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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지식의 최전선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1. 5. 19.

11.5.19

모리스 클라인의 수학의 확실성이란 책을 전부터 드문드문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도 일찍 눈이 떠진 김에 얼마간 읽고 사무실로 왔습니다. 수학의 확실성이란 수학을 확실한 근거위에 세우려는 목표에 대한 수학자들의 노력과 실패를 기술하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저는 동시에 이것이 과연 진짜 중요한 문제일까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몇 군데에서인가 여러번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만 중세시대에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를 가지고 학자들이 논쟁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 언짢아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나 조선시대의 사단칠정논쟁도 어떤 의미에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논쟁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집중했던 것은 그것이 당대의 주류적 사고의 중요한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떤 시대에는 주류적 사고의 흐름이 있습니다. 주류적 사고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에 더더더 파고들고 점차로 거대한 지식의 체계가 만들어 집니다. 하지만 두가지를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는 그래도 언제나 거기에는 무지의 영역과 기성의 사고가 접촉하는 지식의 최전선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공한 주류사고는 더더더 거대한 체계를 만들기 때문에 그 지식의 최전선이 훗날 돌아보면 황당하게 들리는 곳까지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너무 외골수로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이나 신경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이 프로이드나 사단칠정논쟁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부질없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 쉬울 것입니다. 뭐가 주관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뭐가 객관적 사실인지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죠. 지난 몇세기동안 성공적이었던 것은 과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학과 물리학이 그 근본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그 결과 수학은 오히려 가면갈수록 모호한 것이 되었고 물리학에서는 이 세계가 12차원이냐 11차원이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수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은 진리의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종종 거론합니다. 생명이나 뇌를 연구하는데에서도 답은 작고 미묘한 수학적 질서에 있다는 믿음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지능은 결국 우리가 놓치고 있는 작은 규모에서의 양자적 효과 같은 것때문에 생겨난다는 로저 펜로즈같은 사람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근원을 파고들어 어떤 신비한 이론적 체계만 완성할 수 있다면 엄청난 진전이 일어날거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식적으로 사고하면 이런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학이나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근원적 문제를 고민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길은 수많은 천재들이 엄청나게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언젠가부터 소문만 무성할뿐 뭐하나 성공적인게 나오지 않고 있는 곳이죠. 그 길이 완전히 끝났다라는게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생산적인 것이 더 나올 가능성이 작다는 겁니다. 

 

지금 진짜 발전이 일어나는 곳은 생물학입니다. 네이쳐같은 저명한 과학잡지가 생물학 논문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지식의 최전선에서는 미묘한 수학이나 슈퍼스트링이론 같은 것은 대개 고려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벽을 허무는데 그런 지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지식의 최전선이 있고 저기에는 저런 지식의 최전선이 있다라는 것은 자명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지식의 최전선이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숙고가 없으면 21세기에 사는 사람도 중세에 바늘끝에는 천사가 몇명이 앉을 수있는가를 가지고 고민했던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수학과 물리학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생물학의 시대도 성숙기에 도달한건지 모릅니다. 수학이 문명의 여명기에 객관적 진리에 대한 느낌을 가지게 해줬다면 물리학은 이 우주는 어떤 곳인가를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생물학이 이런 질문들들에 답을 진화론이나 유전자연구나 뇌의 연구를 통해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사치스런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지동설이 서양사람을 놀라게 했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의 판단을 할 때, 스스로의 개인적 행복을 고민할 때 암묵적으로 그 배경이 되는 바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이런 연구들의 결과입니다. 최근에는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 큰 토론거리가 되고 있는데 아직 만족할 만한 답은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암시하게 될거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는 방식, 판단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거라는 것은 꽤 분명해 보입니다.

 

그와 비교하면 물리학과 수학의 혼란상의 최전선은 지나치게 홀로 나아간 느낌입니다. 사실 우리는 양자역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어떤 진전이 더 있다고 해도 그 진전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진전은 물리학자나 수학자가 스스로 더 안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만 할 가능성이 큽니다. 마치 중세의 신학자에게 바늘의 논쟁이 그랬을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진전이후에는 더더욱 신비롭고 애매모호한 무지 혹은 지식의 최전선은 또 존재할 것입니다. 

 

20년쯤 전에 대학원에서 입자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한 박사과정 학생이 생각납니다. 그 학생은 -당시로서는 저는 잘 몰랐으나- 서양에서 보면 상당히 시대에 뒤진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금이 다 고갈된 금맥에 투자한 셈이 된것이죠. 시대에 뒤쳐져서 쫒아갔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시대에는 생물학이 중요하다라는 것도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물학말고 뭐가 있을 수 있는가는 아직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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