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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책소개 : 이분법을 넘어서 (장회익, 최종덕의 대화)

by 격암(강국진) 2010. 8. 16.

물리학자로 온생명 사상을 펼친 장회익교수와 물리를 전공하다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던 최종덕 교수가 만나서 대담을 나누고 그것을 책으로 엮었다. 나는 이책을 추천한다. 그런데 추천을 하기는 하는데 좀 기분이 묘하게 추천한다. 





이책은 오해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을때 군더더기만 가득하고 해야할 이야기를 막 시작하는가 하더니 끝나고 만책이라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추천하는가. 우선 그 군더더기가 매우 재미있고 유익하다. 그럼 재미있고 유익한데 왜 군더더기인가. 이 두 사람이 진짜 이야기해야 할 부분을 처음부터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끝에 도달했을때도 대단한 -본래 그게 대단한 인상을 줄수 없는 부분이라서 그럴수도 있지만- 인상을 주지 못한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정 부분 상업성에 대한 생각이나 기획의 실패이기도 한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금방 분명해 지는 것이 있다. 바로 최종덕교수는 윤리학의 차원, 도덕의 차원에 눈을 두고 사고하는 반면 장회익교수는 메타과학, 즉 어떤 과학이 논의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개념과 가정에 대한 논리에 그 사고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장회익 교수의 논지는 분명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처음부터 질문되어야 할것은 바로 이 책의 맨마지막에 조금 나오는 이 질문이어야 했다. 바로 온생명 사상은 어떻게 윤리학을 구축하는가. 어떻게 개개인들에게 행동하라는 지침을 제공할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물론 앞에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논의를 한것을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한 사전준비로 생각하라는 주장이 있을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그부분이 그냥 가정되어 지나가고 만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사실적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윤리적 판단, 가치적 판단을 내려주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다. 장회익교수 역시 무어의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말을 동원해서 그 위험성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올바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게 한다는 정도를 말하는데서 멈추고 만다. 


그건 그렇게 간단하고 자명하지 않다.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사실명제는 결코 가치명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항상 비약이 있고 비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가치를 희구하면서 사실에 대한 이론을 보는 것은 분명 필요하고 끝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크게 돌아가는 일이 될수가 있다. 세상에 대한 사실적 이해를 더 본질적으로 구축해 들어가는 경우는 - 즉 장회익교수같은 경우는- 어떻게 말하면 더더욱 크게 돌아가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 의미에서 왜 애초에 윤리학에 대한 질문이 본질적 질문이었을까. 그것은 최종덕교수는 물론,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실 가치판단과 윤리학이지 메타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과학만능시대에 살면서 과학이 주는 영향력중 나쁜 것을 극복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과학철학적 이해를 하면 좋기는 하다. 그러나 그걸 위해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상대성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일단 말리고 충분히 경고를 한후에 그걸 하라고 하고 싶다. 장회익교수같은 물리학에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수십년가르친 후에야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하지 않은가. 재능도 떨어지고 틈틈이 시간날때 마다 공부하면서 과연 같은 이해에 다다를수 있을까? 장회익 교수같은 분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쉽게 말로 써놓았으니 입장이 다르지 않냐고 말할수 있다. 과연 그렇다. 후학은 훨씬 쉬운길을 간다. 그러나 훨씬 쉽다고 해도 그길이 만화책 보는 것같은 길은 아니다. 미분방정식도 못풀면서 양자역학에 대해 말로 이리저리 풀어놓은 것을 읽고 나는 양자역학에 대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그건 장님이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한번도 무지개를 보지 못한채 무지개를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지개를 본 그 경험과 같은 것을 수학을 모르는 사람은 물리학에 대해 가질수가 없다.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 개론서를 천번 천권 읽어도 그걸 다 외워도 그 사람은 양자역학을 아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 말씀 한구절 읽고서 공자님의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듯 장회익교수의 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말로 풀어놓은 것을 좀 읽고서 자신이 비슷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해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고 우리는 오랜 시간과 고민끝에 이해한다는 것이 뭔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일반인들은 그길이 어려운걸 알며 따라서 장회익교수가 걸은 길을 그대로 걷기보다는 자신의 현재위치에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도움을 얻길 바란다. 그건 대부분 가치판단의 문제고 윤리의 문제다. 최종덕교수같은 사람도 결국 여기저기서 생명윤리, 사회참여의 도덕성등을 자꾸 언급하면서 그것이 그의 현실적 문제, 당면한 문제임을 들어낸다. 하물며 일반 비전공 시민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설득력있는 깨달음이 있을수 있는가 이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과학에서 윤리와 기치를 배우게 되지 않는다. 다만 과학공부를 통해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다. 과학은 엄밀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가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말했을때 지식을 쌓고 유형의 것을 쌓아올리는 도구인 동시에 잊어비리기의 좋은 도구이다. 설득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톤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사고의 체계가 존재할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절대와 실체에 대한 미망에서 우리는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톤역학을 논하는 데 있어서 전제조건으로 가정되는 것은 위치라던가 운동량같은 개념이 실존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양자역학에 도달하면서 깨어지고 만다. 여기서 과학적으로는 물론 어떻게 이러한 깨어짐이 일어나는가 하는 세부사항이 중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가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념의 한계성, 실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을 배웠던 사람으로 나도 물리학이 좋은 훈련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드시 현대과학을 알아야 가치적 세계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농사를 짓거나 예술을 추구하거나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전혀 쉽지 않을 것이며 그런 식으로 이해에 접근하지 않은 나로서는 아마도 가능할것이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차라리 물리를 공부하는것이 더 쉬워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회익교수는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물리학의 길이 가장 쉽고 자연스런 길은 아니다. 그들이 서있는 위치는 장회익교수와 다르고 나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새에게 나처럼 달리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날아가면 훨씬 빨리 도착할 것이다. 


