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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배중률과 민족적 자존심

by 격암(강국진) 2011. 11. 28.

2011.11.28

머릿말

 

논리학에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이란게 있습니다. 이것은 A나 A가 아닌 것 둘중의 하나는 참이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면 여자라는 것입니다. 이건 규칙처럼 들리지도 않고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이 틀릴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엄격한 의미로 말해서 배중률이 맞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적이며 배중률은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만 맞는 것이고 그런데도 배중률을 기반으로 한 사고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 골치아프게 배중률인가. 

 

배중률을 부정하건 찬성하건 이것은 단지 매우 어려운 학문적 철학적 논쟁에나 관련된 것이며 보통의 일반사람이 일상생활에서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는가하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배중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배중률을 얼마나 믿는가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다른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중률은 민족적 자긍심과 겸손이 공존하지 못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 민족이 아니면 남의 민족이라는 생각은 세상을 나의 승리는 상대방의 패배이고 상대방의 승리는 나의 패배라는 식으로 보게 만듭니다. 배중률은 원조찾기 논쟁도 만듭니다. 온돌이나 김치가 한국것인가 중국것인가. 라면이 중국것인가 일본것인가. 한국은 본래 식민지였다는 주장에서 징기스칸은 중국인인가 아닌가 같은 모든 문제에 알게 모르게 배중률은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배중률은 왜 깨어지나

 

배중률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중간자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또렷히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이상적인 극한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산을 본다고 해봅시다. 그 산도 시간이 지나면 풍화되어 변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기에 산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수명에 비해 산이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가면 바다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도 이따금 생기지만 우리는 그 파도에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온갖 모양에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뭔가가 있다라는 것은 그것이 어느정도의 속력으로 변화하는가에 따라 주변과 분리해서 정의하는 문제입니다. 바위나 원자는 저기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근사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논리적 과학적 사고안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존재합니다. 뭔가가 부정확한 경계를 가지고 부정확한 정의를 가진 것일 때 그것은 논리적 대상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런 경우 과학은 그것을 구성하는 더더욱 작은 입자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을 찾습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것은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원자도 중력법칙도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근사적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학의 성공에 놀란 나머지 현실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과학이 꼭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 개념과 논리를 아무 곳에나 한계없이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좋은 예가 생명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들은 대개 우리와 소통하고 변화하는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발로 차면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원자와 분명히 다른 속성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서술한 물리학적 시각을 확장해서 적용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저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짧은 시간단위에서 보아도 매순간의 경험과 자기성찰을 통해 변해가고 있습니다. 한달후의 나는 내가 아니며,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기뻐하거나 걱정하는 나는 성적표를 보기 전의 내가 아니며, 심지어 어떤 뮤직비디오를 보기 전의 나와 본 후의 나도 다릅니다. 더 긴 시간을 보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의 수정된 세포에서 아이가되고 성장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환경과 내가 분리되어 행해질 수도 없고 행해진 것도 아닙니다. 나는 밥도 안먹고 본 것도 없이 무의 암흑속에서 홀로 존재하고 홀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바다속의 파도처럼 환경속의 일부로 그 환경과 뒤섞이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어느것도 또렷한 경계를 가진게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게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모든 것은 유령처럼 존재하며 희미한 경계를 가지고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중률이란 극한적인 상황에서만 잘 맞는 것이며 그 한계를 넘어 추구할 경우 현실과는 무관하고 지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배중률의 결과

 

