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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화쟁과 현대과학

by 격암(강국진) 2011. 12. 8.

11.12.8

화쟁사상은 신라의 승려인 원광과 자장에서 비롯되어 7세기의 원효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화쟁사상을 모른다. 김형효가 쓴 원효의 대승철학이라는 책을 통해 약간의 소개를 받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통해 뭔가를 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일단 철학자 김형효의 말들은 매우 분명할 때도 이공계인 학도인 나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더구나 김형효 스스로 나는 아직 원효를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바에야 그 소개라는 것을 가지고 원효의 화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곤란한 일일 것이다.

 

다만 나는 최근에 과학자, 불확실한 세상을 산책하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불확실성, 현대과학 그리고 생명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을 모아본적이 있다. 그런 연후에 생각해보니 원효의 진의가 무엇이든 나는 나름대로 화쟁사상이란 말에 어떤 공명을 얻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과학도로써 그것과는 상관없는 길을 걸었지만 김형효가 소개하는 원효의 화쟁이라는 단어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싸움이 많고 혼란이 많은 요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약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불확실성과 과학

 

문제의 에세이집에서 나는 과학과 생명이란 것에 대해 철저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과학과 생명이란 것이 가지는 정의나 존재가 허물어지고 불확실한 면이 들어 난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과학이란 확실한 것이며 나는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말이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무지함, 불확실함은 항상 본질적인 수준에서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확실성이나 무지란 뭐랄까 존재 자체의 불확실성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이 세상에는 클래식 음악이라는게 있다. 누구나 그것을 안다. 그런데 클래식음악이란 뭔가를 아주 열심히 생각해 본다고 하자. 그게 뭘까 하고 말이다. 어떤 악기를 말하나, 어떤 시대와 사회의 음악인가, 어떤 형식을 말하나같은 것을 열심히 생각하고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클래식음악이라는 것은 단단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디에 정확한 선을 그을 수는 없다. 

 

빈종이에 원이 하나 그려져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저기 원이 있고 따라서 원의 안과 바깥이 분명히 나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원을 이루는 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까, 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종이 표면위에 흑연들이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것이며 우리는 분명하게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자세히 보면 선이 어디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인지가 불확실해 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분명하게 나눠지는 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원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할때 과학과 생명이 또한 그렇다는 것을 보이는 일을 과학과 생명의 해체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화쟁

 

원효는 일심이라던가 독정, 담연의 세계라는 말등을 통해 나눠지지 않는 하나의 세계를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서로 다투고 공존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공존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것이 조선의 불교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종과 교정을 동시에 포함시키고도 논쟁싸움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두 개의 상반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나 옳은 진리는 그것의 부정도 옳다는 말도 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무한히 엄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어떤 한계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원의 바깥과 안쪽이 따로 있지 않듯이 어떤 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같은데도 편안히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양쪽을 모두 해체했을 때 존재하는 것은 모두를 포용하는 무언가 이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원의 선같이 좁은 것이 불분명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보통사람의 일상에서는 이런 사고가 필요없는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배중률과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글 (http://blog.daum.net/irepublic/7888194) 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큰사회를 이루고 더 길고 넓은 예측을 하려고 할수록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다시말해 과학의 발달로 전세계가 하나로 움직이는 이 시대에 화쟁의 사상은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었다고 할수 있겠다. 공존할 수 있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유한함을 알고 그 한계와 테두리를 느끼려고 할 필요가 있다. 

 

원효의 시대는 오늘과는 다르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줘야하고, 더운 사람에게는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듯이 시대가 다르므로 우리의 과업도 달라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해체해야 하는 것은 원효의 시대와는 다르다. 해체의 작업이 없이 무조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과학과 비과학을 공존시킬 수 없다. 과학을 해체하려면 과학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과학에 익숙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과학은 이미 불확실성의 문제를 그 깊숙히 포함하고 있다. 과학과 생명을 어떻게 해체하는가는 분량의 문제로 여기에 정리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필요한 것은 불교이론적 화쟁이 아니라 주로 과학해체적 화쟁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을 해체하건 어떤 다른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건 해체하는 것 자체가 화쟁은 아니다. 그런 절대적 믿음들의 한계를 보고 도달하는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며 그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나 설명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화쟁과 일상 생활

