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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물리학과 생물학의 차이

by 격암(강국진) 2012. 5. 9.

2012.5.9

과학 연구나 탐정소설에 나오는 추리들은 건물을 쌓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연구는 바닥을 뚫어서 더 근본이 되는 토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어떤 연구는 주어진 토대위에 더 많은 증거를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쌓아올려서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럴까하는 생각에 잠긴다. 알아보니 그 친구는 계속 짖어대는 옆집의 개때문에 잠을 잘 못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는 왜 계속 짖어댈까. 조사해보니 그 옆의 옆의 집에서 한달전부터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 개는 고양이가 온 후부터 짖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개는 고양이를 보면 짖는 버릇을 가진 것같다.

 

여기서 고양이를 보면 짖는다 -> 개가 계속 짖어댄다 -> 친구가 잠을 자지 못한다 라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나온다. 위에서 설명한 것을 말하자면 토대를 더 튼튼히 하는 것은 계속 질문해 나가는 것이다. 왜 개는 고양이를 보면 짖을까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해진 토대위에서 현상을 설명해 나가는 것은 친구가 잠을 자지 못한다라는 현상을 고양이를 보면 개는 짖는다에서 출발해서 그 옆집의 개가 고양이를 보고 짖은 것이다라는 단계를 만들어 넣어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의 예도 들어보자. 물리학의 한분야에는 통계물리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19세기까지의 열역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대체한 학문이다. 열역학에서는 열이라던가 압력이라던가 하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통계물리학에서는 열이란 무엇인가, 압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원자적 작은 세계의 법칙에서 설명해 낸다. 예를 들어 뜨겁다라는 것을 입자의 운동이 활발하다라는 개념으로 설명할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구조를 가지는 것은 모든 과학이 이렇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과학에는 물리니 생물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까? 연구의 대상이 달라서라는 답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옳지도 않다. 뭔가를 물리학적 연구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논리적 엄밀함과 근거의 튼튼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과학적 연구도 무한히 물어가는 왜를 감당할 수는 없다. 다시말해서 과학의 근본에는 우리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수학의 공리같은 자연의 법칙이 있다. 그러므로 철학이 그러하듯이 물리학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것들을 그냥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학문일 수 밖에 없지만 물리학의 경우는 그것들이 상당히 상식적이고 원천적인 것이라 우리는 그 원리들에 대해 깊은 믿음이 있게 된다. 

 

그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는 느낌은 말하자면 가장 원천적인 원리를 파고 든다는 느낌이 아니면 대단히 튼튼한 증거위에서 그 논리적 결과를 공부하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생물학과는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력의 법칙은 우리가 아는 어떤 세계에서도 다 통용된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우리는 지구 이외의 장소에서 생명을 발견한 적이 없다. 

 

생물학은 DNA의 발견이후 매우 물리학적인 연구처럼 변했다. 그전에는 그저 여러가지 동물이 있으면 그 습성을 조사하고 분류하는 일이나 했던 분야가 DNA라는 고분자에서 시작해서 여러 생명들이 왜 이런저런 습성을 가졌는가를 설명할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DNA라는 것도 물리학의 근본원리와 비교하면 그렇게 튼튼한 조건위에 올라서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DNA라는게 있다에서 출발해서 계속 논리적 결과를 쌓아올려갈수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이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왜 DNA가 만들어 졌을까, 생명이 탄생하는 조건은 무엇이고 DNA가 변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 부분에 이르면 이런 저런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설명이 확률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애매해진다. 나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진화의 법칙이란게 뉴튼의 법칙이나 양자역학같은 것과 비교하면 훨씬 정성적인 것 즉 정확한 예측을 할수 없는 법칙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때문에 칼 포퍼는 진화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의 일부라고 말한다. 많은 증거는 진화의 존재를 말하지만 그 이론은 지구와 조건이 꼭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에 인간이 없다고 해도 틀리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과학이론으로서의 검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반증가능성이 없다. 

 

물리학의 문제 나아가 생물학의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분야가 제한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물리적 법칙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쉬뢰딩거방정식만 있으면 내일 주가가 오를지 말지, 그녀가 내 청혼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말과는 너무나도 큰 거리를 가지고 있다. 설명의 중간단계를 채워넣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리적 분석은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무능하고 복잡한 시스템의 대표가 바로 생명이나 사회다. 

 

그러니까 생물학은 물리학보다 훨씬 불안하지만 우리가 연구하려고 하는 대상과는 훨씬 가까운 토대위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계속 물리법칙에서 출발해서 토끼의 귀는 왜 긴가를 설명해 내려고 하면 아무 결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훨씬 훨씬 상위의 토대 예를 들어 토끼의 조상의 귀는 이랬다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 그 토대를 더 아래로 내린 것이 모든 토끼는 DNA를 가지고 있다가 된것이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 물리학이 한덩어리의 결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생물학은 여기저기 구멍이 마구 뚫려있는 상태이다. 즉 DNA에서 출발한다고 우리가 모든 생물학의 문제를 풀 수 있는게 아니다. 뇌과학분야로 오면 그것을 잘 느끼게 되는데 수없이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그것은 모두 뇌에 관련된 것이며 과학자들은 서로 같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서로를 연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로가 연결된다는 것은 물리학이 양자역학을 통해 화학과 융합되는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지과학도 신경세포의 생리학을 연구하는 사람과 분명 관련이 있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논리적 원리적 간격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어붙일 수 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아직 각자 따로 존재한다. 

