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학

by 격암(강국진) 2012. 8. 30.

2012.8.30

우리는 오늘날 하나의 시기가 가지는 그 정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과학 기술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세계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에 대해 무한한 불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예측은 종종 완전한 천국이 눈앞에 있다는 낙관론과 지옥이 코앞에 있다는 비관론으로 갈라져서 극단으로 치닫기 일쑤다. 우리가 가진 정신적 문명에는 근원적 문제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되어 질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어떤 문제를 가졌는가를 생각하기 위해 두가지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1. 우리가 친구로 알고 있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한 사고로 그의 머리가 갈라지는 일이 생겼고 그 끔찍한 사고의 현장에서 당신은 더더욱 끔찍한 현실을 발견한다. 그의 머리속에는 뇌가 없었고 거의 텅텅 빈 머리속에는 간단한 전자부품 몇 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당신은 그가 기계이고 인형이며 100%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그 친구의 생명은 당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지만 그의 정체를 알아챈 당신은 이제 그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지 똑같이 대해야 하는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 그가 인간이 아니며 머릿속에 뇌대신에 간단한 전자부품이 들어있기에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뇌를 가졌지만 그는 간단한 전자부품을 가진 기계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천재 뇌과학자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뇌도 저 전자부품보다 약간 더 복잡할 뿐으로 그저 기계일 뿐이라고. 다른 인간도 결국 전자부품이 들어있는 기계와 다를게 없어. 우리는 모두 기계야.'라고. 이제 당신은 더더욱 깊은 혼란에 빠진다. 과연 인간의 가치란 무엇일까. 

 

2.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를 보면 가슴속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을 관찰하는 과학자 민수는 철수와 영희를 물질로 분석한다. 물질론자에 따르면 민수의 모든 것은 객관적인 물질의 운동, 몸속의 물질의 변화로 전부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철수 몸의 호르몬 변화와 머릿속의 신경전달물질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예측하고 알아내는 것이 과연 철수가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이해를 줄까. 백번 사랑에 대한 이론서를 읽었던 것이 과연 한번 사랑을 체험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었던가? 엄격한 물질론자는 말한다. 체험이란건 결국 환상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과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마도 그 정점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가치판단과는 무관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과학이 좋다 나쁘다는 느낌, 가치판단과 무관하므로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모든 체험이며 느낌이며 가치판단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과학의 왕은 오랜간 물리학이었고 많은 다른 학문들은 또다른 물리학이 되려고 노력해왔다. 경제학이나 역사학도 물리학처럼 엄밀한 관찰과 수치화를 통한 법칙을 찾고 예측을 하는 학문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경제학 법칙에는 인간의 감정이 없다. 멜서스의 인구론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을 가지지 말라고 말한다. 당신이 설혹 먹을 것이 남아돌며 너무 먹어서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굶어죽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너는 잘못이 없다. 그들의 죽음은 그저 어길 수 없는 법칙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천국과 지옥이 하늘과 땅속에 없다는 것을, 우리의 머릿속 어딘가에 영혼이 있을 자리가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좋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가치판단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빠진다. 프로이드가 잠재의식을 거론한 이래 많은 강간범, 폭행범들은 그들의 죄악은 그들의 탓이기 이전에 불행했던 어린시절이나 타고난 유전적 인자에 의해 생겨난 잠재의식의 폭력적 지배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인과론을 말하는 과학은 나아가 이성은 인간의 행복과는 무관하다.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대해진 이성문명의 그늘속에서 자신도 자신이 뭘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왔고 그것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의 질주는 인간의 행복을 똑바로 향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인간을 그저 더 많이 소비하면 더 행복해지는 어떤 단순한 존재로 격하하는 흐름위에 있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중세 말의 혁명

 

이것은 나같은 무신론자들만이 던질 수 있는 무례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의 행복과 관련이 있을까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행복을 기원한다는데 신이 인간의 행복과 무관해질수 있을까? 그런데 서구에서의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문제가 심각해지고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혁명적 변화가 있었던 시기가 중세가 근대로 변하는 시기이며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운동이 있었던 시기다. 이것은 과학적 혁명, 산업혁명의 시기와 한덩어리를 이루거나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혁명의 본질은 바로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인간중심주의 혹은 이성주의다. 엄청나게 누적되어진 관습적 믿음으로 인간을 압도할 지경이 되어버린 신에 대한 시스템을 벗어던진 것이다. 

