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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무소유에 대한 군더더기

by 격암(강국진) 2010. 9. 28.

돼지띠님, dune님 그리고 세상다담님이 법정의 책을 읽고 쓴 글에 답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답글을 몇줄 적으려고 하니 몇줄로는 결국 안될것같아 답장을 여기에 써봅니다. 


도올이 무소유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십니다. 이말은 좋은말이며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다지 쓸모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럼 집착은 어떻게 하면 안하게 됩니까란 질문이 남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쾌락이나 출세나 사랑에 대한 욕망을 그저 집착하지 말자라는 한줄로 해결할수 있을리가 없지요, 잠시잠깐 마음이 편안해 졌다가도 결국 다시 솟아오르는 집착을 발견하게 될뿐입니다. 그걸 억지로 억누르는 것은 다시 가지고 싶으면서도 안가지는, 취하고 싶으면서도 취하지 않는 참는 일로 갈뿐입니다. 


제가 쓴 것은 평소에 쓰던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는 그릇의 크기가 그 사람이 속한 세계의 크기라고 썼는데요. 말하자면 그릇이 매우 커진 상태가 무소유라는 것입니다. 


여기 어린애가 하나 있습니다. 어린애에게는 나이키 신발을 신을수 있다던가 없다던가, 캐러비안베이에 갈수 있다던가 없다던가 어떤 친구와 친해진다던가 못한다던가 하는것이 온세상에 값하는 것만큼 대단한 일일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세계는 좁기때문에 그 안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그것보다 대단한 것은 없으며 어떤 다른 일로 보상이 될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 어른들은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그것보다 크며 그것들이 딱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도 많고 그것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시절에는 소풍간다고 하면 너무 좋아서 잠을 설칠정도지만 어른이 되고나면 그깟소풍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른은 아이가 보지 못하는 한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좋은 건 좋은 거지만 그것이상의 것, 그것이 가지는 한계를 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바로 집착하지 않을수 있는 것입니다. 한친구랑 사귀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며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 친구때문에 절대적으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어른과 아이의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모르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합니다. 착한 아이는 이 규칙을 절대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이 규칙을 어기는 아이는 대개는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부모를 무시하는 철부지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바로 규칙을 지키는 쪽도 어기는 쪽도 이 규칙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착한 아이가 집을 보는데 모르는 아이가 피를 흘리면서 문을 두들기며 도움을 부탁합니다.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는 착한 아이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규칙을 떠올리면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이 규칙은 본질적으로 아이가 무력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애초에 이 규칙이 지니는 한계를 이해한다면 아이는 이 규칙을 절대적 규칙으로가 아니라 그저 유용한 지침정도로 알게 될것이고 훨씬 자유롭게 마음가는대로 살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규칙을 언제 깨도 좋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한계를 모르는 규칙은 아이를 구속합니다. 


그런데 어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이유를 시시콜콜 아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시시콜콜한것이 아니라 중요하고 가까운 바로 자기 내부안의 규칙과 지식에 대해 무관심하고 타성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까. 상식이란 뭐고, 이런 저런 관습이란건 왜 있는 것일까. 이런 건 왜 중요할까. 나는 왜 이런 판단과 선택을 하는가에 대해 그 한계를 모르는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잔뜩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돈돈 하지만 이런 저런 것을 다 걷어내고 나면 사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돈이 아니고 돈은 그저 수단이었을 뿐인데도 어느새 돈자체가 목적이 된것처럼 살게되고 아이에게 이런 저런 호통을 치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는데도 어느새 아이에 대한 미움, 껄끄러운 관계가 본래의 마음이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우리를 보게도 됩니다. 


왜 그런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그런 규칙들의 한계를 보고 비로소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대개는 그 규칙을 부정하는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따라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때로 고독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는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쉽게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색을 통해 나는 왜 이런 사람인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려고 하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어떤 습관과 틀을 통해 너는 이런 사람이 아니냐는 식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시 습관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처하는 여행을 홀로 떠나보면 때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나의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정은 자연을 강조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자연과 비자연의 구분은 애초에 없습니다만 그래도 자연은 인간적인 것이 적기 때문에 홀로 있게 됩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잡지며 신문, 방송, 이런 저런 일을 하게 되어 있는 일상에 박혀 있으면 어떤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서전을 써보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뒤지다보면 종종 자신이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그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해된 대상은 우리를 위협하고 구속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어린시절로 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어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색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자기의 어린시절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를 알려면 그것이 아닌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려면 내가 아닌것을 알아야 하고, 한국을 알려면 한국이 아닌것이 뭔가를 알아야 하고 우리 가족을 알려면 우리가족이 아닌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배워가고 세계를 넓혀가면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다고들 하지만 사실 어른이 되는 길은 적어도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층층이 계속되는 일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되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때 예전에 집착하던 것이 어린애의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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