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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의 갓 디루젼 (만들어진 신)

by 격암(강국진) 2010. 6. 16.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원제는 God dillusion 으로 신이라는 망상 쯤되겠다. 이책은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오면서는 훨씬 온건한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는 적어도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불만족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책과 관련하여 서평이랄것은 없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를 소개한적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와 한국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316 )


짧게 말하면 리처드 도킨스는 무신론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박해당하고 차별당하는 상황에 반대하기 위해 이런 책을 썼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그는 모욕적이랄수 있는 책제목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의 의도는 중세 신학에 대항하는 계몽주의자가 현대에 태어난다면 할말을 하는 것이라고 할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믿어야 하며 초자연적인 신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책은 출간직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화제가 되었다. 나는 우선 이책은 어떤 사람에게건 권장할 만한 책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 책은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현실세계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의 보고다. 물론 이책보다 훌룡한 책이 없지야 않겠지만 이책은 분명 읽어둘만한 책이다. 


그러나 전번의 글에서는 정작 이책의 핵심적 내용이랄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던것 같다. 따라서 그것은 서평이라고 할수 있는 글은 아니다. 오늘은 이 책속에 나타난 주장의 장단점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 책의 첫장은 그가 비판하려고 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에 대해 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뛰어난 과학자들, 특히 아인쉬타인이 말하던 신이란게 뭔지를 그는 자세히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범신론적 신과는 구별하여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신을 믿는 종교,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 쳅터들을 통해 신의 존재를 논증하려는 시도, 윤리와 신과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데 책은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난점과 한계는 바로 첫번째 장이 예고하고 있다. 즉 신이라는게 뭔지에 대해 정의가 필요한데 신이란 정의가 없이 존재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발이 뭔지, 비행기가 뭔지 심지어 재즈 음악이 뭔지, 자연주의가 뭔지를 논할수 있지만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불가능하지 않으면 대단히 어려운 정도로 애매하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아니라 매우 본질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반드시 정의에 기반하여 행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많은 경우 완벽히 혼란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정의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어떤때는 우리는 정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고 어떤때는 우리는 좀더 불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논리적 비판이나 이해란 정의를 분해하고 해석하면서 벽을 쌓아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각각의 벽돌이 두부같이 무른것이라면 얼마 쌓아올리지 못하고 벽은 자체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정의가 애매한 것들로 논증하는 일은 그다지 튼튼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정의가 분명한 수학적 언어로 이룩된 논증은 매우 튼튼한 반면 일상언어로 이뤄진 논증은 좀더 부실하고 어떤 것은 매우 부실하다. 


예를 들어 천년전의 사람에게 질량이 뭔지, 에너지가 뭔지, 힘이 뭔지를 물었다고 하자. 뉴톤이래로 서구과학의 발전에 따라 그런 것들이 실체적인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 진것이다. 천년전 사람이 쓰던 단어중에 질량이나 에너지로 번역될만한 단어가 있다고 해서 그때사람들이 그 단어를 쓰면서 말한 것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단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조선시대에 의녀는 기생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여자 의사를 의녀와 동일시 해서는 큰 잘못이다. 의녀같은 단어도 그런데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단어들에 우리가 가져다 붙이는 의미는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그러나 나의 이러한 비판을 보고 신앙을 가진 사람중 리처드 도킨스의 의견을 전혀 가치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다리라고 하고 싶다. 나 자신이 무신론자에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리처드 도킨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서 극히 드물다.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초자연적'인 종교를 부정하는데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리처드 도킨스가 비판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관용없고 인간적인 신을 믿는 신앙가를 비판하는데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리처드 도킨스가 초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쩔수 없이 한계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과학은 아직 그리고 영원히 완결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뭐가 초자연적인지 모른다. E=Mc^2 라는 공식은 질량은 에너지로 변환될수 있다는 유명한 아인쉬타인의 과학공식이며 원자탄과 관련되어 널리 알려져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정도다. 그러므로 이것은 초자연적이 아니다. 그러나 천년전 사람에게 바위를 가리키며 이 질량을 가진 바위는 원칙적으로 한나라를 날려버릴정도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자연적인 것일까?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모두 자연적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언어는 거의 확실히 변화를 거듭할 것이며 그런 언어속에서는 지금은 미친소리로 보이는 것,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자연적인 것일수 있다.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전자라는 말이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보이는가. 그러나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다.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과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 세상이 이해될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의 태도를 취한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다. 


