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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9. 2.

12.9.2

최근에 EBS에서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라는 다큐를 방송했습니다. 총3부로 이뤄진 이 다큐는 비록 그 제목이 말해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히 전해주는 다큐라고는 할수 없지만 음악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주는 유쾌하고 유익한 다큐였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그래 정말 왜 우리는 음악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큐를 봤는데요. 다큐3부에서는 각종 음악가들이, 그러니까 작곡가나 가수나 연주가들이 이 질문을 받지만 대개 대놓고 나는 모른다고 하거나 정확히 어떤 답을 말하지 못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답하는것이 당연한 질문이겠지요. 근본적으로는 당신은 왜 김치를 좋아합니까 같은 취향에 대한 질문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취향에 대한 확실한 논리적 이유를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서 흔한 말 하나가 저에게 영감을 주는 걸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악은 언어다라는 말이었죠. 예술은 한국어나 중국어나 영어처럼 뭔가를 표현하는 다른 종류의 언어다라는 말은 사실 아주 흔합니다. 다만 저는 음악이 언어라면 한국어나 영어가 어떤 것인가 혹은 과학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음악에 대해서 이해하는 바가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나 영어만이 언어가 아니라 과학이나 미술도 다 모두 언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생각은 마치 이웃집 쫑이 개라는 말을 듣고 여러 다른 개들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이웃집 쫑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왜 음악을 좋아하는가, 음악은 어떻게 우리는 사로 잡는가. 우리는 마찬가지로 물을 수 있을 것 입니다. 한국어는 왜 우리를 사로 잡는가, 영어는 왜 우리를 사로 잡는가, 과학은 왜 우리를 사로 잡는가. 우리는 언어 없이는 생각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말해집니다. 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에서는 언어를 통해서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엄격히 사실인가 아닌가를 떠나 분명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크게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어를 배우게 되면 느끼는 것은 언어란 결코 완벽히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한문으로 된 당시를 한문으로 읽어보고 다시 그 번역을 읽어보면 아무래도 감각이 같지 않습니다. 한국어로 더빙되어 한국어로 말하는 서양영화의 주인공은 낯설게 그리고 다르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따금 머릿속으로 생각을 할 때 영어로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영어로 사고하는 것과 한국어로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장단점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어는 논리적이되려는 것을 방해하는 거추장 스러운 틀이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로 그래서 영어로 토론을 하는 것과 한국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크게 느낌이 달라집니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혼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일것입니다. 한국어가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사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한국문화의 정수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과 외국어로 의사소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혹은 표현이 어려운 정서를 놓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낡아빠진 민속주점에서 술한잔을 한다던가 나무로 대충지은 원두막에서 수박을 갈라먹는 정서는 단순히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고향음식의 맛처럼 우리에게 친근하게 남습니다. 우리에게는 맛있는 김치가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고 고향의 낡아빠진 콘크리트 도로가 나에게는 너무 좋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삭막하고 초라라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향의 것이라면 낡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속에서도 친근함과 행복을 찾을수 있는 뭔가가 들어 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가 이렇게 문화적 차이이듯 음악과 다른 학문의차이도 그런 것같습니다. 우리는 김치를 먹듯 음악을 먹고 음악의 맛을 느끼고 고향같은 음악을 가지게 되고 어린 시절이나 청년시절을 대표하는 음악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가도 옛날의 그 음악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서 음악으로밖에 잘 표현되지 않는 어떤 정서를 느낍니다. 자신이 20살무렵에 히트치던 유행가를 다시 틀어놓으면 우리는 진하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감상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할 수도 있고 아이러브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음악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요. 단순히 사랑이라던가 좋아한다던가 하는 흔한 단어로 다 표현할수 없는 감정을 음악으로는 자세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 작곡을 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이따금 이 음악이 말하는 것을 알겠다, 나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연애하던 남녀들이 음악들을 모아서 녹음한 테이프를 주고 받던 일이 많았는데 그것도 아마 이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 아들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던 시절,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자신을 잘 표현할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야라는게 표정에는 나타나있지만 전달이 잘안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어린 아이의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후련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 일상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표현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하던 아이가 말을 하게 되었을때 후련하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음악에 한정된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사로잡는가라는 질문은 과학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같은 질문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좋은거지만 과학은 골치아프다고 생각할테니까요.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두통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제가 어렸을때 그랬습니다. 바하를 들으면 머리가 정리되지만 베토벤을 들으면 두통이 생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클래식을 틀어주면 때로 아이들은 그 음악들이 무섭다고 말합니다. 

 

과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얻게되는 즐거움과 해방감은 주로 그 보편성에서 옵니다. 과학적 법칙은 대개 시간에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영원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원자는 대개 별들이 불타고 남은 찌꺼기가 다시 모인 것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태양이 질때 노을이 빨갛게 생길까를 마침내 과학적 지식을 통해 이해해 냈을때 어떤 사람은 낭만적인 노을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과학도는 기쁨에 빠집니다. 과학이란 결국 철학이며 철학은 이 세상의 것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아귀가 맞아들어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노을은 빨가니까 빨갛지가 아니라 세상의 이치에 따라 빨간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 우리는 여러가지를 느끼겠지만 느낄 수 있는 것중의 하나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안의 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이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한가지 답입니다.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라는 다큐에서 인터뷰한 음악가들중 몇몇은 음악을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마치 두개의 사람이 있는 것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음악으로 소통하고 음악으로 사고할 때 그들은 스스로가 전혀 다른 사람, 방금전까지 수입에 대해 걱정하고 아이들 성적에 대해 걱정하고, 다른 사람과의 작고 큰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를 걱정했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의 수만큼 다양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어로 사고하고 말할때 우리는 한국어로 사고하고 말할때와는 다른 인간이 됩니다. 철학할 때 종교할 때 예술할 때 과학할 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인간이 됩니다. 다른 문법과 다른 단어로 말하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안에 푹빠질 때 우리는 뭐하나 놓치지 않았고 철저히 모든 것을 본다고 생각하며 때로 자유를 느끼지만 다른 언어로 전환했을 때 달라지는 것을 보면 인간이 가진 어떤 언어도 음악이나 과학을 포함해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그의 교육론에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몇개 배우는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어를 쓸 수 있는 실용적 능력을 떠나 서로 다른 사고 방식체계를 몇개 알게 됨으로해서 우리는 한개의 언어가 만들어 내는 상상과 표현의 한계에 갇히는 것을 피해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언어라고 해도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로만 표현되는 뭔가를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보통쓰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우리가 보통쓰는 언어가 뭔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를 알려면 미술이나 과학같은 다른 언어를 아는게 필요할지 모릅니다. 외국을 알아야 한국을 알게 되듯이 음악이 아닌것을 알아야 이래서 음악이 좋은거로구나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있을것입니다. 대개 개의 언어를 이런거구나, 자유롭구나하고 느낄정도로 배우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는 합니다. 몇개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고 느끼는 일은 특히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어려운 일일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바깥은 나가본적이 없고 뭐하나 아는 것이 없으면서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제아무리 고민해도 한국이 아닌게 뭔가를 모른다면 한계는 명백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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