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1
최근에 나는 통섭이란 주제에 대한 에세이와 서평등을 읽었다. 2005년 월슨의 통섭이란 책이 번역된 이래 한국에서는 통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통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쟁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의 통합과 연결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월슨은 통섭이란 책에서 어떻게 인문학적 지식도 과학적 지식과 통합될 수 있는가를 논했는데 최민자교수의 통섭의 기술이라는 책이나 최종덕 교수의 물리환원주의에 빠지다라는 글에서 이는 비판되고 있다고 한다.
불행히도 나는 아직 저 책들을 읽지 못했고 그에 대한 서평들을 읽었을 뿐이니 나는 그 책들을 비판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통섭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개인적의견을 정리해 볼까 한다. 일단은 나 개인은 매우 미약하게나마 통섭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고 뇌과학쪽으로 옮겨온 사람이며 철학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섭이란 주제는 어찌보면 나의 개인적 고민이나 인생역정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통섭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왜 통섭을 해야 하고 이런 주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이다. 통섭은 통섭을 위해 하기보다는 마음속에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다가 벽에 부딛히면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취미삼아 이것저것 공부하는 것을 통섭이라 부를 것같으면 그건 넓은 교양을 가지자는 말이니 별로 큰 대화거리가 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통섭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이 편협하게 한가지만 하면 안되지 이리저리 두루 알아야 좋지. 조금 더 세련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지식들이 만나서 서로에게 자극을 줄 때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을까?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물리학학위를 하고 원숭이 뇌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하는일을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정말 생물학에 대해 뇌과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말해 보자.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춘향전을 본다. 그러면 모든 언행이 이해가 안 갈것이다. 양반이란게 뭔지, 남녀간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왜 저렇게 웃고 저렇게 우는지 다 이해가 안간다. 나는 그런 입장이었다.
원숭이 실험실에 가서 보면 실험계획을 짜고 원숭이 두개골을 열고 전극을 넣고 데이터를 얻는데 있어서 그 단계단계마다 무한히 많은 세부 사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학문이 다 그렇다. 그리고 그냥 대충 하는게 아니라 학문의 수준에서 어떤 것을 하려면 그 세부사항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충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세세히 아는 것이다.
왜냐면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이 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몇달동안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그 데이터 분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경우도 있었다. 왜냐면 그 데이터를 얻는데 있어서 생길 수 있는 무수한 인공적 요소들에 대해 내가 충분히 잘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학문분야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노력을 들여서 그 중심적 아이디어에 헌신한 결과 독립된 분과로 탄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성격은 두개골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다는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각 개인의 성격과 두개골의 모형을 비교하고 증거를 모을수 있다. 19세기의 서양에서 골상학이라고 불렸던 이 학문은 지금은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 말해지지만 아직도 신경과학교과서에 언급될 정도로 한때 관심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쌓아올렸으므로 실은 한 인간이 이런 한 분야를 제대로 알기도 참 어렵다.
때문에 학문적 분과들이라는 것, 어떤 연구의 패러다임들은 그저 심심한데 두 분야를 한번 뭉쳐볼까 하는 식의 사고로는 흐뜨러지지 않는다. 통섭을 두 분야간의 화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내가 보기엔 진정한 통섭은 그럴 수가 없다, 통섭은 파괴다. 두 분야가 만나 통섭이 이뤄진다는 것은 두 분야 모두가 파괴되던가 한분야가 다른 분야를 먹어버리던가 하는 것이다. 굳이 파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거기에 자기부정적 도약과 기성사고방식의 파괴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집요하게 한 개의 구체적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다가 일어난다. 양자역학은 흔히 화학과 물리학을 통합시켰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한번 화학과 물리학을 통합해 볼까 하는 사고 방식으로 일어난게 아니다. 원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냉철히 추구하다보니 일어 나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학문 분야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가지고 그 연결통로를 뚫는게 아니다. 누군가가 맹렬히 한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구멍을 똟다보니 그 사람의 궤적이 자기 분야를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통합이 일어난 이후에 즉 결정적 진보가 일어난 이후에 보면 우리는 우리가 마치 미리 전체적 조망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럴수가 없다. 인간은 작은 지성이다. 화학과 생물학을 통합해 보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통섭이란 많은 그냥 두루 아는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질문에 대해 길고 힘겨운 추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깊이 아는 것에서 통섭이 생겨난다. 깊이 알기 때문에 기존의 학문적 방법, 패러다임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이 깊이 안다는 것은 관련된 분야 전부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 충분히 숙고했다는 뜻이다.