 

화쟁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있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는 한 개인이고 우리 부모님을 포함하는 가족의 일원이고 한국인이며 인간이란 존재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인 동시에 그 어느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는 내가 무엇무엇이다라는 것이 맞다 틀리다 둘중의 하나로 답할 문제가 아니라 애매하게 한계를 가지고 정의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여기 한명의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이 인간이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인간의 목숨이 한마리의 개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천마리나 만마리라면 어떨까. 아니 멸종위기에 처한 한무리의 동물들과 비교하면 어떨까. 이 무가치해 보이는 인간 하나때문에 하나의 동물종이 영원히 멸종된다고 해도 우리는 단호하게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서 특정한 진짜 상황에 접하지 않은 채 인간은 동물보다 소중하다같은 어떤 단언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것을 부정해서 이러저러한 상황이라면 인간하나쯤 죽는게 동물을 살리는 것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것은 인간이고 저것은 동물이라다라는 선언자체가 우리가 해체해야 할 인식이고 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규칙이나 법을 많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규칙을 지키거나 깨는 두가지 중의 하나밖에 못한다는 점에 있다. 규칙을 잘 들여다보고 규칙을 이해하고 나면 거기에는 규칙이 없다. 따라서 평상시에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까지 다 판단을 결정해 두고 그것때문에 괴로워하고 해야 할 일이 없다. 구분과 절차와 법은 도구이다.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을 미리 정하고 고정하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게 된다. 

 

미리 미리 다 결정해두고 판단을 내려두는 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끝없이 싸우게 만든다. 명문대를 나온 남자는 이렇다라고 판단하고 미혼모는 이렇다라고 판단하고 일본사람은 이렇다라고 판단하고 유명인은 이렇다라고 판단해 버린다. 우리 머리에 판단을 마구 쏟아부우면 이젠 그 판단들이 공존하지 못하고 우리 머리속에서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 우리는 부자유스러워지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모든 걸 하고 싶은데로 하고, 과학따위 부정해 버리고, 법도 안지키고, 민족도 국가도 부정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자유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은 그저 도구에 불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 직업을 찾는다. 그런데 직업에 빠지다보면 직업을 위해서 행복을 깨뜨리게 된다. 이것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직업따위 애초부터 찾지 않는다는 것도 자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직업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직업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맺는 말

 

요즘 세상 정말 복잡하다. 그리고 친구며 가족이며 학교며 회사들은 우리들에게 온갖 종류의 규칙을 던져준다. 그것이외의 것들은? 그저 자유라고 말한다. 이건 말하자면 부자유할 자유랄까. 여기에서는 우리 동네는 비내릴 때 빼고는 비가 내리는 적이 없어라는 식의 허무한 문장의 느낌이 난다. 

 

일본드라마에는 자주 나오는 캐릭터가 있다. 직업에 충실하다보니 어떤 면에 완전히 소홀해 져서 아내나 남편으로 아버지나 아들로 실패하거나 건강을 잃거나 자신이 평생해온 일의 결과에 충격을 받는 경우다. 열심히 평생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일했는데 그가 만든 기계가 어디선가 죄없는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있었다 뭐 그런 경우 말이다. 

 

그래서 일테지만 도덕적 상대주의가 세상에 판을 친다. 그러다 보니 이번엔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가 쉽다. 달콤한 사랑은 이젠 값싼 싸구려 캔디처럼 되고 술에 방종에 찌들어 되돌이킬 수 없게 허물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번 가족의 가슴에 피를 흘리게 하면 사과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말하자면 덥다고 옷을 벗다가 벌거숭이가 된 꼴이랄까. 춥고 볼쌍 사나워진다. 적당히라고 말은 쉽지만 어디가 적당히 인지 알 수가 없다. 뭔가 말이 안된다. 왼쪽도 오른쪽도 답이 아니고 한가운데도 답이 아니다. 어제 찾은 답은 오늘은 답이 아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소화시키지 못한 것을 너무 많이 삼킨 것이 아닌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단 배를 비워야 또 뭔가를 삼켜도 삼킬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무리를 하면 배가 터져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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