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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윤오영의 두 수필

by 격암(강국진) 2010. 8. 6.

근래에 내가 가장 책장에서 자주 꺼내어 읽는 것은 윤오영의 수필집이었다. 바가바드기타나 노자나 장자,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법과 같은 책도 그런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으나 아무래도 한국인이 쓴 윤오영 수필집은 그 느낌이 남다른 데가 있다. 


연암박지원은 평생 가난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하고 책을 썼으며 김지하시인의 스승으로 알려진 장일순씨도 재야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얼마전 돌아가신 법정스님도 그 책이 유명세를 탓을뿐 알고보면 참 조용히 살다가 가셨다. 


이런 이름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윤오영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윤오영의 친구인 피천득은 대학교수로 지냈지만 윤오영은 그저 조용히 늙어갔다. 그러다가 삶이 얼마남지 않은 말년에 가서야 명작을 잔뜩써서 피천득으로 하여금 몇년 먼저 갔으면 어쩔뻔 했는가라는 말을 듣는다. 


윤오영은 그저 방망이깍는 노인으로 유명한 수필가로 생각되기 쉽지만 나는 그가 하나의 예술작품 혹은 만지고 닳아서 골동품처럼 변해버린 지팡이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어떤 철학을 설파하거나 길게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문학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글 하나하나를 읽어보면 그문체속에는 세상살이에 대한 나름의 태도와 철학이 깊이 스며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뭐하나 깊이 삮혀서 자기것으로 하지 못한채 그저 주절주절 이런 저런 이름만 나열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분이다. 


어제밤에는 그의 수필중 글을 쓰는 마음과 나의 독서론을 다시 읽었다. 그 읽는 느낌이 좋아서 몇구절을 여기에 인용해 볼까 한다. 


글을 쓰는 마음


나는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글은 소용없는 글인것을 안다. 어느 소설가나 문필가가 소용없는 글을 쓰려고 할것인가. 그러나 나는 문학가가 아닌것을 스스로 안다. 그런 까닭에 그런 야망은 애당초에 버린지 오래다. 고요한 밤에 좋은 친구가 있어 내 창문을 두드린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그와 차를 마시며 도란 도란 마음속의 심회를 풀수 있다면, 내 무엇하러 원고지위에 붓을 달리랴. 벗이 없는 까닭에 종이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나는 글을 쓴 뒤에는 스스로 읽어본다. 읽고 나면 누구에겐가 들려주고 싶다. 이것은 내글이 아니다. 내가 읽어본 글이다. 즐겁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 읽어주고 싶다. 될수만 있으면 나와 똑같은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나와 똑같이 느끼게 해주고 싶다. 번연히 소용없는 무가치한것인줄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이것도 일종의 치정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글을 다듬고 베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나의 치졸의 소치라고 할까. 


후략


 실제로 윤오영은 피천득을 만나면 공원에서건 어디건 자신의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댓다고 한다. 피천득은 그게 또한 다 명작이었노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독서론


독서란 남의 글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방법과 목적이 같지가 않다. 혹은 학문을 닦고 지식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혹은 수양이나 취미를 위해서, 혹은 도리를 깨치기 위해서, 그 목적에 따라 읽는 방법도 또한 하나일수가 없다. 공리를 위한 독서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요 독서를 위한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읽는 면학도 필요한 일이다. 다만 나는 본성이 게으른탓인지 면학의 공이 없다. 지식욕에서 오는 독서, 모르는 것을 알고 환희를 느끼며 자랑하던 열광도 이미 식어감을 느낀다. 


이제 내 독서의 의의를 묻는다면 첫째, 자아의 발견이요, 둘째 사색의 소재요, 세째 곡소의 광장이다. 다시말하면 곧 생의 파악이요 내 생의 방편일 뿐이다. 


모든 것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있다. 그러므로 나보다 더가깝고 친한 것은 없다. 나를 스스로 아끼고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까닭이다. 또 나외에 나를 생각하고, 아파하고, 측은히 여기고 장쾌하게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잠시도 떠날수 없는 것이 나요, 떼어버릴수 없는 것이 나다. 그러나 내 얼굴조차 나는 직접 볼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것이 나다. 가까운 까닭에 친하고, 먼까닭에 그립다. 내 얼굴조차 그립거든 하물며 내속의 마음이랴. 그러므로 나는 떨어지는 꽃잎에서도 나를 찾고, 우는 벌레소리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지새는 달, 우거진 숲, 우뚝 솟은 돌, 졸졸 흐르는 물속에서도 내 그림자를 건져보는 것이다. 독서의 환희란 실로 그 글속에서 나를 만나보는 즐거움이다. 


후략


나는 나이고 나는 윤오영이 될수 없다.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윤오영을 보면서 한편에서 나를 보기도 한다. 나와 다른 점은 그의 글속에 나타난 윤오영은 그야말로 하나의 잘 다듬은 명품이라는 점이다. 유명세없이 오랜 시절 보내며 오랜 시절 자기를 갈고 닦은 탓이 아닐까. 그가 쓴 수필에 보면 방망이 깍는 노인에서도 그렇듯이 대충만들지 않고 꼼꼼히 만든 오래된 물건에 대한 찬양이 많다. 그가 오동나무 연상을 말한 수필이나 지팡이를 말한 수필, 마고자를 말한 수필에서 그런 느낌이 난다. 오늘날 대충만들어 화려하기만 할뿐 쓸모가 없는 지식인, 전문가는 얼마나 많은가. 전문가나 지식인은 마땅히 비전문가와 비지식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 오히려 불안하게만 만들뿐 도움되는 일이 없다. 윤오영처럼 확실하게 우리땅의 지식인이라고 말할만한 향기가 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말이다. 우리것 남의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이 있었는가의 문제다. 깊은 고민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본성이 우러나기 마련이요 본성이 우러난다면 이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서 어찌 이땅의 느낌이 없을것인가. 나는 윤오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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