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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환각을 깨는 법

by 격암(강국진) 2011. 12. 21.

2011.12.21

세상에는 우리가 세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착오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들이 있다. 환각 현상이 그 한 예이고 다른 예는 종교적 광신이다. 이 두 가지 예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무엇보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는가하는 문제 즉 인식론적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환각현상이나 종교적 광신의 예에 대해 우리가 들을 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특이한 경우에 볼 수 있는 드문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어떤 의미로 - 즉 내가 아래에서 보다 분명히 설명하려고 노력할 의미로 -  우리는 모두 환각 속을 살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 환각을 깨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떤 환각인지, 언제 어떻게 그것을 깨야만 하는지에 대해 되도록 간단히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자. 

 

환각의 예들,

 

여러가지 환각의 예들을 둘러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가를 느끼고 그것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몇 개의 예를 보도록 하자. 이 예들은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은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크기의 동그라미나 같은 크기의 선이 주변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따라 크고 작게 혹은 길고 짧게 느껴진다. 직선인데도 주변이 어떻게 되어 있나에 따라 휘어져 보이는가 하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점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 그림 속에서 보이게 된다.

 

 

 

우리의 인식은 또한 때로 분명한 변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흔한 게임중의 하나는 하나의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의 일부가 천천히 변하는 것이다. 그 변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 변화를 놓칠 수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천천히 일어나는 경우 우리는 그 그림을 오랜 간 쳐다보고 있어도 뭐가 변했는지 알아내기 힘들다. 이것은 다음에 또 말하겠지만 우리가 뭔가를 보고 듣는 다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보고 듣는다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정보를 선택하고 버리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예가 몇년전에 화제가 되기도 했는 데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중 많은 것을 쓸모없는 잡음이라고 버리고 있다. 따라서 인식에 착오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결코 외부의 신호가 오면 그것을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들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과거에 경험했는가에 따라 결정 되어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것은 2차원 적인 그림이지만 광원이 보통 우리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에 익숙한 경험에 따라 튀어나온 3차원적인 그림으로 해석되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을 180도 뒤집어 보면 이번에는 이것이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게 되는데 이것도 광원의 위치에 따른 가정 때문이다. 언스트와 그 동료들은 근간에 이러한 우리의 가정은 경험을 통해 수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뭔가를 어떻게 보는가하는 것은 우리가 뭘 기대하고 뭘 가정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였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재미는 있지만 그다지 일반적이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강력하게 우리의 인식을 우리의 경험과 기대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느끼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환각으로 여기지 않고 사실로 여긴다. 우리는 남의 환각을 보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자신은 환각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환각을 인식하고 그것을 깨는 일은 쉽지 않다.

 

환각을 깨기 위해서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환각이란게 뭔지, 그걸 언제 어떻게 깨야하는지 말하기 전에 우선 먼저 지적해 둬야 할 것은 환각을 깨는 데는 항상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뭔가에 대해 너무 빨리 판단을 내려버린다. 즉 뭔가를 보고 들으면 자신이 그것을 이해했으며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고 혹은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을 내려버리며 종종 어떤 이야기가 어떤 중요한 것을 가지지 않고 아주 사소하거나 기괴해서 일상사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것들에 대해 지리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뭐야 그런건 다 알려진 거잖아, 저번에 이야기한거잖아, 이런걸 왜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달리는 소감들을 읽어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글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놀라울정도의 무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이 지적으로 특별히 떨어진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어떤 내용에 대해 시각장애인처럼 둔감하다. 무엇이 핵심이었는지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너무 서둘러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맘대로 단정지어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의 환각을 깨는 이야기는 항상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환각이 그 환각이 보여주지 않는 것들은 사소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환각에서 빠져나오면 그보다 중요하고 분명 할 수 없을 일을 지금의 환각은 그것은 불분명하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각을 깨려면 참을성을 가지고 견뎌야 하며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이것을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는 미친 사람을 이해하기로 말한다. 서로 다른 환각을 보는 사람들은 종종 서로를 미친 사람으로 본다. 만약 다른 미친 사람의 시각을 이해하고자 설명하려 한다면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설명해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밖에 없다. 정면으로 분명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항상 옆쪽으로 뒤로 이야기해 들어가야 한다. 아뭏튼 당신은 미친 사람이 본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토마스쿤의 과학혁명의 논리식으로 말하자면 환각을 깨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믿는 사람에게 다른 패러다임을 설명한다고 하자. 설명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 설명을 하는 사람이 개념적 혼돈에 빠진 것처럼 보이며 그것을 피할 방도가 없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가 쓰는 말들의 의미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문장을 말했을 때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다르게 이해하곤한다. 한쪽은 분명하고 엄밀한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쪽은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식으로 들리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팍하고 시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말이 되게 들린다. 

