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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사이언스 버블

by 격암(강국진) 2011. 7. 12.

2011.7.12

머릿말

 

우리는 부동산 버블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이것은 집이 집자체의 가치를 넘어선 평가를 받다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자각하는 순간 가치폭락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대학 버블이라는 말이 미국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것은 대학졸업장의 가치에 거품이 끼어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도 대학등록금은 해마다 비싸져 왔다. 특히 이것은 학자금융자가 이뤄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고 한국도 그런 것같다. 이유야 어쨌건 대학졸업장은 이제 매우 비싼 것이 되었는데 이것이 실재의 가치보다 더 비싸진 것 같다는 것이 대학 버블이라는 말의 의미다. 

 

나는 이에 더하여 우리가 사이언스 버블 즉 과학의 거품시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역사적 시간규모는 인간의 생명보다는 긴 것이어서 앞으로 몇십년동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50년정도 후에 지금을 되돌아 보았을때 이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비교하자면 근세의 유럽인이 중세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고 조선시대 선비가 고려시대를 돌아보는 것같은 것일 것이다. 

 

과학적 이해가 가지는 의미

 

50년이나 백년 전을 보면 그때와 지금이 전혀 다른 세상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꼭 그렇지는 않다. 질적인 변화는 양적인 변화와 다르다. 지난 수백년간 인간이 발전시켜온 것은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의 발전은 실상 점점 느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뉴튼의 법칙이래 수학이 발전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등장할 때까지의 학문발전은 매우 눈이 부셨지만 그 이후의 발전은 좋게 말해도 좀 종류가 다르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은 객체라던가 시간의 개념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에서 구부리기 시작했고 실상 우리는 그것의 수학적 묘사를 알고 있을뿐 체험으로서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물체가 파동인 동시에 입자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 문장 그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마치 어떤 것이 뜨거운 동시에 차갑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장이 말해지고 어떤 문맥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수학적 묘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이 일상의 경험수준을 넘어선 언어를 쓰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어떤 벽에 부딪힌것 같은 느낌이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파인애플에 대한 영어로된 기사를 주고 이게 설명이라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인간들의 일상생활의 체험수준을 넘어선 개념들이 등장하는 과학은 거기에서 더 추상화를 계속했을 때 그것이 어떤 답을 준다고 해도 과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원시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국가니 사회니 같은 것은 모르는 원시인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이 왜 이런 저런 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설명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면 민주주의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과 그 하부적 개념들을 원시인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외우게해봐야 그 원시인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개념은 현대인의 그것과 그리스 신화와 현대 우주론 이상으로 크게 차이가 날것이다. 

 

과연 현대과학이 주는 설명들이 일반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학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시 우리는 더 이상의 과학적 이론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새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원시인들이 도서관에 앉아서 민주주의에 대해 제 아무리 책을 읽어댄들 그것은 장님이 무지개 이야기 듣는 것과 같다. 

 

원천적 원리의 변화

 

사실은 원시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유럽의 근세인이 유럽의 중세로만 돌아가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자연법칙을 찾고, 진화론적인 시각으로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시스템같은 생각에 너무 강하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가 과거의 어느 시대를 돌아보고 그들이 어떤 미신적 종교에 크게 빠져 있다고 느낀다면 스스로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시대도 누군가의 시각에는 미신적 종교에 크게 빠져 있는 시대다. 어느 시대나 그렇다. 어느 시대나 어떤 원천적 원리를 믿는다. 그 원천적 원리는 너무나 본질적인 것이고 그시대의 모든 사람이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원리라거나 가설이라거나 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원천원리가 바뀐 시대에 뒤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그런 원리에 미친듯이 몰두했을까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초기에는 사단칠정설이란 것으로 논쟁이 있었고 서양의 중세시대에는 바늘끝에는 천사가 몇명이나 앉을수 있는가 같은 것으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왠지 시간낭비처럼 보인다. 왜 4단인가 5단이나 6단이면 안되나? 왜 그게 당연한가. 먼 옛날에 성인이 사단이란게 있다고 말했으니까? 현대 신경과학이나 심리학과에서 사단 칠정같은거 논하는거 보았는가? 바늘끝에 천사가 몇명앉는가가 왜 중요한가. 