 

이건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다. 좋은 소식인 것은 그것은 그만큼 생물학분야에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20세기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온갖 분야에서 생물학분야로 진출했다. 이것이 나쁜 소식인 이유는 생물학이 어쩌면 금방 해결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천년전에도 뇌에 대한 이론이 그리스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오늘 기준으로보면 턱도 없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뇌는 일종의 펌프로 여겨졌고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믿어졌다. 물론 신경세포 즉 뉴론따위가 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잠재적 공포는 우리가 몇백년 후 똑같은 비웃음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뭔지, 뇌가 뭔지에 대해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진정한 돌파구는 한 천년쯤 지나야 나올 수도 있다. 당신이 과학자가 아니라면 그래도 좋아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좋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고 직장을 찾아야 하는 과학자라면 천년후에나 풀릴 문제를 자기가 풀고 있다는 생각은 악몽중의 악몽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관적이 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생물학의 유용성을 따지는 문제에 도달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앞에서 말한 잠못자는 친구로 돌아가보자. 어떤 사람은 개가 왜 고양이를 보면 짖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 계속 필요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친구의 수면부족을 해결하려면 그 중간단계 하나만 알아도 해결이 가능하다. 즉 고양이를 치우거나 개를 치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치매나 무도병의 진정한 이유라던가 인간 수명이 왜 백년밖에 안되는가에 대한 근원적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사건들이 일어나는 연쇄고리를 살피고 그 연쇄를 끊기만 하면 혹은 어떤 효과를 증대시키기만 하면 우리는 병들을 고치거나 인간수명을 늘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것은 철학으로서의 과학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고 기술의 차원에 가깝지만 누가 그 유용성을 부인할 것인가. 

 

그래서 물리학전공자는 생물학 실험실에 가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때로 큰 지루함을 느낀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는데 생물학자들은 전체 설명의 아주 일부에만 매달리는 것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왜라는 질문은 뒤로 물러나고 그저 반복적인 시도에 의해서 왜그런지 몰라도 이게 되더라라는 결과를 뽑으려고 하는 것같다. 물리학에 비하면 생물학은 철학으로서의 과학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이 부분은 설명을 조금 더 해야겠다. 생물학 하시는 분들에게 지적받는 이유가 되니까. 첫째로 나는 생물학이 물리학보다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물리학과 생물학에 문화적 차이가 있어서 물리학에 익숙한 생물학초보에게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로 생물학이라고 했지만 사실 분자생물학분야는 물리가 화학과 잘 구분안되듯이 화학과 잘구분이 안되는 분야다. 그말은 그만큼 엄밀하며 어떤때보면 생명의 연구라는 것이 그냥 물질의 연구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동물이나 곤충의 행동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특히 원숭이같은 고등생물을 연구하는 경우- 생물학 연구는 엄밀성을 달성할 수가 없다. 달성한다해도 별로 실용적이지 않다. 즉 실험실에서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 행해진 어떤 것은 바깥 일상생활과 다르기 때문에 수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가 완전히 풀리지 않고 물리학도가 보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예를 들어 실험실의 원숭이는 실험실에 누가 있는가에 따라 뇌활동이 달라진다. 그러니 이런 조건에서 뇌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엄밀하게 하기 어렵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실제상황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반면에 아메바나 파리를 연구한다면 고립계를 만드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므로 연구는 보다 엄밀해지기 쉽다. 세째로 결국 생물학의 최고문제는 인간의 이해다. 파리나 아메바는 그 자체로 이해할가치가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생물인 이상 결국 고등생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앞에 말했듯이 고등생물에서 엄밀하게 제한된 조건이라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므로 생물학은 어려운 문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거 누가 따져 실용성이 전부지라고 쉽게 말하는 분이 있다면 이런 면에 대해 생각보라고 하고 싶다. 만약 실용실용만 따진다면 애초에 물리건 생물이건 공부해서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연구하고 있는게 실용일까? 금융회사 가서 돈을 주무르는 일에 종사하는게 실용이 아닐까? 과학을 연구하기로 한 사람은 어떤 의미로 실용을 뒤로 하고 나름대로의 철학적 지적 추구의 욕망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실용이 전부지라는 논리에 너무 빠지면 결국 과학자체를 할 사람이 없다. 

 

물리학은 넘기에 너무 큰 벽에 빠져있는 것일 수 있다. 사실 수많은 천재들이 물리학이 과학의 왕이었을때 연구결과를 누적 시켰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생물학은 좀 더 쉽게 과학적 연구의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인데 나중에 보면 공장직원으로 단순노동하는 것 비슷한 일을 하고 있게 되기 쉽다. 단순작업은 어느 분야나 다 필요하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단순작업이 과학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렇게 글로쓰면 자명한 일인것 같지만 연구실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배우다보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주변사람들이 다 그런 경우에는 문제의식이 실종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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