 

그건 문화적 전환과 같은 것이다. 만약 조선시대의 사람에게 시험관 아기나 섹시한 여가수의 춤에 대한 평론을 들려준다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현대를 좋은 세상으로 생각할까.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져서 의미와 해석을 만들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그러니까 네 주장을 한마디로 분명하게 말해봐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환각을 깨는 이야기나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좋은 예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물리학으로 훈련을 받은 내 경우 가장 마음에 드는 설명은 물리학의 역사에 기대는 설명일 것이다. 즉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의 등장 같은 것 말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만한 이론들의 등장은 내가 위에서 말한 것을 그대로 잘 보여준다.

 

첫째로 이 이론들은 나중에 크게 성공하기 전에는 매우 사소하고 작은 것에 대한 이론 같았다. 양자역학은 원자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된 이론이며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력을 측정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발전된 이론이다. 이 이론들이 나오기 전에는 과학자들은 물리학은 이미 거의 완성된 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그들이 보는 관점에서 그들이 모르는 신비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씨앗이 된 문제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어찌보면 사소하게까지 보이는 문제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둘째로 이 이론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넘어서는 극한의 상황들을 살핀 결과 등장한 것이다. 원자는 보이지도 않게 작은 것이고 빛의 속력은 너무도 커서 일상과 동떨어진 문제로 보인다.  이 이론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말은 일상적인 상식으로 보면 사실 미친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물체가 벽을 유령처럼 통과한다느니, 입자가 파동처럼 퍼진다느니, 시간이 느려지고 물체의 길이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모두 미친 사람의 말이다. 쉬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는 특히 기괴하게 들려서 양자역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양자역학이 말이 안된다는 증거로 삼을 정도다. 

 

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여기서 설명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나 환각을 깬다는 것은 백가지를 아는 사람이 한가지를 더 아는 것과 같은 지식의 성장 같은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물리학 이론의 예를 통해 설명하려고 할 뿐이다. 위에서 말한 이야기와 확실히 비슷하지 않은가?

 

당신은 정당하게도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다. 만약 환각을 깬다는 것이 지금의 상태에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파고들어서 생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그 사소한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사소한 것이 어떻게 중요할 수 있는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경우로 말해보자면 결국 양자효과란 매우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작은 효과이며 상대성이론이란 물체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관찰되는거 아닌가. 그런걸 일상에서 경험할 리가 없는 우리에게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건 우주론을 연구하는 괴상한 과학자들에게나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렇지만 그래도 당신의 머리위에는 태양이 불타고 있다고. 태양은 핵반응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유명한 아인쉬타인의 공식에 따라서 말이다. 태양이 있기에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했다. 태양이 만약 가스가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불타는 것이었다면 태양은 예전에 다 불타고 식어버렸을 것이다. 즉 우리가 사소하고 극한의 상황에서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실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히로시마에서 많은 인명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힘을 가진 생생한 실체였다.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에 과학의 눈으로 세계를 볼 때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게된다. 그럴때로 보면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애초에 인간이 왜 과학 같은 것을 할까 아니 나아가 나는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는가에 대한 궁극적 설명이 빠져있다. 설명이 있는 것같을 때도 그 핵심을 곱씹어보면 결국 가치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란 그것이 착각이라는 말을, 다시말해 그런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환각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태양을 꺼버리는 것 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환각을 빠져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사소하다고 무시하고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이 실은 치명적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도로 행동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모든 가치있는 일들을 무시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작게만 보이지만 결국 그것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의 여러가지 일에 대한 해석을 전부 뒤짚어 버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물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보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 수 있다. 