 

과거는 과거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과거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들의 원천원리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원천원리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 즉 어느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결정한다. 원천원리가 달라진 오늘날 과거의 논의가 부질없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그럼 우리의 원천원리는 무엇인가하는 것이고 그것이 굳건한가 아니면 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서구 중세시대의 원천원리란 기독교 신의 천지창조를 기반으로한 세상의 이해를 말한다. 이때는 이렇게 생각하는게 이성적이었다. 따라서 과학연구의 선구자들은 비이성적인 인간들로 이야기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는 자연법칙으로 신의 자리를 대체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자연에는 법칙과 질서가 있으며 이 법칙을 알아내면 우리가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와 거대 사이언스 프로젝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것을 보면 나는 문명의 종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또한 그들나름대로의 원천원리에 몰두해서 그런 건축물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썼으면 얼마나 생활이 편리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더더 큰 건축물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들의 믿음이 그걸 요구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그들은 그만큼 강해진 동시에 약해졌을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그 정체성이 그들을 멸망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원리, 새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 훨씬 더 경쟁력이 컷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20세기에서 현재에 이르는 거대 과학 프로젝트들을 현대의 피라미드라고 부른다면 나는 과학자는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과학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과학을 사랑한다. 그러나 현대의 거대 과학 프로젝트, 수없는 돈을 쓰는 프로젝트는 확실히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데가 있다. 게놈프로젝트도 그렇고 상온핵융합연구도 그렇고 상온 초전도체 연구도 그렇다. 거대 가속기 프로젝트도 그렇다. 솔직히 그 거대 프로젝트중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게 있는가? 항상 약속다음에 또다른 약속일 뿐이었다. 10년만 있으면 온인류를 구원할 기술이나 진리를 찾아낸다는 약속말이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썼다면 세상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더 많은 에너지를 흥청망청 쓸수 있게 만드는 기술보다 산아제한과 생활습관의 변화가 더 큰 변화를 만들지는 않을까. 어느 쪽이나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앞 쪽에만 신경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늘날의 과학세계는 어쩌면 진정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과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부동산 버블은 아파트만 지어지게 만든다. 이 토건사회에서 정말 진정 철학이 있는 집을 짓고 싶은 건축가가 자기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건축업이 제아무리 활황세를 보여도 진정한 건축가는 굶어죽을지 모른다. 요즘에는 너도 나도 미친듯이 논문을 쓰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많이 쓰고 네이쳐나 사이언스같은 잡지에 실을려고 한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엄청난 돈을 들인 거대 프로젝트를 하면 논문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뭐든지 새로운 데이터니까. 신경과학분야에서도 FMRI 기계관련 논문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홍수난 것 처럼 논문이 나왔다. 비싼 기계를 사면 논문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가운데 진정한 과학 혹은 철학으로서의 과학은 죽어가는 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 경제와 거대 사이언스 프로젝트

 

얼마전에 미국에서 스페이스셔틀 운행을 중단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폴로 달착륙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다. 20세기 중반에 많은 사람들은 21세기가 되면 개인 우주선을 타고 달여행을 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 사이언스 프로젝트들이 중단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 세계는 경제적 위기에 빠져있다. 어디나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시장의 개념을 근간으로 발전해 온 자본주의의 역사 자체가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일수 있다. 

 

굉장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내가 보기엔 이같은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세계적으로 어느 부자나라나 해온 짓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용을 갉아먹으며 살아온 것이다. 인기있는 정치가가 되려면 정부에서 돈을 빌려서 건물짓고 돈뿌리고 도로건설하면 된다. 그럼 사람들은 마술처럼 물건을 만들어 내는 그 정치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치가는 도대체 어디서 돈을 빌리는가. 기본적으로 미래에서 돈을 빌린다. 거품에서 돈을 빌린다. 결국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돈을 갚아야 하지만 여러가지 방식으로 걱정없다면서 점점 재정적자를 늘린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갚을 거라고 믿고 아들은 손자가 갚을거라고 믿는다. 

 