나 자산의 예를 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가장 확신을 가지고 아는 나 자신의 예를 들어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내가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난후에도 인공지능이나 뇌과학, 철학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이 모든 분야가 한 줄로 이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와 돌아보면 나는 애초부터 어떻게 사는게 옳은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론 즉 일종의 삶에 대한 이론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나를 물리학이나 인공지능이나 뇌과학, 철학등의 주제에 대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분과에 속하는 것인지를 모를 때 조차도 말이다. 나는 윤리학이 뭔지도 모를때 윤리학적 문제를 생각했지 윤리학이 뭔지 알고 난 후에 막연히 윤리학과 물리학의 통섭을 시도해 보자는 식의 생각을 한게 아니다.
중심은 문제, 질문에 있다. 만약 우리가 가진 질문,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 기존의 학문구분때문에 크게 방해받지 않는다면 통섭따위는 잊어버려도 좋다. 한분야의 학문만해도 공부할 것, 해야 할 것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 편협되지 않는 지식을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예를 들어 통섭에 대해 최민자교수는 영성과 지성의 조화를 말했다고 한다. 좋은 말이고 나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거다. 지금 이대로의 영성과 지성의 분리가 당신에게 어떤 문제를 주고 있는가. 우리는 질문에서 시작해야지 답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학문이건 개인문제건 우리는 우리의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일반론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반론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반론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제는무엇인가. 학문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적 문제일 수도 있으며 그 둘은 뿌리를 따지면 하나일 수도 있다. 왜 당신은 그림을 그리는가, 뇌를 연구하는가, 왜 야구를 하게 되었으며 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가. 우리앞에는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고 의문이 있고 지적인 흥미가 있다. 그게 왜 있는가. 그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 그렇게 질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는 지성과 영성의 분리라는 주제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오직 그렇게 거듭되는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그 문장에 도달한 사람만이 지성이라던가 영성이라는 단어에 제대로된 의미를 싣는다. 그러므로 문장을 넘어서는 문맥적 그리고 직관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내 말은 각 분야의 사람들은 그냥 각자 하던거나 하라는 말은 아니다. 실은 그 반대 의미다. 내 말은 질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게 어느 경계안에 있는지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같지만 화가가 그림에 대해서 해주는 말은 어쩌면 두뇌의 시각 신경망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내가 마음속에 시각 신경망의 구조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을 때만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질문을 가졌는가가 확실한 사람은 사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질문이 없는 사람, 연구를 하지만 실은 그 연구에 큰 흥미가 없는 사람은 자기 분야의 사람이 아니면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는 마치 긴 컨베이어벨트 옆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조립공이나 마찬가지다. 타이어를 조립하는 사람은 엔진을 집어넣는 사람과 굳이 자동차 조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타이어 끼우기를 그냥 돈벌기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우에는 그렇다. 그가 타이어를 잘끼우는 것을 진정한 자신의 내적 질문으로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농부는 치열하게 농사를 짓다가 어느 순간 그냥 단순하게 농사를 짓는 것의 한계를 뛰어넘어 유전학자가 되거나 철학자가 될지도 모른다. 농사도 대충하고 생물학책도 대충읽고 철학책도 대충 읽어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 농부는 질문을 가져야 하고 그걸 오랜동안 추구해야 하고 그러다가 경계를 넘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통섭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것은 아마도 한국에 '재미없으면서' 그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재미없기 때문에 구획분리하기를 좋아한다. 그냥 너 하던걸 해라, 나는 나하던걸 하겠다. 난 타이어 끼우는 사람이고 넌 엔진끼우는 사람인데 왜 내 영역에까지 관심을 가지는가. 그들은 어떤 의미로 추구하는 질문이 없다. 그들이 책도 쓰고 논문도 쓰고 있어도 그럴 수 있다. 그들은 내적으로 비어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해오던 것에서 밀려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타 학문에서의 참견을 위협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다.
개개의 학문은 하나의 질문을 추구한 사고의 궤적에서 자라나온 나무같은 것이다. 새로운 질문의 새로운 추구는 다른 궤적을 만들고 그것이 다른 분야들을 꽤뚫고 지나갈 수 있다. 그것이 통섭이다. 통섭은 백과사전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같은 것에 가깝다. 질문을 추구하다가 무언가가 경계를 꽤뚫어 버린다. 그 무언가가 뭔가는 오직 치열하게 하나의 질문에 집중해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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