 

우리의 눈이 멀게 되는 이유

 

성공과 실패는 대개 같은 원인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해진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통해 성공하면 그 사람은 그 성공의 요소에 너무 기대게 되고 그밖의 요소에 대해 오히려 더욱 장님이 되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성공이 만들어낸 값싼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그는 정확히 그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기 때문에 크게 망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빠져들고 거기서 탈출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우리는 미신에 빠진 광신도나 공산주의나 자유시장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 잔혹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본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은 종종 기괴한 의식을 행하는 미신적인 토인들과 그들은 다르다고 믿는다. 물론 다르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고 대개 생각보다는 그 차이가 크지 않다. 우리는 모두 미신적이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눈이 멀고 만다.

 

흔히 저지르게 되는, 문제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미신에 대한 오해는 미신은 관찰과 경험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즉 많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잘못된 미신을 타파하고 진리에 접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계속 옳은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를 가진 것이며 미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는 양자역학이 발전하던 시대에 아인쉬타인과 하이젠베르크가 나누던 대화를 생각나게 한다. 당시 아직 젊은 과학자였던 양자역학의 아버지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오직 우리가 확실히 관측할 수 있는 것으로만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하주의를 아인쉬타인에게 말하며 아인쉬타인이야 말로 그러한 철학을 통해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과학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노회한 아인쉬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만들 때 그러한 입장을 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대답한다.

 

왜냐면 이론은 관측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은 거꾸로 무엇이 관측가능한가를 결정해 주는 것도 이론이기 때문이다. 즉 이론과 관찰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이론이 우리에게 우리가 뭘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다시 관찰된 결과는 우리의 이론을 확인하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에서 이 대화가 훗날 양자역학을 완성하고 유명한 불확정성원리를 발견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고 회상한다.  

 

이론과 관측의 문제는 철학과 실천의 문제와도 같다. 우리가 실천만 한다고 어떤 깨달음이나 이상적인 삶의 형태에 접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하게 하는가는 바로 우리의 철학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다르게 선택하게 하고 다르게 경험하게 한다. 당신이 비록 남이 안빈낙도하는 삶을 그대로 흉내 낸다고 해도 당신의 내적인 철학이 다르다면 그것은 전혀 같은 삶이 되지 못할 것이다. 철학과 실천의 길은 둘이지만 서로 다를 수 없다. 그 둘은 서로 합쳐져서 쉽사리 깨어지지 않는 자기 일관적인 세계를 만든다. 환상을 깬다던가, 패러다임을 극복한다는 것은 이런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이다.

 

이야기가 약간 학구적이 되었으므로 우리가 친숙한 이야기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세상에 어느 정도 신자를 끌어들인 미신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자기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면 그런 미신은 쉽사리 탈출할 수 있고 진작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일관성은 관찰이나 경험으로 쉽사리 깰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명백한 증거에도 그 세상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불확실성, 불신, 무지다. 가장 간단한 종류의 자기 일관적인 미신을 만들어 보자. 예를 들어 사람은 서울대에 입학하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없다는 미신이 있다고 하자. 이 미신은 서울대에 입학하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아주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선을 긋는다. 즉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짓말장이이거나 자기가 행복한 것을 모르는 철부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미신을 만들고 나면 이제 어떤 예를 들고와도 이 사람은 그 예 혹은 관찰을 통해 자기의 이론 혹은 미신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서울대를 입학하지 않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는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할 것이다. 실은 질투심과 패배감에 행복하지 않은데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예를 통해 마침내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워지면 그는 이제 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며 보통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나는 서울대 졸업생이지만 불행하다고 말하면 물론 그 사람은 나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란걸 모르는 철부지이며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른다고 할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의 미신은 깨어지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대화와 관찰을 통해 점점 더 그의 믿음을 굳건히 한다.

