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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0. 5. 24.

시내에 나갔다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사가지고 왔다. 일본이라 책값은 우리나라 정가의 두배가 넘는다. 나는 그다지 다독하는 편이 아니라 유시민을 많이 읽었다고 할수는 없다. 가끔씩 읽은 컬럼을 통해 유시민의 글이 잘읽히는 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실은 사놓고 몇장 뒤적이다가 말아버린 책도 있다. 






이 책은 유시민이 쓴 서평과 같은 책이면서 유시민의 삶 자체를 반성하는 책이기도 한것 같다. 즉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저런 영향을 미쳤던 책들, 당시의 자신의 위치, 지금의 위치를 말하면서 책 자체를 말하기 전에 유시민을 말하는 면이 많다. 나는 이 책이 그런 책이라고 느끼면서 샀다. 그렇지 않고 필자가 녹아있지 않으면서 책들만 객관적으로 말하는 백과사전식의 소개서라면 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죽보면 당장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성이다. 정치가인 유시민, 정치적 사회활동에 어떤 식으로 참여한 시민으로서의 유시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청춘의 독서라면서 그안을 가득채운 것은 나와 사회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 지식인과 사회의 관계, 과학과 사회의 관계등 결국 사회로 가득차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책은 유시민스럽게 즐거운 독서의 체헙을 하게 해 주며 좋은 지식과 책소개를 많이 제공해 준다. 사회적 시각을 정리정돈해주는 좋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기꺼이 이책을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실패한 지식인의 책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실패란 미래에 대한 확신,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인간은 본래 선한 의지가 있으며 이런 선한 의지는 왜 좌절되는가. 우리는 정말 선한 이웃으로 공존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갈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고민이 유시민의 삶에 가득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물론 유시민의 과거가 말해주듯이 훌룡하고 고상한 생각이지만 동시에 편파적인 생각이다. 


인간이 자신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홀로 즐거움을 찾는 관념의 세계를 헤매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오직 사회의 영향, 사회와의 주고 받음에 의해서만 가득채워질때 그것만으로는 마음의 평화도 바람직한 사회도 있을수 없지 않을까? 그가 맹자를 읽으면 그는 그안에서 정치와 사회를 주로 본다. 이런 식이다. 수신과 철학은 그다지 크게 언급될 가치가 없어서 일까? 


나는 이것을 비판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목말라 죽겠는 사람이 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러저런 기쁨과 가슴아픈일을 겪어온 그로서는 책안에서도 역시 사회에 대한 지혜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는 다만 모든 사람이 정치와 사회에 달인이 되고 전문가가 되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럴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만들려고 하면 무리가 생긴다. 마치 인간의 개인적 욕망을 무시한 공산주의의 이상이 결국은 일인 독재로 변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뛰어난 지성으로 사회 경제문제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시각은 사회적 통합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오히려 막을수도 있다. 잘나고 똑똑한 인간에 의한 일인독재가 되버리기 쉽다. 


자신의 수박을 최고의 수박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 하나의 산을 가꾸는 일, 그림이나 영화에 대한 예술적 열정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회적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성, 정치성이 짙은 사람들은 종종 그런 사람들이 정치 사회적 현안에 무관심한 것을 비판하고 심지어 '반동' 적이라는 식의 표현도 한다. 물론 유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이 풍기는 문화는 그런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느낌이다. 말했듯이 사회로 가득차 있으니까. 


거듭말하지만 이것이 책에 대한 비판일 필요는 없다. 유시민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책들을 통해 유시민을 표현했을 뿐이며 빵만드는 사람은 빵을 만들고 형사는 범인을 잡듯이 유시민이 모든 면에서 균형잡힌 유시민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균형잡혀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자체가 골치아픈 이야기다. 다만 유시민을 배우면서도 너무 유시민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면도 생각해보면서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책은 학자로서의 유시민을 발견하게 만들어 준다. 학자라는 말 대신에 지식인으로서의 유시민이라는 말을 쓸까하다가 학자라는 말로 바꾼 이유는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등식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서다. 지식인이 지성을 갖춘 사람, 합리적 인간이라는 뜻에서라면 그렇다. 지식인이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물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지식인 맞다. 


책을 읽으면 유시민이 상당히 넓고 깊게 책을 읽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사실적으로 기술한 것이라면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수십년전에 읽었던 책들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기억할수 있는 그가 나는 한편으로 부럽다. 나는 작년에 읽었던 책도 그렇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지식인과 학자를 구분한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느낌때문이다. 유시민은 일종의 진실이나 진리를 찾아헤매는 구도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나름의 진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으며 애초에 진리따위는 없으며 그저 작은 삶의 선한 행위들을 해나가는 것이 불만스럽지만 최선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끝없이 회의하면서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삶 말이다.


그 많은 책들은 여러가지로 좋은 책들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실패한 책이기도 하다. 세상을 구하는데는 불충분하다. 오직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교훈과 경험을 얻을 뿐이다. 특히 저건 답이 아니네라는 어떤 가설에 대한 부정적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답이 아닌 것은 세상에 끝없이 있다. 답이 아닌 것을 다 알고나면 언젠가 답에 이르를 것이라는 생각은 옳은 것일까. 


그는 아직도 공자가 재미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그는 종교도 없고 성경이나 불경이나 노장이나 어떤 철학책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답을 말하는 책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책들은 대개 공통된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크레타섬의 사람은 모두 거짓말장이라고 말하는 크레타섬사람의 이야기같은 모순이다. 이 문장은 참일수도 거짓일수도 없다. 비슷한 문장은 이런 것이다. 책에서는 진리를 배울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책. 이 책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책을 안읽는다면 내가 왜 그책의 내용을 믿어야 할까. 지식을 탐하다가 지혜의 길을 놓칠수 있다.


유시민을 읽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나는 이책을 추천한다. 그러나 끝없는 구도의 길은 그냥 끝이 없을 뿐이다. 자신이 끝내고자 하지 않으면 그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답이 아닌 다른 것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을 평생하게 될것이다. 그렇게 유시민을 오독하면 곤란하겠다. 평생 책을 읽었으나 늙어죽을때보니 그 책읽을 시간에 그냥 행복하게 살걸이라고 후회하게 되는 길로 접어들면 곤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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