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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과학의 재구성

by 격암(강국진) 2012. 5. 18.

2012.5.18

철학자 존듀이와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각각 그들의 책 철학의 재구성과 마음과 물질이라는 책에서 현재의 과학은 불충분한 것이며 그것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듀이나 슈뢰딩거가 지적하는 것은 모두 이 세계의 객관적 존재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즉 객관성이라는 것이 과학의 근원적 문제인데 이 객관성이라는 것이 과학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므로 이것을 극복할수 있어야 진정 혁명적인 과학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존듀이의 경우는 인식의 되먹임과정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세계를 수동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렇다고 세계는 우리가 맘대로 주관적으로 창조하는 것도 아니며 세계와 우리는 인식과 행동의 되먹임과정속에서 서로를 창조해 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슈뢰딩거의 경우는 주체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듀이의 문제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객관성을 만들어 내기위해 주체를 지워버린 세계를 창조했으며 슈뢰딩거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에서 마음이나 인식의 근거를 발견해 낼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은 왜 재구성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지적은 단순히 현학적으로 현재의 우리가 가진 과학적 견해의 철학적 근원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문제가 있는 철학으로 만들어 지는 세상이 그 모순을 누적시켜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이 모순을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순이 무엇인가를 존듀이는 역사상있었던 두번의 혁명에 대해 말함으로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혁명과 베이컨의 과학혁명인데 두 경우 모두 어떤 시스템의 누적이 문제가 됩니다. 즉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오래되면 그것이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런 누적이 오래되면 한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체계가 만들어 집니다. 그럴 때 사회적 부패가 진행되고 불합리가 진행되어도 개인은 저항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교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대하게 쌓아올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가능한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게 되고 그 안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자는 과학의 기본적 태도는 터무니없는 미친 짓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주자의 학설이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시대에 누군가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과거의 혁명에 대해 말하면서 과거에는 그런 광기가 있었으나 우리는 이미 그 광기를 모두 벗어버렸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예를 들어 과학은 어떤 광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듀이와 쉬뢰딩거는 그 반대로 우리는 벗어야 할 광기가 있으며 과학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인간의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마찬가지로 누적되어진 시스템이 불합리한 짓을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재구성.

 

그렇다면 그 과학의 재구성은 무엇이며 그게 정말 가능이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객관적이지 않은 것은 과학이 아닌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재구성의 핵심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객관화의 포기입니다. 즉 실체라는 것은 없으며 우리는 각자의 패러다임 혹은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다만 그것은 무한대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즉 그 패러다임이나 관점이란 것은 나름대로의 정확성이내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며 패러다임은 바뀔 수도 있지만 두 개의 패러다임을 동시에 믿는다는 식의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객관을 포기한다라고 했지만 객관이냐 주관이냐라는 양자택일식의 인식도 사실 문제입니다. 그것은 아래에 좀더 쓰겠습니다. 

 

어느 패러다임이 옳은가하는 질문은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모든 패러다임은 자기기준으로는 옳고 다른 기준으로는 틀립니다. 다만 완벽한 패러다임은 없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이 패러다임의 자기완결성을 확인해 나갈때 하나의 패러다임은 때때로 깨어지면서 자꾸 다른 것으로 변해갑니다.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이라는 것이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우리가 이런 과학의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머리에 담고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예를 검토해보면 실은 이미 어느정도 듀이와 쉬뢰딩거가 말하는 과학의 재구성은 일어났다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만 보다 철저한 재구성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언제 왜 일어나겠는가 하는 것은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경우 둘다 나라는 주체가 문제의 시발점이 됩니다. 

 

상대성이론 이전에는 이 세상은 절대적 관성계라는 단일한 세계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며 같은 물리적 법칙이 관측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근본원리로 삼자 우리가 절대 관성계에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현상이 예측되고 후일 확인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 위에서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린다면 우리의 속력은 시속 150킬로미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개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정의될수 없으며 다른 관성계에서는 다른 사건을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양자역학의 경우, 우리는 유명한 쉬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주체의 생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편의상 고양이가 등장했습니다만 그것은 물론 사람이 대신 들어갈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방사선붕괴를 하는 물질이 독약을 내뿜게 만드는 장치를 만들고 친구 한명을 상자안에 넣습니다. 이런 경우 상자바깥에 있는 나는 상자를 열기전에 친구가 죽은 상태와 죽지 않은 상태가 중첩되어진 상태로 세상을 파악해야 한다고 양자역학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은 상자안에 있는 친구에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친구는 물론 자신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 친구는 살아있거나 죽거나 둘중의 한 상태에만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도 결국은 주체입니다. 객관성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주체를 지워버리고 만드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지만 관찰의 주체는 결국 생략될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객관을 포기한다라는 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것입니다. 아무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주관적 이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둘다 어떤 원리를 표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성계에 속하건 상자밖에 있건 안에 있건 과학법칙은 같습니다. 즉 주관적이면서도 상위의 개념에서 객관적인 법칙입니다. 이렇게 객관화의 포기란 단순히 주관이냐 객관이냐의 양극으로 이야기할수 있는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과학의 재구성은 뭘하게 되는가

 

위 두가지 이론을 포함하는 과학의 전적인 재구성이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객관성을 모든 분야에서 포기하는 것이며 지금의 과학을 객관성이라는 근사적인 상황에서 근사적으로 작동하는 과학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필요한가하는 질문일수 있습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단순히 철학적 사고로 인해서 탁자앞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술적 발전이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을 관측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것입니다.즉 빛의 속력을 잰다던가 원자의 구조를 파악한다던가하는 것입니다. 천년전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해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그 이론이 나오기전에는 무시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중요한 것을 가르쳐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99%맞는 이론을 99.9%맞는 이론으로 고친 이론 즉 어떤 보정항을 더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새로운 이론의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뉴튼역학만으로도 여전히 야구공이 어떻게 날아가는가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수 있으며 21세기에도 우주선을 쏘면서 양자역학을 풀어서 괘도를 계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이론을 이해 하고보니 우주의 기원과 구조라던가 태양과 물질의 안정성이라던가 하는 매우 중요하지만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분야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과학의 재구성을 하는 이론이 나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 상황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인데 알고보니 이해가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뇌나 정신, 윤리의 신비같은 것 말입니다. 

