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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

by 격암(강국진) 2010. 9. 16.

2010.9.16

 

현실 세계를 어떻게 조각으로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은 나름으로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어쨌건 우리는 현실세계 속에서 많은 존재를 알고 있다. 여러 개의 의자, 여러 사람, 나무, 동물, 식물, 음식, 노래 등 많은 물질적 비물질적 존재가 세상에는 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성질을 논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논리적 이해는 개념의 설정 혹은 개념의 정의에서 해석적으로 풀이되어져 나온다. 이것은 수학의 여러 정리들이 여러가지 정의와 공리에서 해석적으로 증명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 어떤 개념을 등장시킨다. 이것은 집합을 정의하는 일과 같은데 그 집합의 정의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그 개념안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자라는 개념을 잘 정의하는 것은 '여성의 생식기를 지닌 인간'이라던가 'XX 염색체를 가진 인간' 이라던가 하는 말들이 될것이다. 그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 당장 다루는 주제에는 핵심적이 아니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하나의 개념에는 어떤 정의가 따라 붙어서 우리가 하나의 개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이 여자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 자체다. 

 

그렇게 개념을 써서 집합을 정의한 후 우리는 그 집합내에 속하는 개체들의 공통된 성질을 따진다. 여기서 공통된 성질을 따진다는 것은 항상 가설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한정된 숫자의 관찰을 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백조라는 개념을 보자. 사람들이 검은 백조를 발견하기 전에는 백조는 희다라는 것은 절대적 법칙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희지 않으면 백조가 아니다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단 사람들이 검은 백조를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다. 만약 하얀 새라는 것이 백조의 정의에 들어간다면 물론 우린 절대로 검은 백조를 발견할수 없다. 검으면 그것은 백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조의 특성을 다르게 정의하고 그 정의가 충분히 납득할수 있는 것일 때 백조가 희다라는 것은 검은 백조가 발견되는 순간 잘못된 성질이 되고 만다. 

 

뉴튼의 중력법칙을 생각해 보자. 중력의 법칙은 모든 물체에 적용되며 절대적인 것 같지만 그것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는 가설이 된다.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게 된다. 이 말은 질량이 없는 것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빛이 중력장안에서 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따라서 중력의 법칙은 절대에서 거의 맞는 법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절대적이고 엄격한 성질만을 따지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근사적이며 통계적인 법칙을 찾는다. 예를 들어 여기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하자. 구체적이기 위해 그 여자를 배우 손예진이나 가슴 큰 여자로 하자. 한국 남자들은 손예진을 좋아한다 혹은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 라는 말은 물론 절대적 법칙이 아니다. 세상에는 게이인 남자도 있고 손예진이나 가슴큰 여자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이 법칙이 옳다. 즉 이 법칙은 근사적이고 통계적인 법칙이다. 인간은 설탕을 좋아한다라는 것도 이런 법칙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다이어트를 위해 설탕을 절대먹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안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어떤 테두리를 정해서 집단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엄격하거나 혹은 통계적인 특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그 집단이 따르는 법칙으로 이해한다. 일본 사람은 이렇다, 물리학자는 이렇다는 생각들도 그런 종류다. 그런데 현실속에서 이런 이해의 방식을 쓸 때에 한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집단의 공통된 성질을 찾는 것이므로 어떤 개념이 포함하는 개체의 수가 매우 작을 때는 우리가 찾아낸 법칙이나 성질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애매해진다. 

 

