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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한국에서 과학적 인간과 인문학적 인간의 분리

by 격암(강국진) 2012. 3. 12.

2012.3.12

인간을 묻는다를 쓴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수학자이면서도 문학분야에 정통하고 방송인으로도 저술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과학계의 인물이나 인문학계의 인물들은 각자 서로 다른 분야의 깊이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문학계의 사람이 과학이란 그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단순히 말한다던지 과학계의 사람들이 인문학이란 그저 뜻없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라던지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물론 많은 훌룡한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그런 허세를 부리고 있지는 않지만 과학적 인간과 인문학적 인간이 분리되는 면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확실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현대 한국에서 특히 유럽과는 비할나위없이 크게 존재한다. 사실 서구과학은 철학적 전통을 강조한다. 서구철학자들이 애초에 수학자이거나 물리학자였으므로 철학적 사고가 자연과학과 연결되는 것이 서구에서는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 한국의 기준에서보면 말이다. 그런데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같은 사람은 과학적 인간과 인문학적 인간의 분리가 문제가 되며 양자의 결합을 통한 보다 통합적인 세계의 이해가 절실하다고 느끼니 한국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은 조선시대이래 윤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성리학이 주류로 자리잡아 과학과 기술은 뒷전으로 밀려난 잡학이 되었다. 수학을 모르면 아카데미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며 숫자안에 우주의 비밀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정신적 후손들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그러므로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동양철학의 책을 읽다가 서양철학의 책을 읽어보면 그 어조의 차이가 너무나도 커서 이런 것들을 모두 철학이라는 한가지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하고 의문감을 품게 된다. 동양철학이라고 하면 점치는 것으로 아는 대중도 많은데 서양철학을 점성술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노력을 해왔고 노력하고 있다. 이분법을 넘어서를 쓴 장회익교수나 최종덕교수, 김용옥교수나 그 형 김용준교수, 통섭을 말하는 최재천교수도 있다. 그리고 그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더 부자가 되고 더 빨리 변화하는 사회가 되어감에 따라 이 문제의 심각성은 점점 더 심해지는데 그에 비하면 그 해결의 정도는 매우 지지부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리가 만들어 내는 문제

 

과학적 인간과 인문학적 인간의 분리는 가치판단이 없는 과학과 미신적인 인문학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또한 미신적인 과학도 만들고 가치판단이 없는 인문학도 만든다. 인문학적인 감성이 빠진 과학은 가치판단이 없어진다. 그럴때 전문적 과학자는 단순히 계산하고 조립하는 기계가 되기 쉽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도 잘 모르기 쉬울 뿐만 아니라 사실은 창의적이 되기도 어렵다. 인문학이 빠진 과학이란 맹인내지 지독한 근시의 과학이다. 세계를 느끼지 않고 자신의 주변과 자신만 보면서 하는 과학으로 어린애의 과학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총을 든 어린애처럼 위험성을 가져온다. 더구나 창의성이란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창의성이란 어떤 커다란 이야기나 문맥속에서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천재과학자 뉴튼이 물리학연구에 몰두했던 것은 천문의 변화속에 존재하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질서를 발견하여 신의 권능을 보이고자 했던 종교적 열성의 결과였다. 그는 결코 과학이나 수학말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없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고 그랬다면 애초에 그가 그런 열정을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인문학적인 감성이 빠진 과학은 종종 미신적 과학을 믿는 대중을 만들어 낸다. 즉 그들은 전문과학자보다도 더 과학을 믿는다. 그래서 응당 이 우주와 세상의 신비를 가르쳐줘서 사람들의 시야를 넓게해야할 과학이 오히려 그들의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든다. 과학이 인문학을 몰아내고 아름다움이라던가 사랑같은 것에 대해 더욱 무관심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배금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인간을 만든다. 이공계 출신의 사람중에서 이런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심지어 더 높은 학위를 가졌지만 세상에 대해 매우 조잡하고 편협하며 냉정한 시각을 가졌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인문학이 빠진 과학이란 상당부분 후진국병이다. 과학도 국제적인 협력과 배움이 필요한 일인데 세계의 과학적 기술적 중심이 외국일 때 후진국은 과학기술계에서 단순 기술적인 일을 주로 맡게 된다. 즉 생각과 창의력과 지도력은 외국이 발휘하고 후진국의 학자들은 거기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유학간 사람들도 흔히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게 되기 쉽다. 후진국의 역사가 길었던 한국은 바로 그 함정에 여전히 빠져 있는 것이다.

