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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미신과 과학과 삶의 의미

by 격암(강국진) 2012. 5. 2.

2012.5.2

21세기는 눈부시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이며 과학의 한계가 들어나기 시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양자역학, 괴델정리, 상대성이론, 비유클리드 기하학등 여러 연구결과들이 널리 알려지고 컴퓨터와 뇌과학이 발달했다. 그러면서 실체나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이 일기 시작했고 아직도 그 여파는 정리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같다. 세계 최고의 과학선진대국인 미국이 동시에 세계 최고의 종교적 국가라는, 관점에 따라 기묘한 현실은 일정부분 이 혼란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물론 매우 종교적인 국가라고 할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의 절반은 이 작은 한국에 있다고 한다.- 한국에게도 중요한 사실이다.  

 

미신을 믿는 사람, 과학을 믿는 사람

 

이 세상에는 종교적 맹신자가 있고  과학적 맹신자가 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 증거에 대개 관심이 없고 무슨 기괴한 책에 써있다거나 어떤 권위가 의심되는 종교적 지도자의 직관적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아주 깊다. 과학적 맹신자는 지금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결과들에 대한 믿음이 아주 깊어서 그것과 다른 해석은 전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쿤의 패러다임식으로 말하자면 기존패러다임에 대한 맹신자들이다. 

 

과학적 맹신자와 미신의 맹신자들은 비슷한 데가 있다. 과학적 맹신자들은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미신을 믿는 사람으로 부른다. 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미신을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과학적 맹신자들은 기괴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예를 나열하면서 그들을 비판한다. 마치 그것으로 과학적 맹신자 클럽에 가입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과학적 맹신자로 부른다. 그들이 그들의 미신을 증명하는 방법은 주로 어떤 과학적 사실에 대해 부정적인 증거를 나열하고 따라서 과학이 불확실하므로 자기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진화론을 공격하면 창조론이 증명된다고 생각하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설사 진화론이 틀린다고 해도 이 세상에 가능한 이론이 두 개밖에 없다는 기본가정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짜장면이 나쁜 음식이라면 모두가 짬뽕을 먹어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는 식의 엉터리 논리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학적 맹신자나 미신의 맹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역시 다른 선택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애매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것은 논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못했을 때 뿐이다. 그들이 뭔가의 이유로 어떤 논쟁에 노출되게 되면 그들은 금새 양극단의 태도로 끌려간다. 

 

미신을 믿는 사람의 문제

 

나는 종교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 끝에 나는 신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런데 신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몰라요라고 답한다고 하자. 그럼 이 사람은 도대체 뭘 믿는 것일까? 물론 신이란 주제는 우리가 아무리 깊히 고민한다고 해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주제일수 있다. 그러나 고민과 고민을 한 끝에 이런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신을 모른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아무런 고민과 노력없이 대놓고 처음부터 모른다고 포기하면서 스스로를 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 헌금 꼬박꼬박내고 기도하다가 방언이 줄줄 나오면 그게 신앙인이고 절에서 천도제 한다고 아들이 대학붙게 해주고 우리집안 돈많이 벌게해달라고 돈받치면서 기도하면 그게 신앙인일까? 그건 마을 앞 성황당 나무앞에다가 물떠놓고 기도하는 것 보다도 신앙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과학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흥분되게 읽어야 한다. 왜냐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이 세상이 이러저러하다는 결과를 발견한 것이니까. 이 세상의 진실을 부정하면서 그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부모말이라고는 하나도 듣지 않고 매일 같이 부모 속만 썩히고 사고만 치고 다니는 자식이 동시에 나는 부모를 사랑한다고 매일 말하는 것처럼 기묘한 광경이 아닌가? 부모가 그런게 아니라고 뭔가 말해주려고 하면 나는 부모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부모말을 듣기도 전에 그런건 다 알아, 시끄러워 하는 꼴이 아닐까? 우리는 무지하다. 그런데 어떻게 신이 이 세상을 만든 진실에 대해 그렇게 다 안다고 자신만만해 할 수가 있는가. 과학이란 가장 엄밀하고 가장 방대한 노력으로 쌓아 올린 세상에 대한 관찰기록이다. 그걸 부정하는 신앙인이란 기묘한 신앙인이다. 과학도 모르면서 자기는 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맹신자의 문제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는 과학적 맹신자라는 단어 자체에 의혹감을 가지는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왜냐면 과학은 그냥 진실인데 그걸 어떻게 맹신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과학은 절대 최종적 진실이 아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이미 과학적 법칙은 모두 발견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소한 문제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미래의 과학은 19세기의 과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식한 농부나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대학교수고 저명한 과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과학적 맹신자다. 이런 예에서 스스로 나는 뭘 맹신하지 않아라고 자신만만해 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조심해야 할것이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비교는 과학은 최종적 진실이며 수정이 있다고 한들 작은 차이만 있을 거라는 즉 작은 개선만 있을 거라는 생각이 착각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것이 예를 들어 뉴튼의 방정식이 지금은 틀린가? 뉴튼시대에 대포를 쏘면 뉴튼 방정식대로 움직이다가 지금은 다르게 움직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지금의 과학은 아주 작게 바뀔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크게 바뀔 수는 없다는 착각에 빠지고 과학을 최종적 진실로 믿어버린다. 