 

 과학의 재구성을 위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의 끝이 새로운 과학이론의 발표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적어도 지금의 제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몇마디를 더 쓰고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양자역학의 경우도 상대성이론의 경우도 그것들을 위한 실험적 증거는 어떤 인식의 한계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즉 엄청나게 작은 세계나 엄청나게 빠른 속력처럼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보고 찾아야할 영역이 어떤 영역인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극도로 떨어진 상황이죠. 이때문에 고에너지 물리학은 더 근본적인 원리를찾아서 한없이 높은 에너지 수준을 연구합니다. 실질적으로 실험과 관찰이 불가능할정도의 영역에 까지 가는 것이죠. 

 

그 이유도 분명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가 왜 그런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 우리의 사고 패러다임에 포함되어져있을 것입니다. 즉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과학이란 새로운 설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의 앞과 뒤에 서있다고 해봅시다. 물론 당신이 가지는 자동차에 대한 인식은 내가 가지는 자동차에 대한 인식과 다를 것입니다. 같은 자동차를 보는데 왜 그런가. 물론 당신은 자동차의 앞에서 보고 있고 나는 뒤에서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이것 자체가 사고 패러다임이고 설명이라는 말이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왜 당신과 나는 같은 것을 다르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설명이고 발명입니다. 그런 패러다임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일관성있는 설명을 가지게 되며 놀라는 일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의 수준을 넘는 영역으로 가면 우리가 가진 이 패러다임은 붕괴하고 구멍을 들어내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의 입자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며, 원인이 없는데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는 사실들 즉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진 패러다임, 따라서 우리의 일상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영역이 극단적 감각신호 환경의 변화가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빠르다거나 작은 세계가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은 감각신호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상당부분 정신병자의 세계일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지는 것은 인간문명이 과거와는 다르게 매우 추상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사실 백년이나 이백년전 사람은 오늘날처럼 전자화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사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자오락을 하는 것이 직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인터넷 포인트를 모아서 물건을 산다거나 하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러울 것이며 가상 캐릭터를 사랑한다거나 온라인상의 캐릭터들이 결혼을 한다는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터넷과 전자통신의 등장은 인류사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기록될것입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이죠. 인간은 전자통신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생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감각의 예는 무한히 있습니다만 지면상 재미있는 유체이탈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통상 우리가 이 육체에 속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실험에 따르면 이런 감각은 적응의 결과로 금새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네킹을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마네킹의 손을 만집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손을 똑같이 누군가가 만집니다. 그 과정이 지속되면 우리는 우리의 손과 그 마네킹의 손을 혼돈하게 됩니다. 즉 내 손이 실제로 있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 마네킹의 손이 있는 위치에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효과를 더 크게 하면 우리는 아예 유체이탈처럼 실제 몸은 여기에 있는데 다른 곳에 내가 있다고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안경을 써서 세상의 위아래가 뒤집어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안경을 쓰면 우리는 일상생활을 잘 못하지만 얼마안되서 거기에 적응을 합니다. 그래서 뒤집어진 세상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 감각적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비윤리적인것이라 실험은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는 원리적으로 스스로를 쥐나 자동차라고 믿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실험들을 통해 보이는것은 인간은 적응력이 있다라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가지 예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경험치를 학습하는가하는 학습룰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학습룰은 뒤집으면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우리가 보는데로 보는가에 대한 설명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 몰랐던 사람이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자신의 색안경이 가지는 특색을 이해하고 왜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실체라던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줄 수 있을것입니다. 예를 들어 근본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 혹은 모든 실체는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보다 엄밀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식의 너머에는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이 불확실성은 우리의 실체세계에서는 제거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식의 한계고 인식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과학은 말하자면 개미나 메뚜기가 연구를 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줄거라는 과학입니다. 중력의 법칙이 개미나 메뚜기에게는 다를 리가없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의 과학이란 인식의 과학이고 따라서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특징이 그 안에 들어가야 할것입니다. 인간이란 생명이며 생명이란 정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즉 존재를 유지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것들이 과학의 내부에 근원적으로 통합될 때 우리가 생명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보다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좀더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견해를 가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맺는 말

 

이런 것을 포스트모던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 꼭 필요한 과학일 수 있습니다. 통상 과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지 않지만 저는 이런 생각보다는 과학도 정치사회적 요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치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과학이론은 등장한다고 해도 세상에서 크게 퍼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천년전에 양자역학을 만들고 2천년전에 뉴튼 역학을 만들었던 천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사라졌을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대로 쌀을 파는 쌀집에서 쌀알 하나 하나를 세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포스트모던한 세계의 정치사회적 위기 혹은 탈자본주의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는 결국 정신적 위기입니다. 어떻게 모두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수있는지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이죠. 추상적 시대에 수십억이 지구에 사는 시대에 공존의 철학이 요구됩니다. 그 시대에 포스트모던한 철학과 포스트모던한 과학이 나오는 것은 시대적 요구일 수 있습니다. 다만 시대적 변화란 그렇게 빠른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앞으로 몇십년 혹은 백년을 기다려 천재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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