 

원하다면 위의 예에다가 서울대대신에 다른 것을 집어넣어서 다른 미신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이나 부동산이든 멋진 배우자나 멋진 이두박근이나 여자의 큰 가슴 같은 것등 뭘 넣어도 미신을 만들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는 조잡한 엉터리 미신이 많다는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는 내가 만든 조잡한 미신보다 훨씬 더 복잡한 미신과 이론이 많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미신이고 모든 것이 환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일관적이기 때문에 깰 수 없는 벽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이 심지어 다수의 신자를 만들어 집단적 종교가 되면 그 벽은 한없이 높아진다. 우리는 모두 장님이다. 이론이 우리가 관측하는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가 세상은 남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만 가득차 있다고 믿으면 그리고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은 그렇게 보이고 그 이론은 경험에 의해서 확증받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진 자기일관성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때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어떤 과학자나 전문가들이 신경 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들이 다 고민해야 할 이야기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자기성찰을 내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미신에 빠졌다가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들, 혹은 어린시절에 철없이 굴었던 자신을 회고하는 사람들은 대개 내가 미쳤었다,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 미쳐있지 않은가, 뭔가에 홀려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런 의심을 적어도 가끔은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환각을 깨는 길이다.

 

모든 걸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이제까지 길게 환각을 깨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왔으며 자못 비장하게 당신은 미쳐있지 않은가, 환각에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난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나는 서둘러 환각을 꼭 깰 필요는 없다는것, 아니 무조건적인 자기세계의 파괴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당신의 세계는 작고 허접할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 허름한 해변이나 산골마을에서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평생 노력해 온 것이 어느 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산산히 부서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 세계를 금방 재건하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항상 위험한 비약이며 실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당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쓸데 없이 온 세계를 다 알려는 야심을 가지기 보다는 당신이 가진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 수도 있으며, 온 세계를 두루 둘러보고 난 후에 당신은 다시 작은 세계 안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꿀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 젊을 적에 경험했던 이상적인 세계를 다시 재건하고 재현하려고 평생 노력하다가 죽고는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많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다만 약간의 문맥차이가 있을 뿐이며 그 약간의 차이가 때로는 매우 중요할 수 있지만 지금 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문맥에서는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즉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환각을 깨려고 해왔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바닥없는 상대주의와 회의론의 구멍에 빠져든다. 다른 사람과 함께 말이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 민족, 국가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그런 것이 환각일까 아닐까. 그런 것들은 모두 환각이다. 그러나 동시에 환각이 아니다. 당신은 분명 가족이나 연인의 따뜻한 정의 혜택을 받거나 민족이나 국가가 당신에게 혜택을 줘서 성장한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문맥에 따라 실체가 아닐 수도 있고 실체 일수도 있다.

 

누군가가 천년이나 5천년전에 우리 민족이 뭘 했느니 마느니 해서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닌 누군가와 나는 다르고 따라서 이런 저런 구분과 차별이 필요하다고 하는 문맥에서 민족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민족문화따위의 소중함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한국어를 쓰면 어떻고 영어를 공용어로 쓰면 어떠하며 우리의 음악이니 우리의 음식이니 하는 것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쇄국주의에 불과하고 한국에 사람이 부족하면 외국인 노동자 천만명쯤 들여오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간단히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문맥에서 민족과 국가는 아주 단단한 실체다.

 

언젠가 우리는 가족관계니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시대가 된다면 그런 준비가 된다면 흔쾌히 여러가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저 환각에 지나지 않으며 의미없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역사속에서 잊혀진 수없이 많은 미신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개개인의 상황도 모두 틀리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준비가 되었을 때만 비약을 해야 한다. 무분별한 파괴는 죽음과 소멸에 이를 뿐이다.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나는 사랑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고 사랑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은 대개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하거나 남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잠정적인 것, 임시적인 것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들 덕분에 우리가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으니까. 우리 민족문화에 많은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수천년간의 조정끝에 탄생하고 성장해온 그 잠재력을 깡그리 잊고 그저 모든 것을 무로 하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살아도 이 정도는 살수 있다고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건 마치 한국어나 영어 따위 다 잊어버리고 새로 세계공통어를 만들면 당연히 모두 그 언어를 다음날부터 다 쓸거라고 믿는 것처럼 무모한 것이다. 

