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포스트만 (1931-2003) : 미국작가, 매체 이론가, 문화 비평가. 대중에게는 1985년에 씌여진 책 죽도록 즐기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40년간 뉴욕대학교소속이었으며 "새로운 기술이 인간적 가치를 대신 할수 없다."는 것을 믿은 인본주의자였다. >
닐 포스트만의 책 유년기의 상실 (the disappearance of the childhood)을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축약하면 이렇게 된다.
정보 소통의 미디어가 인쇄된 활자에서 전자 통신으로 바뀜에 따라 인쇄된 활자문화가 만들어 낸 유년시절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있다.
유년시대의 출현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유년시절은 실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도입하면서 인쇄된 책이 흔해지면서 생겨난 최근의 현상이며 그나마도 사라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사회에서 권력이 분배되는 방식, 차별이 생기는 방식은 정보의 저장과 소통의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예를 들어 알파벳이 나타나기전의 상형문자가 있을때는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그 상형문자를 익혔으며 그들이 그 사회의 정보를, 따라서 부와 권력을 독점했었다. 그러나 보다 쉬운 표음문자인 알파벳이 나타나자 정보소통의 벽은 무너지고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할수 있게 된것이다. 그래도 역시 그 수는 소수였고 서구의 중세시대에 이 사람들은 주로 교회의 수도사들이었다. 이것은 다시 한번 인쇄술의 발전으로 큰 변화를 겪게되는데 이제 세상에는 책이 흔해지게 되었고 따라서 세상에는 자연스럽게 두종류의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읽을줄 아는 사람이고 또하나는 읽을수 없는 사람이다.
이제 읽고 쓰는 능력은 인정받는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닐 포스트만은 이 구분이 생겨나게 되면서 학교라는 것이 본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유년기, 어린이, 아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읽고 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이고 읽고 쓰기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어른인것이다. 수도사와 농노사이에 있던 정보의 벽이 어른과 아이로 내려왔다는 닐 포스트만의 시각은 참으로 재미가 있다.
중세에는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선이 없었는데 읽고 쓰기가 필수적이 되고 학교가 보편화 되면서 어른과 아이라는 집단이 구분되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제대로 기능할수 없고 차별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선거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는 이들이 어른과는 달리 제대로 된 판단능력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읽을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고 독해능력을 충분히 함양하고 그에따른 지식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하는 한국 청소년
내가 이책의 관점을 통해 한국을 보았을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분노하는 한국 청소년의 이미지였다.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유년기가 사라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닐포스트만은 유년기가 사라지는 즉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미국에서 사라지는 증후들을 소개하는데 다음의 몇가지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1. 티비에서 아이같은 아이가 사라졌다. 오직 작은 어른들만 나온다. 그들은 어리고 작을뿐 행동과 말과 사고에 있어서 어른과 차이가 없다. 동요가 사라지고 아이들 노래와 어른 노래의 차이가 없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애들이 노래방에 가면 뭘 부르던가? 원더걸즈?)
2. 반대로 티비에서 나오는 어른은 아이같아 졌다. 그들은 일을 별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며 아이를 키우지 않고 정치 이야기도 싫어하고 종교이야기도 싫어한다. 진지한 생각을 싫어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다.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는 일도 없으며 8살짜리도 아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말하는 법이 없다. (하이킥의 황정음같은 캐릭터를 생각해 보라)
3. 아이들 옷이 달라졌다. 어른들옷도 달라졌다. (즉 아이들은 어른 같은 옷을, 어른은 아이같은 옷을 입어 할아버지와 손자의 옷이 기본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을때가 많다.)
4. 아이들 놀이가 사라졌다. 즐기는 오락물에 있어서도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어른의 것을 볼뿐만 아니라 어른도 아이들의 것을 보고 즐긴다. (골목에서 아이들 놀이가 사라진것은 아스팔트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아이들과 어른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아이들의 어른의 놀이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5. 아동 범죄가 크게 늘었다. 청소년 임신이 크게 증가했다.
이런 목록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이미 일어났거나 맹렬한 속력으로 그 추세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닐포스트만이 말한 것의 요약을 조금더 소개해 보자.
