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미디어와 분류의 오류 2

by 격암(강국진) 2010. 6. 11.

2010.6.11

앞의 글에서는 이름 붙이기와 분류라는 것이 얼마나 습관적으로 생각없이 행해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다양한 측면들을 가진 존재들을 쉽사리 분류하는 일은 실로 오만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만을 반성한다지만 실은 반성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름 붙이기, 분류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더욱 나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분류를 하는 일에는 샘플링 문제라는게 있다. 여기 1년에 3천6백5십만원씩 다시 말해 하루에 꼬박꼬박 십만원씩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의 수입이 얼마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얼마나 버는지를 관찰해서 평균을 내보기로 했다. 한 백일 동안을 봤더니 매일같이 똑같이 십만원을 벌어서 천만원을 벌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평균 1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 또 한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백일동안 단 하루만 수입을 올린다. 그런데 그 수입이 천만원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백일 평균 수입은 역시 다시 10만원이다. 

 

 

 

 

 

위의 그래프는 두 사람의 백일간의 수입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이 위의 그래프같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수입이 얼마인지 알아내는데 몇일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이 아래의 그래프와 같다면 우리가 그 사람의 수입이 있었던 단 하루에 관찰에 실패하는 실수를 한다면 그 사람의 수입에 대해 전혀 틀린 인식을 하게 된다. 

 

불행한 것은 현실은 날이 가면 갈수록 아래의 그래프같은 식의 상황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강력한 미디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이 통합되어 가기 때문이다. 더 예측할 수 없는 정보의 되먹임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세상이 변한 것이다. 예측과 이해의 불가능함에 대해서는 나심 탈렙이 블랙스완이라는 책에서 많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위에서는 돈을 버는 날에 대해 실수 하는 경우를 예를 들었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이 한조각의 정보로 크게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얼마전에는 애플컴퓨터의 중국 공장에서 자살사건이 일어나서 여러번 보도가 되었다. 수십명의 자살자가나왔다는 말에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을 동정하는 말들을 했다. 이에 대해 애플 컴퓨터 사장 스티브잡스는 원인을 알아내려고 하고 상황을 개선하려고 한다라는 통상적인 말 이외에 이런식으로 대답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 공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일한다. 그 공장의 자살률은 실제로 미국시민의 평균 자살률을 밑돈다. 

 

어떤가. 단한마디의 문장으로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그 공장에서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문장은 그 공장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있는가를 고려하면 달라보인다. 이렇게 보면 그렇게 놀랍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을때 생길 수 있는 도덕적 비판을 고려해서 스티브 잡스는 그렇게 그 말을 강조하지 않을 것이고 실재로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 

 

나는 이 문제에서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비호하거나 비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공장의 현장사정에 대해 나는 너무 모른다. 다만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도 샘플링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것이다. 이 경우는 그 공장의 규모라는 정보의 샘플링이다. 한조각의 정보가 현실 인식에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편협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건 편협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한 개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넓고 복잡해 졌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세계가 더 커진것은 없지만 이제 전자통신으로 연결된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빠르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인다. 유럽의 경제불안이라던가 미국의 선거라던가 인도네시아의 지진이라던가 베트남 사람의 평균 임금같은 것이 내 개인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영향이 있다.그러나 우리는 실제로는 매우 제한된 사람들만을 만나고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접한다. 

 

봐야할 세상은 크고 복잡한데 그 세상을 판단할 기준이 되는 정보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앞의 글을 읽고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미술관의 수없는 그림들을 앞에놓고 비평을 하고 분류를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번 글에서 거기에 더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사람은 눈을 감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보통 미디어를 말하면서 그것을 색안경 같은 것으로 말하는데 이 비유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서 미디어는 색깔 칠한 현미경 같은 것이다. 미디어는 아주 작은 부분을 그것도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곳에 대해서만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코끼리의 발톱세포를 보면서 코끼리를 그려야 한다. 

