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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장인정신

by 격암(강국진) 2010. 8. 10.

2010.8.10.

나는 통섭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전에 썼다.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858 )쓰고보니 나는 장인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나는 사람들이 진정한 장인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이 장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존경하는 관습이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장인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니 고작해서 장인이란 예술가를 의미한다고 나온다. 심혈을 기울여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장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만약 장인이라는 것이 일종의 전문가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피리만드는 장인을 피리에 관심없는 사람은 존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장인은 그저 물건을 귀신처럼 잘 만드는 것을 넘어서 있기에 존중받을만 하다고 믿는다. 

 

나는 장인이 뭔지 이미 통섭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어느정도 기술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을 극한까지 추구한 사람이다. 극한까지 추구함으로해서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기술자나 전문가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고 나면 그 분야를 넘어서는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 그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바로 통섭을 이룩한 사람이다. 자기 질문에 철저하되 그 질문을 넘어서서 세상으로 나간 사람이기에 우리는 장인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그저 여기저기서 잡다한 지식을 배우고 익혀서 머리에 들고 다니는 사람은 사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자기가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것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도 잘모르면서 남의 이야기를 잔뜩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많은 자칭 전문가는 사실 이렇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돕는 지식인이나 전문가가 아니라 세상을 어지럽히는 전문가가 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남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얇은 바닥이 들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복잡한 이야기로 듣는 사람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누구는 이러했다라는 식의 지식들을 나열할 뿐이다. 지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런 말들은 소고기 스테이크에 양파나 브로콜리나 멋진 그릇따위의 조연만 있고 정작 주연인 스테이크가 없는 것에 가까울 때도 있다. 이것저것 냉정히 곁가지를 쳐내고 나면 자기 판단으로 말한 가치있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좋아하여 종종 이야기하는 장자 달생편의 목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梓慶(재경)이라는 목수가 나무를 깎아 鐻(거)를 만드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솜씨에 놀랐다. 노나라 임금이 보고 물었다.

‘자네는 무슨 기술로 이렇게 만드는가?’

재경이 대답했다.

‘저는 목수일뿐 특별한 기술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가 있기는 있습니다. 저는 거를 만들 때 기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齋戒(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사흘을 재계하고 나면,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를 재계하고 나면 비난이나 칭찬,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이레를 재계하고 나면 문득 제게 사지나 몸뚱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습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공무니 조정이니 하는 생각도 없어져,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외부적 요인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런 뒤 산속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자던가 매뉴얼에 따르면 이 물건은 이러저러하게 만드는 거니까 이 다음엔 이거 저거하는 논리적 생각이라던가 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 물건을 이렇게 만드는 사람이 물건을 만들 때와 세상 살이를 할 때의 태도는 서로 전혀 다를까. 장인은 하나의 질문, 하나의 목표를 집요하게 추구하여 자기의 삶을 전부 거기에 녹여넣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사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다. 

 

피리만드는 장인이 세상을 볼 때 피리만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무슨 방식으로 볼것인가. 의사가 장인이 되면 세상을 볼 때 환자와 질병의 치료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것이고 화가가 장인이 되면 세상을 볼 때 재료와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볼 것이다. 과학자가 장인이 되면 세상을 볼 때 과학하는 정신으로 세상을 볼 것이다.  

 

장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어떤 직업으로 그 사람을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농사일로 장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와 동시에 철학자일 것이며 교육자일 것이다. 굳이 그 사람이 자기를 다르게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달리 부르는 것도 필요하지 않지만 부르는 사람이 그 사람을 농부로 부르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의 착오가 생긴다. 

 

장인에게는 경계가 없다. 본래 세상일의 구분이란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하는 사람은 과학만 하면 되고 노래만드는 사람은 노래만 만들면 되고 자동차 만드는 사람은 자동차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일이 본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 간단히 잊어버린 사람이다. 노래만들기에 왜 듣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없으며 공학적이고 과학적 사고가 필요없겠는가. 또 과학이나 공학은 왜 이와 다르겠는가. 장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피리만드는 것으로 장인이 되었다면 그가 생계를 잇기 위해 피리만드는 것을 중단했거나 사고로 팔을 잃어버려 피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졌어도 그는 여전히 피리만드는 장인이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전문가집단을 존중한다. 그 좋은 예가 교수들에 대한 대우고 존중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장인의 치열함과 열정과 엄격함을 기대한다. 그러나 과연 현실도 그럴까? 우리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장인의 향기를 보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에 대해 의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피알의 달인이다. 그들은 겉치례에 집중하고 피상적이다. 알맹이는 빼먹고 호화로운 장식에만 눈이 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은 호화로운 이력서에 쓰일 여러가지 직함이나 경력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가 하는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고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은 드물지 않은가. 이리저리 백과사전처럼 잡다하게 끌어모은 지식을 가지고 단단히 자신을 싸매어 놓고 자기방어에 열중할 뿐인 지식인은 오늘날 아주 많다. 그들은 그저 세상의 잣대로 사람들을 이거다 저거다 판별하는데 열중한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아름다워지고 내실이 있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가슴에 칼하나 품고 자기 길을 뚫고 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그저 여기도 저기도 모난데 없이 좋은 처세술을 가지고 튀지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닐 것이다. 출세하는 법이나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따위를 읽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화려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시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뭔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런 고민의 세월속에서 자기의 중심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자기를 다듬고 다듬어 살다보면 그 사람은 작품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중심은 언어로 논할 바가 아니고 세상의 잣대로 측정할 바가 아니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기 가슴에 중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모두가 장인이 되는 사회가 되는것이 아닐까. 모두의 인생이 작품이 되는 사회가 아닐까. 그런 세상이야 말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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