전자매체의 등장은 학교의 존립근거를 무너뜨린다. 이제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어른들의 비밀을 전부다 알고 있으며 어른들이 자신보다 아는게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이 더이상 어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닐때 교육에 대한 다른 이유를 대지 못하는 어른들은 종종 교육을 시장에 나가기 위한 입구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럴 때 예술, 문학, 역사의 교육은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아이들의 해방자'는 그래서 학교자체가 필요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리처드 파슨은 더 나아가서 아이들에게 참정권을 주고 어떤 집에서 살것인가에 대한 선택권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소개글을 시작하면서 분노한 한국의 청소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런 이유다. 미국은 굉장히 민주적인 사회다. 일단 언어자체에 어른과 아이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친구부르듯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종종 본다. 할아버지 같은 사람도 그냥 밥이고 존이다. 이것은 어느정도 닐포스트만이 묘사한 문화적 변화의 결과이지만 그 사회의 민주적 전통, 영어가 가진 언어의 본래적 특성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굉장히 차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장벽이 많다. 어른과 아이는 커녕 학년만 달라도 선배니 후배니 하면서 장벽을 만들고 명령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과 티브이의 확산으로 그 권위주의를 지탱할 정보의 독점이 불가능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순과 불만은 축적될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후배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자주 기사화된다. 이것은 그저 나이가 위면 권위가 있으며 뭐든지 명령해도 좋다는 것을 사회로 부터 배웠기 떄문이 아닐까. 어른과 아이의 장벽이 없어졌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아이가 자신은 더 많은 권한과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어른은 그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부당한 권력만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이제 별로 해줄말이 없다. 유치원생인 자기딸이 친구와 주식투자나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한 지인으로 부터 들은 적이 있다. 초등학생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만한 경험은 하나도 있을리가 없는데도 세상 다아는 것처럼 어른들에게 당돌하게 말하는 경우는 이제 아주 흔하다.
어른들은 종종 새로운 세대가 책임감은 없으면서 요구만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은 젊은 세대에게 기성세대는 뭐하나 가르쳐 줄만한 것도 아는게 없으면서 부당한 권위만 내세우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 않을까.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배우는 어른 세계의 어두운 세계를 보면서, 제대로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기성세대는 권위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부끄러움과 도덕에 관한 한 이론.
앞에서도 말한바처럼 중요한 것은 정보가 어떻게 한 집단에서 독점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집단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는데 문화적으로 이것은 흔히 수치와 부끄러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을 알아도 해서는 안되고 아이들은 성적인 것에 대해 접근이 제한되며 이러한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이들 집단과 어른 집단이 가지는 정보의 양은 더욱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며 어른들은 어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닐포스트만에 따르면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의 중세는 이같은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어른처럼 일했으며 지저분한 식탁 매너를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이들앞에서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닐 포스트만이 소개하는 것은 말하자면 부끄러움과 도덕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정보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미니스커트에 관한 남녀간의 인터넷 공방이 떠올랐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지나친 노출을 하는 미니스커트를 아무데서나 입는 여성들이 싫다는 남성들이 있었고 일부 여성은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쳐다보는 남자들은 매너가 없다라는 식의 대답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것을 한가지 알게 되는데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여자들의 허벅지를 오랜동안 주목하는 남자는 매너가 없다라는 현실이다. 즉 허벅지를 보여준 여자가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허벅지를 계속 보는 남자가 매너가 없는 것이 되었는데 이것은 몇십년전이라면 완전히 반대였다. 당연히 그때는 허벅지를 드러내는 쪽이 수치심을 느꼈고 매너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지금도 신체의 다른 부위로 가면 마찬가지다. 엉덩이나 가슴을 노출 시키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가 수치심을 느끼지 그걸 쳐다보는 남자들이 매너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허벅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닐포스트만의 이론을 이용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는 시각적 매체들을 통해 여성의 벗은 몸을 안 볼수가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일반 대중여성보다 매체의 여성들은 흔히 더 많이 노출을 하는데 그것들은 대중이 안볼래도 안볼수 없는 곳에서 자꾸 반복해서 방영된다. 즉 여성의 몸에 대한 정보, 이경우는 그것을 보는 것을 피할수가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갈수있을까. 공중 목욕탕에서는 누드를 보여주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누드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수 있다. 실은 오늘날의 패션도 몇십년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가장 나쁜 것은 매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뉴스들이라고 닐포스트만은 말한다. 뉴스들은 이제 두꺼운 책속의 숫자로서가 아니라 뉴욕타임즈의 기사로서가 아니라 시각적 정보와 함께 누구나 볼 수있도록 정보를 보내는데 그 뉴스들이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폭력과 난잡한 성생활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닐 포스트만의 이론을 쓰면 우리가 날마다 강간범이나 불륜의 뉴스를 접하게 되면 강간하는 행위와 불륜행위를 규탄하면서도 실은 서서히 그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게 된다. 기혼남녀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따로 만들고 있는 것을 날마다 듣게 되면 어느날 문화적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어떤 여자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친구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 그것은 사생활침해 같은 매너없는짓이 된다. 오히려 요즘 세상에 남자친구 하나따로 없냐면서 남자친구가 따로 없는 기혼여성이 촌스럽고 시대에 뒤진것으로 핀잔을 받는다. 이것은 여성의 신체노출에 관한 이야기와 정도와 경우가 다를뿐 기본적으로 똑같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모두가 똥을 싼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그걸 가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똥싸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뭔가의 이유로 그걸 가리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 수치심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보통 문명화된 인간이 가지는 매너는 일정부분 이런 '위선'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항상 그렇게 단정하고 조용하고 침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외부에 노출될때만 그렇게 행동할수 있기 때문에 매너는 지켜진다. 뭔가의 이유로 모든 정보가 사방으로 노출될때 우리는 모든 수치심과 매너를 잃어버리게 될수 있다.
