 함께 나열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윌슨의 오류를 지적할 셈이며 책을 읽기전에 경고의 말을 한두마디 덧붙일 참이지만 그러기 전에 공평을 기하기 위해 윌슨에 대한 옹호의 말을 얼마간 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윌슨이 가진 통합 혹은 통섭에 대한 열정은 이책에 가득차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윌슨이 가진 지식의 폭에 감탄하게 되며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오랜 기간 헌신한 사람을 볼때 느끼는 경외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모든것에 대한 일관적 이론을 만들겠다면서 온갖 지식의 영역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 섭렵한 셈이라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성실하게 그일을 해왓다. 40페이지로 신경과학을 요약한 한 챕터만 봐도 읽는 사람은 그저 그런가 하고 읽으면 그만이지만 오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전반부는 과학과 철학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뇌과학에 까지 도달하는가를 설명하며 그 이후 유전자에서 문화현상, 인간본성, 사회과학, 예술, 종교, 윤리학등 여러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룬다.
그가 모든 현상을 하나로 꽤뚫으려고 할때 주요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진화론적 시각이다. 결국 하나의 유전자가 어떻게 인간의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런 성향이 어떻게 문화가 만들어 지는데 영향을 주며 예술과 종교와 윤리학을 설명해 낼수 있는가하는 방식으로 논의는 진전되어 나간다.
솔직히 말해 그가 어떤 획기적인 답을 내놓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본인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기에는 아직 불확실한 것이 너무 많고 본인이 인정하는 넘지 못하는 벽이 너무 높다. 그 스스로가 좋은 과학이론이 되기위한 조건중의 하나로 제시한 오캄의 면도날의 원리 즉 사유적 경제성의 측면에서 월슨의 설명들은 종종 너무 많은 미지수들을 가진 모델처럼 보인다.
다만 그는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 저런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할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모든 현상은 물질적인것이며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적인 것은 없다고 발전을 통해 난관은 극복될것이라고 그는 거듭거듭 말하면서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 머지 않은 장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너무 쉽게 과학자가 보여주는 미래에 흥분하지는 말도록 하자. 그것이 빛나는 미래라고 믿지는 말도록 하자. 그가 보여주는 방향의 연구는 물론 유익한 것이며 계속되어야 할것이고 계속될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월슨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는 아니다.
우선 몇가지 사실들을 상기시키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19세기에 아직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 세계첨단의 과학수준을 자랑하는 독일에서는 이제 더이상 발견할 과학적 원리는 없으며 자질구레한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위에는 핵융합의 원리에 따라 열을 만들어 내는 태양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또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나왔을때 그것은 보다 정밀한 뉴톤역학이나 전자기학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어떤 의미로 과학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알던의미로의 과학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절대적 시공간의 개념을 포기한다던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지는 입자, 오직 결과의 확률적 예측만을 허용하는 과학은 과학이 뭔지, 이해한다는 것이 뭔지에 대한 의미 자체를 바꾸었다.
윌슨은 진화론적 시각을 도구로 활용해서 복잡한세상을 관통할 시각을 만들어 가는데 실은 그 진화론적 시각자체가 새로운 과학이란 뭔가에 대한 좋은 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이 원자로 이뤄졌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온 세상의 과학은 모두 물리학적 원리로 소급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물리학적 의미로는 오히려 반 직관적이다. 진화는 점점 더 복잡한 생명체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설명해 주는데 물리적 시각은 오히려 엔트로피의 증가로 점점 더 질서가 망가지는 쪽으로 세상이 변해갈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뉴톤방정식이든 쉬뢰딩거방정식이든 그안에 생명의 진화를 즘명할 원리가 담겨있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 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단 진화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는 많은 질서가 보인다. 윌슨은 상당부분 그 힘을 빌어서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해한다는 것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누군가가 어떤 근사해 보이는 정확한 정의를 들고나온다고 해도 그건 그사람이 만들어 낸 정의고 관념일뿐이다. 아인쉬타인이 양자역학에 반대한다고 양자역학이 사라지지 않듯이 그 사람이 말하는 이해한다는 정의가 아닌대로 이해한다는 것의 개념이 발전해 나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부터 단순하게 외삽하는 사고방식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물론 모른다고 그저 손놓고 있을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것을 근거로 이해하려고 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윌슨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마음속에 겸손함을 크게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계몽주의의 재앙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해 윌슨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여러부분에서 반성적 논의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주장이 왔다갔다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과학의 한계를 논하지 않고 과학과 인문학과의 융합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류다. 그것은 마치 옆집과 우리집의 공존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집의 울타리는 한계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쉽사리 점령이나 침략이 되어버린다.