도킨스는 윤리 감각의 기원에 대해 한장을 할애해서 어떻게 신이라는 개념없이도 윤리감각의 존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할수 있는가를 논하는데 이 장도 여전히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긴 하지만 문제의 크기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취급이라는 것을 부인할수 없다. 


사실 신없는 윤리는 가능한가 하는 것은 과학을 전혀 논하지 않고도 쉽게 그 난점을 논할수가 있다. 그것은 좋다는 것은 정의상 그게 뭐든지 신이 그렇게 하도록 정하고 명령한 것인가 아니면 신은 선한 존재라서 항상 선한일을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전자의 경우는 신이 선하다라던가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의어의 반복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신이 인종학살을 명하면 그것은 정의상 옳고 좋은 일이 된다. 신은 좋은 분이라 그런 것을 명할리 없다고 말한다면 후자의 논리적 모순에 처한다. 신은 좋은 분이다 같은 말은 좋고 나쁜게 신과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애초에 윤리를 논할때 신을 등장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수수께기는 개념적 혼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여기서도 과연 신이란게 뭔가에 대한 개념에 따라 수수께기는 존재할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격화되고 초자연적인 신을 논하기 위해서 일테지만 -혹은 진짜로 진화론이 윤리의 기원을 진짜로 설명할수 있다고 믿어서일테지만- 어설픈 과학이론으로 윤리의 기원을 설명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역시 이게 다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 스스로 말한바대로 윤리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많은 일반인들에게 핵심적 문제이기 때문에 좀 아쉽게 처리된것 같다. 


나는 이세상의 어떤 사람도 과학적 결과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문명이 모두 신앙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로 발전된것은 아니지만 그 상당부분은 그렇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누적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을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과학이 틀렸다라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과학은 아주 높은 확율로 옳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위에서 연구되는 것이라 그렇다. 과학적 이론이 틀릴수도 있지만 그럴때는 대개 가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를 들어 진화론으로 윤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인가 아닌가. 나는 엄밀한 과학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가능한 설명이 너무 많아서 데이터를 너무 쉽게 자기 맘대로 해석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을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설의 단계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으로 생각해도 곤란하다. 어떤 것은 기본적 비판을 통과한 것이고 어떤 것은 전혀 독단인 것도 있다. 


과학을 맹신하지 말라는 말에 관련하여 과학적 지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말 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적인 중요성이 틀려있을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하자. 거기서 당신은 지렁이의 내장기관에 대해 엄청나게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그런데 정작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는 당신의 배지 지렁이의 내장이 아니다. 여기서 지렁이의 내장기관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다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중요한 건 주제와 강조되는 분야가 지금 이순간의 당신에게는 필요없는 것일수 있다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경영관리 이론은 주주들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데에 관심있을뿐 회사의 직원들이 그 자체로 중요한 인간이란 점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을수 있다. 여기서 그 경영이론이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틀렸는가 맞았는가는 2차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뻔한 가치배분에서 실패할때가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은 이런 점에서 나쁘다는 것이지 과학이론들이 검증안된 엉터리들이라는게 아니다. 적어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과학을 무시하지 말고 초자연적인 것을 쉽게 믿는 신자가 되지말라는 도킨스의 주장은 지극히 옳은 것이다. 과학을 도구로써 쓸수 있고 과학논리의 한계 너머를 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지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과 독선으로 그런 신앙도 하지 않으면서 쉽게 자기 멋대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과학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초반에 도킨스의 한계가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신앙인이 도킨스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똑같이 성경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지고 있는 종교는 그 실재적 내용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가 있을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불행한 일은 우리는 분류의 선을 무신론자와 종교인사이에 긋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구상의 생명체를 개미와 그외의 생명체로 분류하는 것과 같은 무식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렇게 해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이 모두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문제요 책임이 되고 만다. 위대한 종교인들 뒤에 숨어서 나도 종교인이라면서 어처구니 없이 살고 남에게 피해도 주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종교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걸 자식에게 세습하는 그런걸 종교라고 부를수 있을까? 그러면서 리처드 도킨스를 부정할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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