인터넷 문화
닐 포스트만이 사라지는 유년기를 쓴 것은 인터넷 이전의 시대인 1982년이다. 그러므로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티브이라는 매체지만 티브이라는 매체는 인터넷과 상당 부분이 겹치는 것같다.
오늘날의 블로그나 인터넷 신문들을 보면서 나는 닐포스트만이 말하는 티브이 쇼들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많은 채널이 있기 때문에 티브이 쇼들은 관심을 계속 집중시켜야 하고 이는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내용에 집중되게 만든다. 물론 그런 예에는 성적인 것이 있지만 범죄나 폭력, 사치, 누군가를 비난하기등 다른 자극적인 소재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블로그나 인터넷 신문도 마찬가지 입장에 있다. 그들도 네티즌의 시각을 잡을 소재를 찾아 헤맨다. 길고 논리적 이해가 필요한 내용은 피하고 시각적인 재료로 한방에 자극을 주는 소재가 선호된다. 오늘날의 인터넷 신문들은 상당부분이 황색언론이다. 블로그도 그렇다. 블로거들도 광고로 수익을 올리면서 자극적 소재에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그녀가 옷을 벗는 이유' 같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는게 이황과 조선 성리학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중들을 끌어 모을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인터넷의 확산은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대중의 지적 능력은 인터넷의 확산으로 증가되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같다. 그런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을 것이다. 닐포스트만은 책을 읽는 것은 시각적 매체를 소비하는 것과는 다른 훈련을 요구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일반화, 추상적 개념의 이해, 오랜동안 집중 할수 있는 능력따위를 요구한다. 인터넷 포스팅은 그것이 문자로 된것이라도 그 길이가 제한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간편히 먹고 버릴 수 있는 짧고 간단한 글들에 점점 익숙해 진다. 이것은 지적능력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다.
맺는말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고, 아이에게 더러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을 숨기는 일은 부당한 억압이고 위선일까? 닐포스트만은 새로운 매체환경에서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은 분명 위선이지만 그런 위선은 좋은 위선이라고 변호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키워야 훌룡하게 클수 있다는 것이다. 즉각적인 결론은 결국 우리가 이미 익숙한 티브이나 인터넷에서 아이들을 멀게 하고 책을 많이 읽게하라는 교훈이 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 걱정하고 신경써야 할것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제 너무 많은 것을 안다. 그들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답까지도 그들은 알고 있다. 초등학교 3-4학년밖에 안된 여학생들도 남자와 동거하고 임신중절끝에 비참하게 죽는 여자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같은 것에 익숙하다.
아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리가 안되고 혼돈스러운데 어른들은 그들을 돕지 못한다. 일단 어른들도 너무 수준이 낮다. 어른들도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도 논리적이지 않으며 아이들이 가지지 못하는 시각의 높이와 넓이를 아이들에게 주지 못한다.
더더욱 나쁜 것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성장하면서 지혜를 배웠던 진짜 교육의 기회들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박탈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스스로 고민해서 지혜를 얻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통 지혜를 얻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성세대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하는 것이다. 즉 부모와 시간을 보내고 친인척을 만나면서 그들이 어떤 때 어떻게 행동하더라라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가치관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교육은 오로지 취업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어 초등학교때부터 그런 시각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이나 철학이나 역사같은 것은 더더욱 배우지 않게 된다. 그들은 더더욱 잡동사니로 그들에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 허우적 거리게 되는데 아무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하나도 더 자기보다 더 아는게 없는 것 같은 어른이 그들을 권위주의적으로 무시하고 차별할 뿐이다.
이제 새로운 세대는 몇십초마다 다른 내용으로 수없이 흘러가는 광고나 뉴스를 볼때처럼 가치에 무감각해 졌다. 뭔가에 정서적으로 연결감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허깨비같다.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너무 해주는 것이 없는거 아닐까. 그들이 믿고 성장할 기초는 줘야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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