 

우리는 중세의 종교이야기를 들을 때 지금의 현대인이 합리적이며 그들은 미신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이성적이라던가 합리적이란 말은 쉽게 쓰기 어려운 말로 과학이 세상을 뒤덮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이란 것과 그러기 전의 합리적이란 말은 차이가 있다. 중세의 눈으로 본 합리적인 세계란 오랜 시간 누적시켜서 구성해낸 신학적 사고의 결과들로 이뤄진 시스템이었다. 그것은 당연하고 움직일 수 없는 진리들로 구성되어졌으며 그것에 기반하여 사고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결과들을 일단 무시하고 직접 관찰하고 실험하여 사실을 확인한다는 오늘날에는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지는 과학적 방법이란 매우 불합리한 방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은 과학시대의 초기에 있었던 실험이란 것들이 대부분 불확실한 면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이해되지 못할일도 아니며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과학이 더 발전된 후 근세에 신에 대해 우리는 그런 가설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 라플라스같은 과학자가 등장한 것을 생각해보면 신중심의 사고가 당연시 되었던 시대에 과학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보였을까를 상상할 수 있다. 

 

사실 과학적 연구를 위한 여러 준비가 부족했던 시기에 직접 실험하고 관찰한다는 방법은 마치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맛있는 요리법이 있는데도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항상 새로운 음식을 처음부터 시행착오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처럼 불합리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실이 아닌 것도 그때에는 너무 당연한 진리여서 뭔가를 가정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세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오늘날같지 않아서 사실상 발전이란 없으며 기술은 항상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고 발전이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예를 들어 농사란, 본래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긴 세월을 통해 여러가지 권위를 통해 인정되어지는 진리를 의심하는 행위야 말로 가장 불합리한 사고방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과학을 의심하는 것이 터무니없어보이듯 말이다. 

 

그 의심하지 않는 진리위에 다시 진리와 설명이 쌓이고 의심할 수없는 그 이해의 전통적 시스템은 점점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체 시스템은 나중에는 그야말로 어떤 한 인간이 다 이해하기에는 지나치리만큼 거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관습적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을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중세시대의 일로 자주 거론되는 일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세의 학자들이 바늘끝위에 몇명의 천사가 앉을수 있는가와 같은 일을 토론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의 학자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사람이었나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보면 터무니없는 고민인것같은 그런 사실에 까지 고민이 가능할 정도로 중세의 세계관은 복잡하고 튼튼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즉 아주 많은 사실들이 중세에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권위에 근거하여 확실한것으로 믿어졌기에 그 연장선상에서 그런 고민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합리적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훗날의 사람들이 볼때 우리 역시 터무니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가지다. 그것은 오늘날의 과학시대를, 이성주의 시대를 만들었던 그 혁명은 바로 인간의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극에 다달았을때 그것은 복잡한 시스템이 되어 인간을 억압하게 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불합리가 사회전체의 효율을 깍아먹게 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럴때 우리는 낡은 시스템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다시 쌓아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과학기술문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의심할 수없을 때 그때가 시스템이 너무 지나치게 커버린 때가 아닐까. 우리는 이미 객관적 세계에, 우리 자신의 이성에 억압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 과학혁명이었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유령을 보는 것에 대한 두가지 태도

 