책소개가 늘어져서 내 의견 몇마디로 마쳐야 겠다. 책의 제목이 이분법을 넘어서 이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말하면 몸과 마음의 이분법이고 과학과 인문학의 이분법이며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다. 개인적으로 이문제는 매우 흥미를 가져온 문제이기 때문에 이 책의 여러가지 논의를 즐겁고 흥미롭게 읽었다. 


과학과 인문학은 그 둘다 한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할때 하나의 시각안에서 보아질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실존, 실체는 인간의 관념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과학을 넘어서는 어떤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법칙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과학이 너무나 당연하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그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메타과학, 형이상학적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토대는 종종 오해되고 편협하다. 


예를 들어 물고기를 물밖으로 끌어내서 관찰하면 우리는 물고기가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것이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언제나 실험을 할때마다 물고기는 다리가 없으니 달리지 못한다. 물고기는 앞으로 가지 못한다는 이 사실은 언제나 사실이지만 그것은 오직 '물밖으로 끌어내서'라는 부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도에서만 그렇다. 


과학은 수학처럼 논리에 근거하며 따라서 정확한 정의에 근거해서 구축된다. 이 정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과학의 강점과 약점은 여기서 나온다. 시공을 초월하는 이 엄격함이 그것에게 거대한 논리적 구조물을 만들어 낼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반면에 인문학은 시공을 초월하지 않는다. 정확한 정의에 의존하지 않아서 과학같은 힘이 없지만 동시에 과학처럼 제약을 받지 않는다. 중력법칙은 천년전에 사실이었듯 지금도 사실이지만 예술작품의 가치는 반드시 시간에 무관하다고 할수 없다. 우리는 어렸을때 경멸하던 사람을 커서는 존경할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달라졌으며 그가 달라졌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해 보고 영향주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종종 모순에 의해 진실을 말한다. 뜻이 중첩될때도 많다. 이 바보야 라는 말이 정말 고맙다라는 의미가 될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을 위한 관념도 보다 직관적인 인문학적 결과물들도 실체 그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도구며 방편이며 결과물이다. 그 한계를 볼때 우리는 한계를 넘을수 있지 않을까. 


책에서는 진화심리학적으로 도덕을 설명하는 뉘앙스가 풍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판단은 궁극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개로 태어났으면 뼈다귀를 보면 그걸 무조건 좋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까?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통계를 통한 과학적 시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단하나뿐인 존재로 매순간 나는 나의 가치판단을 내린다. 나의 가치판단의 근거는 결국 나의 직관과 느낌에서 나온다. 무수한 그럴듯한 사실명제적 정황 속에서도 나는 반대의 판단을 내릴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되는 무수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선택하는 남자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어리석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면서 감동할 것이다. 우리는 종의 유전적 경향에 대한 평균적 논의를 통해 어떤 종의 행동양태를 과학적으로 연구할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우리 개인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적 근거가 나오지는 않는다. 의자를 만들때 우리는 우리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야 편하게 앉을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불편하게 앉거나 맨바닥에 앉고 싶어한다. 최고로 좋은 의자는 우리 몸의 구조로 100% 결정되지 않는다. 진화를 기반으로한 논리가 가치판단에 좋은 교훈을 줄수 있다고 내가 믿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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