훌룡한 과학적 이론은 대개 굉장히 많은 개체를 포함하는 개념을 다룬다. 그런 개념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이기 때문에 쓸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증도 대단히 믿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중력이론은 기본적으로 질량을 가진 모든 개체간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매우 희귀한 질병이 있다고 하자. 이 질병은 전세계에 알려진 환자가 2명밖에 안되는데 발병원인도 모르고 있다. 다만 그 두명이 여자였다. 이럴때 이 질병은 여자만 걸리는 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심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단 한차례의 사례밖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인데 그 경우 환자가 남자였다. 우리는 이걸 근거로 이 질병은 남자만 걸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아주 작은 수의 개체만을 포함하는 개념을 만들어 낼수록 그 개념에 근거한 논리와 판단은 부정확한 것이 되고 틀리기 쉬운 것이 되거나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과학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강국진이라는 한 개인의 과학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개체 -이 경우 많은 개인들-을 포함하므로 여러 인간들의 공통된 성질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강국진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것은 -동명이인이 있다는 점을 무시하면- 단 하나의 개체 즉 글을 쓰고 있는 이 필자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일반화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수많은 강국진을 모두 하나로 여기면서 일반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편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편법을 택한다. 강국진이라는 개체는 '인간'이고 '남자'이며 '한국인' 이라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성질, 남자의 성질, 한국인의 성질을 강국진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이 오류는 A 이면 B이다가 B이면 A다가 아니라는 오류다. 강국진이 남자라는 것이 남자의 성질을 가진 것이 강국진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살인범이 신월동 주민이라는 말과 신월동 주민은 살인범이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 비약을 통해서 실체의 축소를 가져온다. 여기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강국진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인간이고 남자이며 한국인인 존재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체는 때로 큰 착각을 만들어 낸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아인쉬타인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여러 다른 의미로 평균값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인간은 이렇다라는 법칙을 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 법칙은 대단히 틀린 것이 되어 그들에 대한 큰 오해를 가지게 된다. 사실 누구도 모든 면에서 평범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나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이해의 함정이다. 실존은 개념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는 개념에 선행한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파악한 세상은 실존을 축소시켜서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개념이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이야기 되어 지는 것일수록 즉 우리가 어떤 개념을 또렷하게 느끼고 있을 수록 그것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확한 것이 된다. 왜냐면 그 엄밀성은 그 개념이 다수의 개체를 포함한다는 사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단하나의 개체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이럴 때는 엄밀한 이론일수록 소용이 없다. 더 큰 실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과 결혼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이런 남자, 이런 여자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을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이론들은 경험상 그리고 통계상 매우 또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당신이 결혼을 백번이나 천번쯤 한다면 이런 통계에 근거한 판단은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일반론적 경고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오직 한번 결혼하려고 한다면 당신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어떤 일반론적인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무엇보다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감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느끼고 판단해야 한다. 믿음이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지 숫자와 일반론으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순간 답은 당신에게서 너무나 멀어질 것이다. 당신의 이해는 잘못되어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은 관념의 과잉화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이런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상관관계는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원리나 상보성원리를 떠오르게 만드는 면이 있어서 나는 이것은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부르겠다.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란 우리가 논리와 경험을 통해 확신할수 있는 지식을 쓰면 쓸수록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단하나뿐인 개체, 상황에 대한 이해는 거꾸로 줄어든다는 원리를 말한다. 

 

실존과 우리사이를 너무 많은 관념으로 채워넣으면 그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부정확성을 도입하게 된다. 한마디로 관념들, 인간이 쓰는 단어들은 그 정의에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모호성은 우리 맘대로 우리가 접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구부리는 자유도가 된다. 관념이 과잉된 상태란 마치 실험데이터는 몇개 밖에 없는데 자유변수가 수백개가 있는 모델을 도입해서 실험데이터를 해석하려는 것과 같다. 언제나 우리는 멋진 모델과 관찰결과의 일치를 보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다. 그래프에 나타난 데이터 점들을 잇는 멋진 곡선은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고 주가그래프에서 어떤 추세를 쉽게 읽고 주식투자를 시작한 개미투자가들처럼 우리는 결국 그 환상에 속아서 뻔한 진실을 외면하고 오판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순간에 특정장소에서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 상황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감수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오직 관념만을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장님이 된다. 그때 우리는 보다 정확해 질수록 부정확해 지는 모순에 처한다.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때문이다. 

 

배우자의 선택이 아니라 어머니의 물 한잔의 예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불효자고 어머니는 몸이 아프다. 그런데 당신이 뭔가의 이유로 목이 마를 때 당신의 어머니는 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한잔을 가지고 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어머니의 물한잔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누구 어떤 다른 사람이 준 물한잔, 아무 어려움 없이 그냥준 물한잔과 '과학적으로는' 똑같다. H2O다. 과학중독자의 눈에는 그 물한잔이 가진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가치적인 맹인이 된것이다. 

 

과잉된 관념들은 우리의 감정을 소설처럼 창조할 수 있다. 현실은 관념으로 해석되고 그 해석은 다시 또 다른 전망을 만든다. 가장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싸구려 연예소설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황에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연애영화나 성장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드라마를 재현하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따라하거나 어떤 드라마, 영화, 소설을 반복하려고 한다. 삶이 기성품화되고 삼류드라마의 연속처럼 보인다. 이것역시 가치적 맹인에 가까운 것이다. 느끼면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아침 문밖을 나서서 일터로 나가려는데 아침햇살이 따사로왔고 바람이 부드러웠다. 이 남자는 그 순간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아이들은 자라고, 풀들이 자라고, 사계절이 변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하나의 시로 남겼다고 하자. 

 

그 아침의 그 순간, 그 장소에서의 경험은 단 한 번의 것이며 말로 전달될 수 없다. 모든 단어는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최대한의 경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사용하는 단어들속에 박어 넣는다. 그래서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래서 시나 문학은 중의적인 단어를 쓸 때가 많다. 좋은 시는 뻔한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대한의 경험을 전달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모순적일 수 있고 문법적으로도 엉터리 일 수 있다. 가장 엄밀하게 의미를 전달하려는 과학적 글쓰기가 가장 비문학적이 되는 것은 그런 글쓰기는 실존의 대부분의 것을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그런 행위를 경멸하고 폭력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실존이 관념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관념으로 만들어낸, 스스로가 만들어 세상을 진짜 세상이라고 믿을 때가 있다. 우리는 무한히 정확해지려고 답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무한히 답에서 멀어져 간다. 설혹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다시 다른 관념으로 도피하고 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답은 우리를 비켜나간다. 우리가 답을 관념 속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런 답은 멋지고 명쾌해 보일수록 어떤 중요한 이해를 결핍하고 있다.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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