어떤 사람이 유령을 봤다고 하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꺽어진 골목을 휙 돌아서는데 구석에 긴머리를 하고 서있는 퍼런 얼굴을 한 여자를 있었다. 기겁을 하고 뛰어서 집문앞으로 돌아와서는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이런 체험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의 태도를 가질 수가 있다. 하나는 유령이란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유령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도 늘 유령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유령은 존재하지 않으며 착각에 불과하다, 그것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유령을 본 사람에 대해 제3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령은 없다. 너의 마음이 병들어 있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객관성은 무시하는 태도다. 누구나 유령을 보는게 아니라거나 유령의 객관적 존재여부는 무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유령을 봤다는 체험이다. 그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조건하에서 그런 체험을 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령을 본 사람에 대해 제1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령에 대해 그건 헛소리야라고 쉽게 무시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행복이나 사랑에 대해 말해보자. 그것들은 과연 유령과 다른 입장에 있는지. 당신의 개인적 행복감이나 사랑은 과학적으로 측정가능한 객관적 실체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현대의 과학은 혹은 이성은 그것을 가볍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제쳐둔다.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행복을 논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는 종종 인간이란 이러저러한 음식과 옷과 주택을 가지면 모두 같은 행복감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 기계라고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근원적으로 객관성에 기반하여 사고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조언하며 우리 사회는 이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실은 인간의 감정따위는 가장 빨리 던져버리고 개인적 체험따위는 가장 먼저 환상으로 여길것을 훈련 받은 사람일때 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그 안에서 인간은 정말 행복해 질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개인들에게 네가 잘못되어 있다, 너는 고쳐야 한다.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이 만든 옷에 네 몸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은 네 몸이라는 것이다. 환상을 버려라. 정신차리고 이성을 가져라. 그런건 세상에 없다라고 현대사회는 끝없이 말하며 결국 인간은 이러저러한 것을 가지면 -돈이라던가 높은 지위라던가- 행복하잖아.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체험, 느낌이 아닐까. 종교적 전통에 억압되어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하던 과학혁명의 전통은 어느새 비대화되어 개개인의 인간들에게 너의 눈으로 보지 말라. 객관성을 가지라고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모더니즘의 위기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된지 오래다. 

 

인간이 부품이 되는 것은 그가 단순히 어떤 시스템안에서 충실히 맡은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인간이 그 시스템이 보여주는 것, 들려주는 것이외의 것에 대해 듣지 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될 때, 스스로의 힘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될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는 무수한 방법으로 인간들을 옭아매고 있다. 우리들은 코가 뚫리고 매여져서는 어느새 소처럼 일한다. 거대 시스템 예를 들어 거대 법인의 입장에서는 생산성 재고라는 이름하에 일어나는 일은 뒤짚으면 개개인의 인간들을 미친듯이 일하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우리는 어느새 국가차원에서 이공계에 인적자원이 부족하니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익숙하다.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

 

이제까지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새로운 과학,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학이란게 있다면 그것은 1자적 시각을 강조하는 과학,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이어야 할것이다.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에서는 뭐가 객관적인가가 핵심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생명이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물리학에서는 예로 부터 논의가 역사도 감정도 없는 입자에서 시작되는 일이 많았다. 여기 이상기체 입자가 있다. 이 입자는 이러저러한 질량과 속도를 가진다. 그러나 모든 입자는 역사가 없고 감정이 없다. 그 내부가 없다. 우리가 사회를 개인이라는 입자로 이뤄진 시스템이라고 할때 우리는 자연스레 인간을 자동인형으로 만든다.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에서는 하나의 단위는 나름의 역사와 감각신호의 해석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객관성을 강조한 과학이 세상을 당구공들이 몰려다니는 곳으로 본다면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은 세상을 생명으로 가득찬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세상을 모두 다르게 인식한다. 전부 다른 역사를 가지고 다른 선입견을 가지고 세상에 대한 그들만의 감각신호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일한 단하나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것은 우리가 느끼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진실이나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와 세상이 서로 순환적으로 소통한 끝에 만들어낸 해석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결국 당신의 해석이 소중하다. 모든 것은 해석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물병을 보고 있다고 하자. 객관성을 강조하는 과학에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병의 어떤 성질 -예를 들어 어떤 표면의 광학적 성질-이 물병을 저렇게 보이도록 만드는가에 집중하지만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에서는 물병이상으로 어떤 내적인 기억과 선입견이 물병을 지금처럼 보이게 만드는가, 물병을 본다는 체험은 우리의 내부를 어떻게 바꾸는가에 집중해야 할것이다. 

 

 이와같은 것은 인문학적으로는 상식적인 이야기 인것같지만 과학의 세계에서는 아직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지 않다. 즉 객관적 세계는 역시 항상 이러저러하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와 관련되어 나는 두가지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작아 보이는 것이 사실은 작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현대과학의 성공을 보면 알 것이지만 객관적 세계가 존재하며 모든 것은 물질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단순히 부족하다거나 틀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훌룡히 세상의 것들을 설명해 낸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과학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 너무나도 작고 미묘한 효과에 대한 것으로 큰 변화를 만들어 낼수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역학을 기억해야 한다. 양자효과란 우리가 인간의 힘으로 체험할수 없는 아주 작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양자효과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DNA의 안정성을 만들어 내고 진화를 가능케한 에너지를 태양을 불태워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아는 현대 우주론이란 지극히 큰 것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지극히 작은 원자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작고 미묘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별차이를 만들어 낼 것같지 않은 것은 실은 본격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두번째로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과학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이나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모든 것은 형이상학이나 믿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도 우리는 어떤 형이상학적 믿음을 세우고 그것에 기반한 이성을 쌓아온 것이지 형이상학없이 홀로 객관적으로 서있는 학문은 없다. 