 

환각을 깨는 법

 

자 마침내 우리는 환각을 깨는 법이라는 장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실 이부분은 앞의 내용을 잘 고민하면서 읽은 사람들이라면 내가 쓸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글을 시작한 입장에서 몇가지를 써보도록 하자. 

 

첫째로 말할 것은 무슨 매뉴얼처럼 이런 저런 순서를 거치면 환각이 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장하는 방법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환각이 깨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감각을 얻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유명한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그런 말을 한다. 요리에 홍시가 들어간 것을 아는 것은 홍시맛이나기 때문인데 홍시맛을 어찌 아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고. 

 

당신이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장님이라고 하자. 당신이 도대체 무지개가 보인다는 것은 어떤 소리를 들을때 하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본다는게 뭐냐고 묻는다면 눈이 보이는 당신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길게 말로 무지개의 모습을 설명한다고 해도 핵심은 그런 설명을 만들고 기억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뜨고 무지개를 보는 체험의 문제다. 요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나는 이 위기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인문학을 지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서 온다고 본다. 인문학이나 철학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연애하는 법을 천권을 쓰고 외워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느낌을 가지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다. 

 

방법이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이유는 환각의 파괴란 느낌의 문제고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고 물론 나 자신도- 보고 듣는 것들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을 둘러싼 환각이 사실을 걸러내고 선택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환각을 깬다는 것은 버젓히 눈앞에 존재하는 벽에 머리가 깨질 각오를 하고 뛰어드는 것이다. 절벽이 보이는데 절벽이 아니라고 믿고 발을 내딛는 것이다. 더구나 그 비약이 반드시 더 좋은 세상에 안착하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를 믿고 비약을 한다. 지금 있는 세상에 더 이상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그런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어서 계속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런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비약을 좀 더 쉽게 만들고 무지와 불확실성의 벽을 약화시키는 것들이 세상에 두 가지는 있다. 하나는 이것이 느낌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우리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좁은 경험만을 주는 일상에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우리의 세계가 점점 더 작아지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완결되면 아주 작은 세계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평상시에 가지 않고 하지 않던 것을 하는 일이 사라져가는 우리의 감각을 되살린다. 자기성찰과 고민도 없이 미친듯이 경험의 양을 늘리는 것은 그 자체가 작은 세계로 빠져드는 함정이지만 역시 다양한 경험이 우리의 감각을 되살리고 우리의 세계를 둘러싼 벽을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두번째는 날카로워 지는 것이다. 느낌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는 말하자면 폭넓은 경험을 말했는데 이번에는 나는 깊은 고민, 전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어떤 극한적인 경험에 대해 고민하고 측정한 결과 기존의 과학이론이 가지는 패러다임을 깬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둘러싼 불확실성과 자기 일관성의 벽을 뚫으려면 우리는 깊고 세밀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뭐든지 전부 대충해본 경험만으로는 그 벽을 뚫기 힘들다. 그러나 뒤짚으면 뭘해도 큰 상관은 없는 것같다. 즉 나는 물리 이야기를 몇번했지만 그것은 목수의 길이나 농부의 길, 프로야구선수의 길일 수도 있다. 댄서나 가수 혹은 야채가게 아저씨나 아이를 잘 키우고자 하는 엄마의 길일수도 있다. 우리가 뭔가에 대해 진짜로 진지해 질 때 그래서 어떤 것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허술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실은 환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것을 장인의 길이라고 부르고 인생을 예술로 만드는 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그걸 추구해 갈 때 -피리란 무엇인가라던가,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던가,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던가, 축구란 무엇인가라던가- 우리는 한없이 좁아지지만 그 힘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구멍을 낸다. 그리고 세계는 넓어진다. 일단 세계가 넓어지고 나면 우리의 포용력도 넓어진다. 물리학의 세부사항이라던가 피리만드는 법의 세부사항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 그것에 진지해 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렵다고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의 책들이 많다. 그 책들을 이해하거나 그 책에서 저자들이 말하는 결론들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것보다 우선해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도대체 그 철학자들이 왜 그렇게까지 골머리를 썩히며 생각에 골몰했을까, 뭐가 그들이 가진 질문이었으며 그들은 왜 그런 질문에 그렇게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까하는 점이다. 언제나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습관적으로 살 때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나 믿음을 수정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살려고 할 때, 진지하게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금방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행동에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고민하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두려움이나 나태함에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일이면 죽을 사람처럼 아무 두려움이 없이 문제를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한번이라도 자신의 삶에 진지한 두려움을 버리고 나태함을 버린 그런 태도를 가진 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철학자가 된다.