배중률이란 이것을 이것이 아닌것과 또렷히 나눌수 있다고 전재하는 것입니다. 그런게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마치 오랜간 부부싸움을 해온 두 남녀에게 남편이 옳은게 아니면 아내가 옳은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문제를 보는 것같은 문제를 만듭니다. 부부싸움 이야기는 들어보면 대개 원조 이야기로 갑니다. 즉 아내가 이렇게 저렇게 한것은 남편이 이렇게 저렇게 했기 때문이고 남편이 그렇게 한것은 아내가 저렇게 했기 때문이고 하는 식으로 과거로 끝없이 올라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그러니까 남편이 먼저 잘못했네 아내가 먼저 잘못했네 같은 답을 찾는 것으로 부부싸움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지만 부부싸움은 논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논리로 끝난 것같은 것도 사실은 논리로 끝난게 아닙니다. 애초에 두 남녀가 온전히 논리적인 이유로 계산상으로 이익이라서 같이 산다면 그건 부부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경우 원래의 원인을 찾아헤매고 논리로 따지고 분별하는 그 행위 자체가 부부싸움을 만듭니다. 따지는 행위가 부부를 부부로 인식하게 만들기 보다는 점점 더 아내와 남편을 따로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 쇠구슬이 있다라던가 여기 수소원자가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기를 일종의 나르는 포탄의 궤도를 예측하듯이 하게 됩니다. 즉 인간이란 변화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저 인간은 이러저러한 사람이므로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도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로 이러저러한 판단을 하면서 움직인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론을 전개합니다. 홉즈같은 사람은 모두가 모두와 투쟁하는 세상을 부정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사회적 합의나 법률같은 얇팍한 것으로 세상이 통합될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배중률은 마치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마음과 물질을 나누는 이분법처럼 기본적으로 세상을 소통할수 없는 것들로 조각조각냅니다. 그리고 나면 싸움과 원망이 생깁니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을 몽고인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몽고인들에게 원한을 가져야겠지요.  몽고족에게 당한 것이 한민족이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복수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고밑에는 민족이라던가 나라라던가 하는 것을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사고가 있습니다. 

 

배중률의 대체

 

이 문제가 복잡하고 진짜 중요하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은 배중률의 부정이 결코 모든 것을 허무한 것으로 돌리는 회의론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편안하게 집안에서 티브이를 보고 소파에 앉아 있으면서 물질이란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이나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애초에 한국문화같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거나 보존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현실은 현실그대로 봐야 합니다. 현실이란 세상의 것들은 존재하며 다만 어떤 문맥에서 논하는가에 따라 희미한 경계선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수학기호처럼 뉴톤의 질점처럼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희미한 경계를 넘어 섞이고 변화합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살려고 버둥거리는 생명체처럼 모든 것들은 환경의 불확실성이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힘과 싸워가면서 존재를 유지합니다.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한민족이나 한국문화나 한국이라는 나라는 실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세상의 혼돈과 불확실성속에서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되고 적응되어온 실체입니다. 과학이나 음악등 모든 문화적 문명적 성과가 그러하듯이 그런 것들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감당할수 없는 불확실성에 노출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어가서 사는 집입니다. 물론 그것이 모두에게 좋기만한 집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뱅이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없이 태어나며 어떤 사람은 머리가 무척 나쁘게 태어납니다.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한국인들이 모두 똑똑하고 정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다른나라가 그런 것처럼 한국 사람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으며 말이 통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 안통하는 것을 넘어 치료해줘야할 수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복합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걸 단순하게 한국이 있다. 한국인은 좋은 사람 하는 식으로 말하고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남의 자리를, 남의 팔자를 부러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배중률의 저주를 통해 그것이 타인이나 타국에 대한 부정이되거나 혹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부정으로 번져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모두 공존하는 것입니다. 기쁜일도 비극적인 일도 너때문인 동시에 나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섞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단지 이순간 이자리에서 우리가 응당 해야 할것,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우리앞에 놓인 우리몫의 음식을 먹을 뿐입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누적된 세상의 흐름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할수는 없습니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일본인도 확고히 존재하면서 또한 경계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결코 우리의 삶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게는 내 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가정을 지키는 일에 대한 것이며 한국이라는 사회가 외국사회와 어떻게 공존할까에 대한 일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다문화 문제로 점점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배중률의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두개의 선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키면서도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배중률에서 해방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를 저주하게 되겠죠. 무의미하게 천년전 이천년 조상이 뭘했나를 따져가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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