 

양자역학에 대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양자역학이란 양자효과라는게 보여질 수 있는 아주 아주 작은 세계에서나 고전역학과 다른 것으로 그 영역을 벗어나면 고전역학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일상생활과 양자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보라고 말한다. 태양은 핵융합에 의해서 에너지를 내뿜고 그 에너지가 있어서 지구에 생명체가 있을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원자는 저런 핵융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별의 찌꺼기다. 그게다 양자이론 없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 일상과 양자이론은 상관이 없다고? 

 

그것뿐인가 쉬뢰딩거는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고체라고 부르는 것에서 DNA의 분자적 안정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자적 효과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즉 양자적 효과가 만들어 내는 물질의 안정성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모두 물렁물렁한 것들이었을 것이고 DNA는 마구 돌연변이를 일으켜 생명은 존재할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살아있는 당신은 우리의 일상과 양자이론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일단 양자이론이 나오자 우리는 그 이론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의 현실이 어마어마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묘한 것은 그렇게 되기전에는 사람들은 이제 풀려야할 비밀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걸 주목해야 한다. 과학적 맹신자들은 스스로 나는 과학을 믿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말하자면 양자역학의 출현을 막는 과학발전의 방해자들이다. 

 

19세기의 과학적 맹신자들에게 전자는 파동인 동시에 입자라는 말따위는 말도 안되는 미신으로 들렸을 것이다. 실제로 양자역학 발전의 역사에서 모든 아이디어는 다 현실감 없는 미친소리로 들리곤 했다. 물론 단순한 미신과 과학혁명의 차이는 과학적 발전은 논리와 실험결과에 근거하여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산처럼 데이터를 쌓아도 그 데이터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저절로 만들어 주는게 아니다. 거기에는 비약이 있고 전의 패러다임으로 말할 때는 미친소리가 되는 것을 믿어보는 믿음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일단 과학적 비약이 성공하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렇게 중요하고 많은 것들이 실은 생각도 안해보고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미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과학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과학과 삶의 의미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헤맨다. 항상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청소년기에는 대부분 그렇고 살다가보면 이따금 그 문제로 돌아올때가 있다. 이런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갈림길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곳에 도달하고는 하는 것같다 (나는 거기 갈림길같은 것은 없다고 믿지만 즉 갈림길처럼 보이는 것은 환각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하나는 종교적 독단론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찾는 길이고 또하나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 두 길은 대개의 경우 미신을 믿는 엉터리 신앙으로 가거나 과학적 맹신자가 되게 하지 않으면 그저 어정쩡한 혼동상태만 만든다. 독단적 신앙을 받아들이자니 그것은 지나치게 애매하고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과학에 의존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에 의존하는 것과 비슷하게 대개는 복잡한 이야기가 줄줄 나오는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다가 끝이나고 만다. 