과학의 한계는 뭘까. 과학은 기본적으로 1회적인것,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에 대해 무능하다. 한줄로 늘어선 점이 있으면 그 점들을 잇는 직선을 그을수 있다. 그러나 점이 한개라면 그 점을 지나는 선을 긋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선이나 그을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선은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점은 한 개념안에 포함되는 관측된 사실들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은 법칙을 찾는 것이며 논리를 적용하기 위해 엄격한 개념정의를 전제로 하고 행해지는 것이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사과의 특성이 아니다. 이 세상 만물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이다. 윌슨이 말했듯이 과학은 재현성을 전재한다. 즉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해도 똑같은 조건에서 하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1회적인 것,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 있다. 철학자 포퍼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진화론을 믿지만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지구상의 생명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1회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지구와 똑같은 행성이 하나더 있어서 그 행성에 가봤더니 다른 방향의 진화를 해서 지구와는 다른 생명들이 있더라라는 것이 진화론이 틀렸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인간따위는 없더라는 말이 인간이 진화해서 생겨났다는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진화가 지구 생명의 현상태가 왜 이렇게 되어 있나라는 것의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진화안에 무작위성을 집어넣어서 그부분을 피해가고 있다.
이런 과학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과학에 의한 의미의 파괴가 일어난다. 여기에 모짜르트의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이 골동품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의자의 희소가치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앞에서 말한바대로 1회적인것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에 대해 무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시각을 여기에 적용하는 순간 사실의 축소가 일어난다.
모짜르트의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과학적 시각은 이런 논리를 거친다. 모짜르트의 의자는 의자다. 의자는 이러저러한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모짜르트의 의자도 이러저러한 성질을 가진다라는 식의 언급을 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없어진다. 바로 골동품으로서의 핵심적 가치를 만들어 낸 '모짜르트의' 의자라는 점이다. 과학적 시각에서는 모짜르트의 의자는 그냥 물질일 뿐이다. 다른 의자와 차이가 없다. 여기에 과학의 폭압성이 들어난다. 물론 이부분을 의식하고 있다면 과학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과학은 도구일 뿐이니까 말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도 매우 높은 확율로 ^^;;; - 인간일 것이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유전적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당신도 이러저러한 유전적 특징을 가진다.
여기까지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다. 여기서 종종 저질러지는 오류는 A이면 B이다가 B이면 A다가 아니라는 논리적 오류다. (이문제는 탈렙이 블랙스완에서도 논의한 바있다) 살인범은 신월동 사람이다라는 말은 신월동 사람은 살인범이다라는 말과 전혀 다르다. 둘을 같게 보면 신월동에 사는 사람을 모두 살인범으로 보게 된다.
과학적 결론은 당신이 인간이므로 이러저러한 유전적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지 이러저러한 유전적 특징을 가지는 존재가 당신이라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잘 생각해 보라. 이게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인간이라는 중간개념을 통해서 이러한 오류는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표준화된, 개념안에 갇힌, 보다 작은 존재로 파악하게 만든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모짜르트의 의자가 그냥 싸구려 의자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월슨은 인간본성의 탐구를 통해 윤리학에 대한 연구로 나아갈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옳다. 분명 그런 연구는 인간사회에 대해 여러가지 편리한 도구적 지식을 만들어 낼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의 핵심적 질문은 사회적인게 아니다. 개인적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믿거나 생각하거나 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이순간, 이곳에서 우주에서 단한번밖에 없는 상황앞에서 우주에 단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는 뭘 해야 하는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에 어떻게 답할수 있을까 하는 것이 윤리학의 핵심적 문제다.
윤리학을 이것이외의 것으로 파악하면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 파시즘이 된다. 왜냐면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오래 그것을 연구하고 더 똑똑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것이 좋고 나쁜 것이 내 마음밖에서 결정된다면 나는 무조건 그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떻게 내가 수많은 사람들이 연합하고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말하고 오랜간 테스트된 사회적 윤리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저 대단해 보이는 지도자가 말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안다고 할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윌슨이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리학, 예술, 종교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은 그저 무가치한 돌멩이로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전제인 개념화를 통과하면서 그것들은 1회성, 유일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법칙화할수 없는 인문학적 가치다. 그것이 바로 사회과학이 빨리 법칙화되지 않는 이유다. 사회는 인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죽음에 분노해서 수백수천명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비합리적'인 행동이 사회를 바꿔간다. 그부분을 과학이 법칙화 할수 있을까?
나는 섯불리 안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전역학에 대해서 양자역학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해한다거나 법칙화한다는 것의 의미 자체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 물리법칙에 대해 진화론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인간정신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르기 위해 이제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원리를 구체화 시키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진정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예술가나 일반시민들이 들어서 편안해 할수 있는 일관된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과학이론의 틀을 벗어난 것일 것이다. 물론 과학적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인문학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겸손한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한계에 대한 고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때 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통섭이 이뤄질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 >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소유에 대한 군더더기 (0) | 2010.09.28 |
---|---|
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을 읽고 (0) | 2010.09.27 |
책소개 : 이분법을 넘어서 (장회익, 최종덕의 대화) (0) | 2010.08.16 |
윤오영의 두 수필 (0) | 2010.08.06 |
리처드 도킨스의 갓 디루젼 (만들어진 신) (0) | 2010.06.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