 

과학이 빠진 인문학은 한마디로 현대에서 무력하다. 그것은 좋은 경우 임시처방적인 약이 되는데 종교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개인수양을 바탕으로 세상에 좋은 말씀을 하는 경우가 이러하다. 이런 말씀들은 필요하고 중요하며 틀리지도 않은 말씀들이지만 과학적이고 시스템적인 세계의 변화앞에서 한계가 있다. 현대문명을 특징짓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빠진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현대문명에 대한 평가와 비판의 능력을 상실한 인문학인 것이다. 그것은 결국 쉽게 그저 반문명적 메세지가 되거나 본의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해석되어 모든 걸 버리고 초가삼간에서 자연과 함께 살자는 이야기로 변하고 만다. 

 

더 나쁜 경우도 많다. 그것은 과학을 가장한 유사과학적 인문학이다. 공산주의처럼 그저 인문학인데도 과학인 척하는 주장들이다. 이것들은 태산같은 관념의 탑을 쌓아올리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인문학이며 결국 누군가를 선동하고 지배하기 위한 인문학일뿐 인문학본래의 가치인 세계에 대한 관점의 확대라는 일은 해내지 못하는 인문학이다. 세계에 대한 공부라기 보다는 남이 만들어 낸 관념에 대한 관념을 공부하는 것이랄까. 이것은 학문자체가 문제가 될때도 있지만 팔아먹기위한 도구로 인문학을 써먹는 사람들이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문제는 이미 백여년 전부터 철학은 대학에서 철학교수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되었다라는 말로 지적되어 왔다.

 

과학의 장점은 그것이 든든한 사고의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과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과학을 제외한 사고란 허공에 짓는 집같은 것이라 애매한 관념들로 지어져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없는 인문학적 사고가 더 거대하면 할 수록 그것은 심각한 독단이 되기 쉽다. 싸구려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 무슨 무슨 주의니하는 어떤 관점이 쉽사리 너무 절대적으로 믿어지기 쉽다. 

 

과학이라면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나는 과학이라면 좀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한가지만은 이야기해두고 싶다. 사람들은 과학을 지식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수련의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종종하는 말이지만 대중과학서 백년 읽는다고 과학자가 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소개책을 통째로 외워도 그것과 정식으로 물리학과에서 전공논문과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한국말을 모르면서 시조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수학을 거치지 않고 일상어로 이해한 물리학이 사실 그렇다. 

 

물리학과에 다니는 사람들이 수강하는 과목에 물리에 쓰이는 수학을 모아놓은 수리물리학이란 것이 있다. 여러가지 수학을 모아놓은 그 수리물리학 교과서는 무척이나 많은 연습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물리학졸업생들은 그 문제를 다 풀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다. 수리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문제를 전부 풀면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나도 다른 연습을 통해 그런 경험을 했고 사실 어느분야던 전문가 과정을 겪으면서 고생을 해보면 그런 체험이 단순히 지식몇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듯 그런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인도 수학공부를 좀 해보는게 좋다. 과학을 그저 짜투라기 지식모은것으로 오해하지 말고 과학도 체육처럼 생각하는게 필요하다. 국가대표 달리기 선수앞에서 달리기란게 다리를 번갈아가면서 움직이면 되는거잖아요. 달리기라면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도록 달려보지 못하면 그 체험을 얻을 수 없듯이 제대로 과학적 사고로 훈련을 하지 않으면 과학을 아는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중과학서적 좀 읽고 과학이란 이런거구나, 과학에 더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 

 

인문학이라면 어떤 건지 알고는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런 것은 워낙 종류가 다양하겠지만 여기서도 한가지를 말하고 넘어가자. 인생에 있어서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해 보고 경험해 보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인문학 책을 많이 읽었다라는 부분보다 이 부분이 더 중요한게 아닌가 싶다. 