지금 일본정부의 부채액은 어마어마하다. 갚는게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다. 해마다 일본정부는 돈을 더 빌리는데 그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일본은행이다. 즉 일반예금액을 정부가 빌리는 것이다. 그런데 한계산에 따르면 10년정도면 일본은행의 모든 예금액을 일본정부가 다 빌리는 일이 벌어질수 있다고도 한다. 10년이든 20년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게 100년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같은 일은 미국이며 유럽도 마찬가지다. 미국도 재정파산의 이야기가 매년나온다. 주정부가 파산을 선언한 곳도 있고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주정부가 돈이 없어서 전기가 끊기는 일도 벌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라고 말해지는 미국에서 말이다. 한국도 엄청난 돈을 빌려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지출을 정당화 하는 논리는 이것이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이지만 이미 지구가 비좁다. 즉 시장이 무한대로 커질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어딘가 부동산 투기꾼들의 논리나 식민지개발하던 시대의 개척자논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파트를 비싸게 사면 더 비싸게 아파트가 팔릴 수 있는 것은 그 아파트를 사줄 새로운 시장진출자가 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산업이 커지는 것은 항상 신규사업자들이 서둘러 진출해서 한몫벌겠다고 나서기 때문이고 신규사업자들이 더 이상없으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지으면 그것이 명소가 되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개발자의 논리다. 그런데 세상에 높은 빌딩이 흔해지면 어떻하나. 그럼 더더욱 엄청난 빌딩을 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 엄청난 투자가 요구된다. 그렇지만 돈에는 한계가 있고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 순간 파산이다. 

 

이 세상에는 더 시장에 뛰어들 사람도 더이상 없고 신세계도 없다. 재정적자로 경제활성화운운하면서 돈을 쓰지만 어느 나라나 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과감한 투자가 요구된다. 그럼 모두가 더 과감하게 돈을 쓴다. 그러다가 한계에 이르면 모두가 다 파산할 도리밖에 없을텐데 요즘 어느나라나 파산직전이다. 이런 시대에 거대 사이언스 프로젝트가 과연 지속될수 있을까? 무엇보다 경제적 파산의 구조가 과학 프로젝트가 점점 거대화 되어지는 구조를 그대로 닮아있지 않는가? 거대 과학프로젝트의 실패가 과학자체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결정적으로 막아버리는 재앙이 되지 않을까?

 

새로운 비전

 

마지막으로 변화 이후의 세계에 대해 몇마디를 쓰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만약 거대 경제가 파국을 만들고, 거대 과학프로젝트들이 파산선고를 한다면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게 될까. 새로운 믿음이 자라나게 될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어떤 믿음일까.

 

20세기를 돌아보면 세상을 바꾼 것은 통신혁명이었다. 전자통신이 세상을 다른 곳이 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과학기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티브이가 없었다면 대장금같은 인기드라마도 없었을 것이고 유화물감이 없었다면 유화그림도 없었겠지만 티브이의 발명이 모든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유화물감을 만드는 것이 세계적 명작 그림들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거기에는 종류가 다른 재능과 방향이 다른 노력이 존재했다. 

 

세계는 유기체 철학에 대한 믿음, 공동체 철학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리는 조선시대나 서양의 중세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 원천원리는 좀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에 대한 구심력을 강화하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결국 기독교건 성리학이건 사회적 융합과 유지에 현실적 목적이 있다. 이미 발전되어진 기술과 지식도 상당하며 이 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세계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적 융화, 유기체적인 결합따위다. 심지어 에너지문제도 더 빠른 해결책은 그것일 것이다. 미래에는 이런 공감대가 퍼지지 않을까. 핵심은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세계, 우리의 믿음에 있다는 공감대가 퍼지지 않을까.

 

그것은 미래의 핵심적 학문이 될 곳이 종교나 철학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분야가 될것이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면도 분명히 포함할 것이다. 요즘 인기있는 스티브잡스를 보라. 스티브잡스는 예수처럼 분장되어 희화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우연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도덕적 수준, 생태계를 이야기한다. 그가 대학졸업식에 나가서 이야기할때보면 우리는 철학자의 말을 듣는 것같다. 그가 모든 면에서 옳다거나 옳은것도 있지만 틀린것도 있다거나 하는 찬양이나 양비론을 말하고 싶지는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이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득력있게 말하는 이론의 시대다. 

 

중국의 주나라가 종주국의 권위를 잃고 천하가 소란스러워지자 등장한 것이 바로 제자백가의 시대다. 과학적 발전, 경제적 발전에 대한 거품적 기대가 꺼지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할것이고 그 안에서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게 될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일단 세계적 주류로 자리잡게 되면 세계는 소련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 그랬던 것처럼 새롭게 재편되어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시대에 자기 철학을 가지지못한 집단들은 흩어지고 거짓 선지자들이며 구세주를 따라서 바보같은 짓을 하다가 자멸하는 일도 생길것이다. 후일에 누군가는 그 지도적 생활방식을 시작한 중심인물을 예수나 공자를 기억하듯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예측에 불과하니 그냥 재미로 읽고 느껴지는대로 마음에 남기시면 좋겠다. 다만 예측이 맞고 틀린 것이상으로 우리가 어떤 가치적 쏠림이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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