 

나는 무신론자라고 종종 스스로를 말하지만 그것은 편의를 위한 것일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뭔지 말해준다면 나는 내가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말해줄 수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문맥에서는 누구도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무신론자는 무신이라는 신을 믿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물질론자들은 의식이나 주체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신비론자로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형의상학적 믿음의 차원에서 그들이야 말로 더 강렬한 신자라고 할수 있다. 자신이 뭘 믿는다는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질로 설명할수 없는게 있다고 뭔가 빠뜨린게 있다면 그게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라고 그들은 서둘러 말한다. 먼저 베토벤의 음악이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게 있는거라면 어디에 있는가. 그게 물질인가? 우리가 보고 듣는 전세계는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이다. 온우주가 사고하는 주체의 안쪽에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상세계를 만들었다고 할 때 도대체 시뮬레이션을 하는 컴퓨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그 시뮬레이션 안의 한캐릭터가 던지면서 가상세계 안을 아무리 뒤져도 컴퓨터는 찾을 수 없다. 가상세계안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합쳐지면 컴퓨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가상세계안쪽이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이 그런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생각인 것이다.  

 

맺는 말

 

신의 의지가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냈는가하는 시각에 대한 대안은 어떻게 물질이 정해진 법칙 -예를 들어 뉴튼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면서 세상을 만들어 내는가하는 것이었다. 뉴튼은 중력이 뭔지 물질이 뭔지를 묻지 않고 그것들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기술하는 동력학을 개발했다. 그것이 과학혁명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본질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의식이나 혹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가지는 생각에도 비슷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안다. 생명이란 돌멩이같은 물질이 아니라 물에 만들어지는 파도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생각은 자연스레 그렇다면 인간이나 나라는 것도 어떤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생각을 알려준다. 즉 우리는 현상이지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파도가 밀려가듯 우리는 만들어지고 퍼져나가고 밀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나의 본질을 묻는 경향이 있다. 즉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뉴튼적 관점의 변화가 그대로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대신 나는 어떻게 변해왔고 변해가는가를 기술하는 동력학에 집중해야 할것이다. 

 

달과 지구가 절묘한 균형을 이뤄있기에 달과 지구의 상태는 어떤 제약을 받는다. 정해진 거리에서 정해진 속력이어야 그렇게 돌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포함한 존재를 유지하는 생명들은 그들이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뉴튼의 눈으로 세상을 볼때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듯이 우리가 이렇게 생명의 동역학의 눈으로 볼때 생명과 우리자신의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이란 다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르네상스다. 산처럼 쌓여있는 과학적 사실들에게 엿먹으라고 주먹을 날려보는 행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체험, 나의 느낌, 나의 행복이 아닌가. 그것에 대해 거의 말해주는 것이 없고 대개는 너의 느낌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너는 착각에 빠져있다면서 어떤 객관적 현실에 우리를 때려박으려는 이성의 거대한 손아귀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이다. 

 

서구 중세인들이 과학의 선구자들을 화형시킨 일이 있고 핍박한 일이 있다. 그들은 과학의 선구자들이 그저 충동적으로 비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뉴튼은 신의 영광을 증명하고자 뉴튼 역학을 개발했다. 과학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 진게 아니다.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은 현대과학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 지지 않는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일탈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이제 개개인 각자를 위한 과학이 필요하며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지식을 쌓아올리는 것에 대해 좀더 진지해져야 하는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다. 언제까지 인생의 지혜는 가장 음습한 곳에서 주로 얻게 내버려 둘 것인가. 무당이나 사이비 목사, 사이비 중같은 사람들 말이다. 

 

물론 체험을 강조하는 과학이 정말 실체로 만들어 질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누가 알것인가. 어딘가에서 제2의 갈릴레오나 뉴튼이 열심히 그것을 만들고 있을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