 

사실 넓고도 깊게의 길은 어렵다. 당연히 상대적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고자 노력해서 되는 길이 아니다. 넓고도 깊게를 만들어 주는 것은 결국 우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우리가 가지는 인생의 질문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럴 때만 그런 것이 이뤄진다. 우리는 욕망과 공포에 의해서도 움직이는데 그것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욕망과 공포는 외부에서 비일관적으로 몰려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제자리를 그냥 맴돌고 있을 뿐이거나 더 큰 욕망과 공포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맺는 말

 

대개 의심하는 것은 쉽지만 믿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로 어려운 것은 의심하는 것이며 믿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다. 진실로 믿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믿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소위 박스바깥의 생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드는 것을 본적이 있다. 여러 증인들이 여러가지 진술을 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범인을 찾고 있다. 그런데 제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답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확인하지 않고 증언들을 서로 짜맞추려고만 한다. 그러니까 증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발상은 이경우 박스바깥의 생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미 의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증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라고도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뭔가를 믿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안 믿을 수도 있는데 믿는다는 뜻이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뭔가를 믿는다라고 의식한다. 정말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뭔가를 믿는다고 생각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스바깥의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증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만으로 남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쉽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을, 같은 것을 보면서 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높고 낮은 자기 일관성의 벽 안에서, 자신의 믿음 속에서 자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믿음이 만들어낸 필터를 통해서만 전해진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믿음의 문제다. 경험에 의해 쉽사리 망가지는 세계들을 보면서 튼튼한 자신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고 남의 세계는 착각과 광기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과 광기다. 나는 특별히 뭔가를 믿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맹신의 증거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따지고 보면 믿음의 문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나비의 꿈을 꾸다가 일어난 나는 정말 나비의 꿈을 꾼 나인지 사람으로 깨어난 꿈을 꾼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다. 세계가 탐욕스럽고 나쁜 사람으로 차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런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자신의 믿음이다. 나쁘고 좋은 것은 항상 문맥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문맥을 만들고 보는가는 우리가 뭘 믿고 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 글을 읽는 사람중 일부는 필자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럼 어떤 것인가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필자가 필자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며 이러저러한 세계이니까 너의 세계를 깨고 이 세계로 넘어와라라고 말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부분적으로 나는 내 일상이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써서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일을 하고는 있다. 다른 글들에서 말이다. 또한 이 글에서도 간접적으로 나의 시각은 들어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런 글에서 강조하지 않을 만큼은 똑똑하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물론 내가 보고 듣는 이 세상은 매우 소중한 주제가 되지만 내가 글을 쓰거나 남에게 말할 때 첫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 글은 사실 사람들의 세상들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나와 너는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 세계는 기본적으로 나의 문제다. 당신의 세계가 기본적으로 당신의 문제 혹은 당신의 선택이듯이 말이다. 내 세계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듯이 당신의 세계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우리의 세계는 같지 않은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서로를 위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남의 환각을 깨겠다면서 자신의 세계로 세상을 가득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가진 세상은 매우 조잡한 것이지만 때로는 매우 근사하고 넓은 세상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한인간의 경험과 지적능력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온세상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인간들이 똑 같은 것을 보게 되지도 않고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다 행복하지도 않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세계를 때로 남에게 보여주고 강요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똑같은 것을 보고 듣는게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존을 고민해야 한다. 나는 느끼면서 사는게 중요하다는 것, 적어도 어느 하나에는 진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어떤 문맥에서는 환각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단단한 실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곳이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서로 덜 상처주고 덜 상처받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세계가 좁거나 타인과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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