 

간디는 자서전을 가르켜 나의 진리실험기라고 했다. 이는 외면적으로 그가 어떤 일을 했던지 간에 결국 그는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섰을때 그가 내부적으로 추구하던 것 즉 그의 종교적 열성, 진리찾기의 노력이 외부적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간디도 나는 진리를 찾고 있다라고 하지 나는 진리를 찾았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설사 진리를 이미 찾았다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걸 읽으면 우리가 진리를 찾았고 아 인생의 의미란게 이런거구나하고 깨달았으니 이제 인생을 살기를 시작해 보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갈까라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는 시간을 가졌던 사람과 그런거 없이 살았던 사람이 꼭같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오늘날 그러하다. 오늘날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면 변화가 빠른 세계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 개개인을 어떤 커다란 세계의 일원으로 살 것을 요구하기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어디 지방 도시의 한 사람으로서만 살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서울을 봐야 하고, 동아시아를 봐야 하며 세계를 봐야 한다. 

 

FTA라던가 환경문제라던가 부동산 투기라던가 체인화된 기업형 슈퍼들, 식당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과학자도 경제난이 당장 심각한 문제를 만든다. 과학연구도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많은 돈이 든다. 정부예산은 복지에 써야 하는가, 과학에 써야 하는가 아니면 전쟁에 써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누구 아빠 누구의 남편이라는 것만으로 살 수는 없다. 세상을 봐야하고 느껴야 한다. 마을 앞의 늪지는 없애도 좋은 것인가 아니면 당신 그리고 나아가 그 지역인의 삶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가치있는 것인가. 그건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신경쓰지 않아도 정말 좋은 것일까? 조선시대라면 멀쩡한 강이 한두해만에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요즘에 비하면 내 일만 신경쓰고 살아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 4대강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문제는 내버려 두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한두해만에 만든다. 동네에 이마트가 들어오니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를 실직자로 만들고 누군가에는 직장을 만들어 준다. 뭐가 무조건 나쁘다거나 좋다고 할수는 없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스스로 느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자라서 아버지가 하는것을 그대로 하고 사는 시대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아이들을 죽이는 사회라면 우리의 아이들은 88만원세대가 아니라 노예세대가 될지 모른다. 부모로서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면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믿는다면 누굴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맺는 말

 

이 문제의 해결이 어떤 한 칼에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이 문제해결의 과정은 문화운동적인 형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운동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근대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운동은 -지금 그런 것이 태동하고 있는가는 둘째문제로 치고- 과학적인 깊이를 결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과학적 깊이란 모든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라고 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 인생에 의미를 주고 있다는 인식적 변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섰다고 하자. 당신은 정말 과학자에게 조언을 구할 것인가? 한국의 정계에 과학자가 별로 없는 것은 그 답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이공계출신이 정재계에서 크게 활약하는 것과 대비된다. 

 

그렇다고 내 말이 단순히 이공계사람들을 국회로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내내 해온 소리는 실제로 한국에서 인문계는 과학적으로 무지하고 이공계는 가치판단의 문제에서 문제가 있다라고 한 말이니까. 과학적으로 무식한 정치인들이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공사를 하고 천안함문제같은 것에서 제대로 질문도 못하는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공계가 국회로 가면 이번에는 편협한 가치판단으로 힘도 못쓰던가 아니면 어떤 극단주의론자가 될지 모른다. 

 

일단은 대중부터, 사람들부터다. 우리는 종종 그저 돈벌이 방법으로 이해되고 마는 과학의 이미지부터 바꿔야 한다. 과학자였다가 스님이 되거나 신부가 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이런 사람을 찾으라는게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과학도이지만 인생의 의미에대해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 그게 제대로된 과학자의 모범이라고 나는 믿는다. 간디가 진리를 찾는 여행을 하던것이 외부적으로 표현된 것이 인도의 해방이듯이 과학자도 자기 내부의 질문을 위해 노력한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타이틀, 몇편의 논문이 중요한게 아니다. 뉴튼이 종교적이란 말은 이미 했다. 아인쉬타인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이 아니지만 지극히 철학적인 인간이었다. 우리에게는 '과학'적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문화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부분과 '과학'이라는 부분에 둘다 강조점을 두고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인간을 이상적 인간으로 믿는 사회가 될때 한국사회는 좀 더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 인간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우리를 보다 훌룡한 삶으로 이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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