 

기본적 정보가 완벽해도 세상을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인데 우리는 매우 편향되고 찌그러진 정보를 얻는다. 특히 그것이 세상사람들에게 중요한 정보라고 알려진 경우 더더욱 그렇다. 당신이 만약 부동산에 빚내서 투자를 많이 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면 앞으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갈거라는 말만을 들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정보는 전혀 반대로 나오기 마련이고 여러모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상황은 혼란스러워 지기만 지기 쉽상이다. 그렇게 해서 그 혼란이 실체가 된다. 오를거라고 믿는 마음이 오르는 상황을 만들고 내릴거라는 미음이 내리는 상황을 만드니 현실과 머릿속 관념이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에 초등학생 유괴사건이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 사건이 생기고나면 갑자기 인터넷과 신문 방송에는 초등학생 유괴사건 이야기가 넘쳐난다. 전에라고 해서 초등학생 유괴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크게 보도 되지 않다가 사람들이 그런 정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그런 기사가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갑자기 초등학생 유괴가 급증하고 전에는 안전했던 사회가 이제는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로 변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부패에 대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독재시대에는 엄청난 부패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방송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조용했는데 탈권위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마치 부패가 늘어서 세상이 시끄러운 것처럼 느끼게 된다. 현실은 정반대인데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준비된 것만을 볼 수가 있다.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우리의 내적 세계가 일관성을 가지고 안정감을 가지고 있을때 세상은 일관적인 정보를 보내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 세계가 혼란되어 있을때 특정한 것을 절대적 악으로 분류하고 그것에 모든 불안과 고통을 전가할때 우리의 눈에는 그런 이데올로기가 옳다라는 증거만이 들린다. 

 

여러가지 미디어들과 인맥을 통해 우리는 여러가지 정보를 접하고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이해를 행한다. 그런데 그 이해는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는 대단히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앞의 그림에서 처럼 우리는 부드럽게 변하는 현실을 전혀 다른 현실로 인식한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도 장님이나 다름없다. 무의미한 여러가지 이미지들, 이름들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고 만다. 

 

현실은 복잡하기만 한것이 아니다. 빨리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재들이 고민고민해서 만들어낸 이름과 분류라는 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의미한 것으로 변해간다. 마치 성황당에 있다는 귀신을 섬기는 것을 현대인들이 비웃듯이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빠져 있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기괴하며 위험하기 까지 하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개인이 스스로 온전한 세계상을 만들어 내기가 너무 힘겹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일상에 바뻐서 대개 그런 일에 힘과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미디어를 장악한 사람은 팥으로 얼마든지 된장을 만들어 내는 마술을 부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진짜로 필요한 것이 철학일 것이다. 그것도 파편적인 철학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 대한 그림을 한꺼번에 보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 그러나 오늘날의 철학은 특히 한국의 철학은 지나치게 비실용적이고 전문가적이라는 느낌이다. 한국 사람들은 모두 내적 안정과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들은 대개가 곧바로 전공의 세계로 빠져 버린다. 서양철학사를 줄줄이 외우고 여러가지 개념을 말하는데 그런 백과사전적인 지식들은 대개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길로 빠져서 수십년을 헤매도 얻는게 없을 수도 있다. 

 

내적인 그림이 부실하므로 사람들은 더더욱 외적인 미디어에 쉽게 지배된다. 그것은 미디어를 지배하는 자본가들이 원하는 일이다. 그나저나 블랙 스완을 쓴 니콜라스 탈렙은 미디어가 전해 주는 정보의 편향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간단하다. 그는 신문도 티브이도 안본다고 한다. 보는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과학자의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인정신  (0) 2010.08.10
방정식과 절대적 세계의 존재  (0) 2010.07.04
미디어와 분류의 오류 1  (0) 2010.06.11
통섭에 대한 단상  (0) 2010.06.01
인간과 신경과학  (0) 2010.05.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