 

예를 들어 누가 최신의 물리 이론인 초끈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그 책을 읽는 일반독자는 그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신화처럼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건 과학이니까 믿어라고 하는데 뭔가 너무나 많은 것을 내가 직접 확인해 보지 못한채 믿는다는 점에서 미신을 믿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전체를 다 보고 있다는 것을 누가 확신하는가. 엉터리도 많다.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운운하면서 과학을 가장하고 미신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모르는 것을 과학을 가장해서 아는 것으로 말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 과학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철학책도 마찬가지다. 한권도 어려운데 철학사를 줄줄이 훓으면서 이런저런 철학자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머리만 아플뿐 이게 도대체 내 삶에 어떻게 도움을 준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그나마 전공해서 많이 공부했다는 철학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대개는 또 초끈이론이나 양자역학 이야기듣는 식이 된다. 말하자면 랑시에르의 무슨 이론에 따르면 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여러가지 생소한 철학적 관념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에 기가 질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디서도 삶에 도움이 될만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도움따위는 얻지 못하고 그저 어정쩡하게 서있게 되기 쉽다. 이런 현실은 이 세상에 미신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과 과학적 맹신자들이 너무 많기에 악화되는 것같다. 

 

과학자로서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첫째로 미신은 미신이다. 진지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근거도 없는 미신은 가치있는 신앙이 아니다. 나는 유명한 교회나 절에 다니니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과학과 철학등 비종교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이성에 철저하지 않는 종교는 거기에 어떤 간판이 붙어있던 미신에 가깝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고민하기엔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종교적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어느정도나 지적으로 성실한가.

 

두번째로 과학 자체는 삶의 의미를 밝혀줄 수 없다. 복잡한 지식을 얻는 것은 가치가 있지만 그 안에 답이 있다고 허겁지겁 공부하거나 주눅들 필요가 없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제 아무리 기기묘묘한 이야기를 해도 과학적 논의가 끝에 가서 삶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처럼 나온다면 저자는 그 중간 어디에선가 뭐뭐는 뭐뭐이다에서 뭐뭐는 뭐뭐해야 좋다라던가 뭐뭐해야 한다는 가치명제로 비약한 것이다. 그건 과학이 아니다. 유명한 과학자가 비싼 실험기자제와 어려워 보이는 방정식으로 당신의 삶의 의미를 밝혀낼 수는 없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으로는 그렇다. 

 

가치를 논하는 과학적 논증의 한가지 문제

 

글을 하염없이 길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가치의 문제, 의미의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과학적 증거를 쓰는 나쁜 사례중의 하나를 간략히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해보자. 다음의 문장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백명의 비만인 사람들이 전부 살을 20킬로그램씩 감량했더니 모두 삶에 대한 행복감이 크게 증대했다는 과학적인 관측이 있었다. 

 

이것은 실험이고 관측의 기록이므로 과학적 사실처럼 보인다. 아니 과학맞다.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만인 사람들에게 행복해 지고 싶으면 살을 빼라고 권할수 있으며 이것은 좋은 삶의 지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따라서 삶의 의미는 살을 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할수 있을까? 행복하다는 상태는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있는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라고 해석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을 빼는 것이 삶의 의미다라는 비약이 가능할까? 

 

