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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인간과 신경과학

by 격암(강국진) 2010. 5. 13.

2010.5.13

과학이 인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 것은 항상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결국 어떤 의미로건 가치판단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인간과 과학이라고 해도 좋을 이 글의 제목이 인간과 신경과학이 된 이유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은 신경 즉 두뇌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인간의 심장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한 부속품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연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인간의 정체성을 두뇌라는 것안으로 몰아넣었다. 심장은 이제 교체가능한 부속품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뇌 안의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세기는 여러가지 심리학적 실험들과  신경 과학적 결과들이 화제를 만들어 왔다. 애착이론이라던가 인간의 잔혹성을 실험한 것, 학습에 대한 실험들이 그러하며 도파민이라던가 변연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나는 신경과학의 연구에 참여해 왔지만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나보다 소개를 잘할 사람이나 책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에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건 이 블로그가 나 개인과 일반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엄청나게 많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책들의 중요성을 모두 무시하고 있다는 말인가. 천만에 그렇지는 않다. 나만해도 그런 뇌에 관련된 대중서적을 당연히 꽤 많이 사서 보는 편이다. 재미도 있고 유익도 하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있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도 있지만 심장박동이 빨라진 상태에서 본 이성에 대해 사랑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초컬릿을 먹거나 무서운 곳을 두 남녀가 가거나 하면 더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난 왜 이런 이야기들에 열광하면서 그런 지식들을 정리하고 모아두려고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과학적 연구로 이해된 인간상때문에 덕을 볼 수도 있지만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나는 이 블로그에서 과학적 연구의 한계에 대해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그런 원천적인 것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이러한 점은 쉽게 알 수가 있다. 과학연구는 재현성이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에 관련된 모든 과학연구는 어떤 입력에 대해 어떤 조건에 대해 사람의 반응이 같게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문에 과학연구로 이해된 인간은 수동적 인간상 즉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에 대한 그림이 되기 쉽다. 

 

위의 심장박동의 예를 생각해 보라.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초컬릿을 이성에게 먹이거나 무서운 곳에 데려가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무엇보다 나 자신의 행동도 알고보면 나의 자유선택이었다기 보다는 어떤 조건에 대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것이 과연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을 뭘로 정의하는가에 달려있고 그것이 바로 정확히 과학적 연구로 이해한 인간에 대한 문제다. 과학적 연구는 정의가 없으면 시작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것은 많은 것들이 정확한 정의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런 제목을 보면 사랑에 대한 어떤 지혜를 배우게 될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적 연구라면 연구자는 연구의 시작에 그가 사랑이라는 말을 가지고 뭘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사랑에 대한 논문은 은근슬쩍 성적 흥분에 대한 연구가 되고 마는 식의 일이 일어난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우리는 과학에서 지혜를 배우게 되지 않는다. 작곡이 음악과 다르듯이 과학과 과학하기는 다르다. 나는 과학하기를 통해 우리가 지혜로워 질 수 있다고 믿으며 위대한 과학자는 대개 지혜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완성된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얻게 되지는 않다. 이 점을 착각하면 우리는 과학적 결과에 은글슬쩍 끼워 넣어진 과학과 상관없는 가치판단적 비약에 속어넘어가게 된다. 속이려는 의도가 없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말해서 달콤한 것과 구역질 나는 것사이의 가치적 차이는 없다. 인간은 진화를 통해 우리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가진 것을 달콤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그걸 좋아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과학이거나 과학에 매우 가까운 설명이지만 이런 설명이 달콤한 것이 구역질 나는 것보다 더 성스러운 위치, 가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똥과 아이스크림의 가치적 차이는 과학적인게 아니다. 그건 마치 과학적으로 수소가 우라늄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의 말이다. 과학적 연구대상으로서 그 둘은 같은 위치에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유전자가 우리에게 설탕을 선호하는 성향을 가지게 했다고 해서 '인간은 본래 설탕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을 뭘로 정의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다이어트를 위해 설탕은 커녕 물도 잘 안마시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가? 인간은 본래 설탕을 좋아한다는 과학적 명제가 한 개인의 가치적 판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과학적 연구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이런 점들은 너무 쉽게 무시된다. 사람들은 하버드니 박사니 교수니 노벨상이니 하는 거대한 이름이 붙은 권위의 과학적 결과를 통해 인간은 이러저러하다라는 말들을 재미로 들으면서 감탄하며 들으면서 알게모르게 과학이 아닌 것까지 흡수하고 가치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악영향을 받기도 한다. 

 

인생의 의미라던가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나는 말리고 싶다. 나는 절대 과학을 몰라도 되고 알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아는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분명 유전자가 결정하는 육체와 함께 존재하는 어떤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 무지한 것도 문제지만 인간을 과학으로 환원시키면서 그 안에서 지혜를 찾고자 할 경우 매우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지혜가 과학과 결합될 때 그것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지만 지혜와 직관은 과학의 영역밖에 있으며 과학이 지혜를 주는게 아니다. 지혜로운 과학자는 과학적 지식때문에 지혜로운게 아니다. 지혜롭지 않은 과학자의 괴변에 놀아나면 오히려 더 어리석어 진다. 모처럼 지혜로운 과학자를 만나도 과학적 지식만 쳐다보면 지혜는 가져다 버리고 엉뚱한 것만 붙잡고 늘어진다.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만 본다는 말은 이럴 때 적합할 것이다. 

 

이런 저런 심리학적 결과에 근거한 이벤트가 그녀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믿는 순간 당신은 그녀가 당신에게 준 사랑의 가치를 거의 증발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사랑에 대해 뭔가 배웠다고 하고 싶은가?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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