이것은 내가 조잡하게 만들어 냈을뿐 아니라 관측과 결론이 매우 직접적으로 이어져있으므로 무리하게 들린다. 그런데 사실 과학적 사실들을 무지 길게 늘어놓고 이런 저런 그럴듯한 말들을 집어넣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 논리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은 것들을 하면서 과학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 냈다고 말하기 쉽다. 통계적인 관측을 통해 인간이 어떤 때 행복감을 느끼고 어떤 때 삶의 의미를 느끼는가 하는 사례를 줄줄이 늘어놓은 다음에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삶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라고 결론 내는 것이다. 그런 결론은 대개는 유익하다. 살을 빼라던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라던가, 때로 우리의 진화가 이뤄졌던 장소인 숲같은 곳에 가라던가 하는 조언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어느정도 도움을 받을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삶의 의미를 밝힌 것이라는 주장,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를 밝혀냈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위험하다. 돼지는 멍청한 동물이므로 먹을 것을 많이주고 쾌적한 우리를 만들어 주면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돼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기본가정에서 출발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정쩡한 과학적 행복론은 하나의 작은 방과 같아서 우리라는 단하나뿐인 존재가 그 방을 흘러 넘쳐나가게 되면 붕괴한다. 그런데도 과학이니까 라는 이유로 그 행복론을 맹신하면 그 맹신이 더 큰 불행과 허무를 불러올수 있다. 우리는 성형중독에 빠져서 인생을 망가뜨리는 사람의 경우처럼 될 수 있다. 어떤 방법에 대한 맹신은 다른 쪽으로 눈을 어둡게 한다. 

 

그럼 길은 없다는 말인가. 

 

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문장은 적절한 설명과 배경끝에서 즉 적절한 문맥안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또한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에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나도 삶의 의미를 찾는 여행을 했었으니까. 

 

우리는 두가지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같다. 하나는 자라나는 생명으로서의 우리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자라지만 정신적으로도 자란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아직 온 세상을 다 보지 못한 작은 씨앗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다. 그런 우리가 삶의 의미라는 최종적 진리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걸 한번에 어디선가 발견하겠다는 생각은 무리다. 

 

말하자면 종교적 서적에서건 철학책에서건 과학책에서건 우리는 때로 그걸 찾는다. 두꺼운 책이 가득꽃힌 서가를 보면서 저 책을 전부 읽고 이해하면 나는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을텐데, 저기 위대하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걸 아는 것 같은데 나도 빨리 저걸 읽어서 그걸 이해해야지하는 식은 무리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걸 다 읽지 못한다. 인생만 소비할 뿐이다. 게다가 설사 그걸 다 읽어도 거기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서있는 장소에서 한걸음씩만 성장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성장의 3단계 주기가 있다고 말한다. (자세한 것은 여기에 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307). 주기가 있다는 것은 성장이란게 단순히 마구 양적으로 커지는 직선적인게 아니라 양분을 빨아들이면 그걸 정리하고 내면화하는 단계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내적인 갈증이 생기면 다시 양분을 빨아들이고 정리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단계를 열단계나 백단계쯤 앞서가서 가보니 이게 답이더라라고 말해준다고 한들 중간 단계를 뛰어넘어봐야 답이 안된다. 성철스님이 인생의 최종적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들 빈 방에서 혼자 산은 산 물은 물 외우고 있어봐야 되는건 없다. 과학도 철학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읽다가 마음속에 의문이 생기면 더 정보를 집어넣기 보다는 책을 덮어야 한다. 

 

두번째는 좀 개인적인 흥미를 위한 메세지고 과학적 맹신자들에게 주는 메세지다. 나는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물론 이제까지의 과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는 모른다. 미래에는 과학이란 무엇인가의 정의 자체가 달라질지 모른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철학의 재구성에서, 양자 역학의 대가였던 과학자, 어윈 쉬뢰딩거는 정신과 물질에서 각각 전통적 서구과학은 그 근본에서 부터 재구성되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도 과학이나 철학을 재구성해 낸것은 아니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한두줄로 설명할수는 없지만 그 근본에는 주체가 실종된 이분법적 시각이 근본이된 서구과학에 대한 고민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문들이란 다 철학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갈라져 나와서 더 전문화되고 커졌다. 그래서 어머니인 철학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 철학무용론이 퍼지게 될 정도다. 그러나 글쎄 누가 알겠는가. 갈라져나온 것이 다시 합쳐져서 우리가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학문적 전통이 생겨날지 말이다. 결국 내 말은 과학적 맹신자들이여 과학을 믿지 말아라라고 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가치를 제대로 믿으라는 이야기다. 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이 과학의 전부일거라고 믿는가. 과학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발전하고 자신을 재정의 하고 있는 것이니까.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서 재미있는게 과학이다. 과학이 뭔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백년뒤의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과학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과학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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