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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방정식과 절대적 세계의 존재

by 격암(강국진) 2010. 7. 4.

2010.7.4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칩니다. 문제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사과자루에 사과를 3개 더 넣었더니 사과가 5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그 자루에 들어있던 사과의 갯수는 몇개입니까? 그걸 식으로 쓰면 이렇게 됩니다.

 

x + 3 = 5

 

그런데 말장난에 불과하고 개념적 유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여기는 뭔가 심오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이 식은 우리가 답을 구하기도 전에 그 답이 x라는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3을 더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위의 수학식을 쓰면서 그것을 만족하는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답이 말이 안되는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사과 자루안에 7개의 사과가 더 넣었더니 사과자루안에는 5개의 사과가 남았습니다. 원래 사과의 갯수는 얼마입니까? 이 문제는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능숙히 식을 쓰고 답까지 구합니다.

 

x + 7 = 5

 

x = -2

 

답은 -2입니다. 그런데 사과 -2개라는 것이 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해서 우리는 음수나 복소수 같은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x*x = -1

 

x = i

 

그런데 복소수는 존재하는 걸까요 아닐까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양자역학의 쉬뢰딩거방정식은 처음부터 복소수를 씁니다.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개념적 혼란에서 헤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방정식은 해의 존재를 전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방정식이 해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x + 7 = 5 는 답이 없는 방정식이 아니라 음수의 존재를 만들어 냅니다. x*x = -1은 답이 없는게 아니라 복소수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살다보면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또한 주변사람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문제는 그 질문이 항상 이해하기 쉽고 제대로된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유령같은 답을 만들어 냅니다. 그 답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인데 또한 동시에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유령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자유라던가 평등이라던가 효자라던가 학생이라던가 직원이라던가 남편이라던가 돈이라던가 영혼이라던가 양심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모두 어떤 질문들이 만들어 낸 답들 같아 보입니다. 문제는 그 질문들이 어떤 방식으로 던져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현실과 비슷한 때에 던져졌는가, 혹은 어떤 다른 질문의 답에 근거하여 질문되었는가. 

 

우리는 음수와 복소수에 익숙해서 답은 -2 혹은 1-i 라고 태연히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익숙한 것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원자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자는 파동인동시에 입자인데 이런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입니까? 결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섹스리스 부부나 성적인 규제가 전혀 없는 관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결혼관이란 마치 유치원생에게 복수소가 그렇게 느껴질것처럼 애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나 중세시대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의 '보통' 결혼 생활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질문이 없으면 생각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려면 뭘해야 할까라던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던가 인생의 의미나 인간이나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지 않는다면 결코 그 답도 얻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없으면 답을 구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질문이 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문에 빠져서 그 답의 생생한 실존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 그것은 어딘가 생생하게 실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종종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춘기의 청소년도 그렇고 어른들도 체면이라던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때문에 말그대로 목숨을 거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작은 체면문제로 평생을 그것에 조종당하고 얽매여서 개처럼 일하며 삽니다. 사춘기의 여고생이 어떤 남학생이 무심결에 던진 조롱의 말, 예를 들어 '아 저 살들 좀 봐' 하는 말 하나에 깊게 상처입었고 그래서 거식증에 걸렸거나 자살했다같은 이야기는 흔합니다. 또 실질적으로는 권력이나 돈을 즐기지도 않으면서 남들에게 뒤지는 것이 싫어서 출세와 권력싸움에 끼어들어 평생 버둥대는 어른의 이야기는 그야 말로 얼마든지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저 동창에게 지기 싫어서, 형제에게 지기 싫어서, 나를 버리고 떠난 애인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우리는 종종 인생을 낭비합니다. 

 

이게 질문때문입니다. 그것은  멋진 사람, 이기는 사람, 자랑스러운 아들, 존경받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에 나오는 것들은 정말 실존하는 것일까요? 질문은 답을 만들고 답을 실존하게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의 실존을 믿으며 말입니다.  

 

여기서 기억할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주하는 말입니다만 사춘기 청소년은 결코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답을 찾아서 사춘기를 벗어나게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의 단계에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변화는 답을 찾은게 아니라 다른 질문을 던짐으로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자연히 어른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때 확고해 보이던 옛날의 답이 만들어낸 실존은 유령처럼 희미해지고 새로운 질문이 만들어낸 실존이 우리를 감쌉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질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 질문이 통하는 경계를 잘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의 내가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을 시공을 초월하여 질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답도 시공을 초월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만약 모든 질문들이 시공을 초월할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답인 실존도 시공을 초월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북쪽이 어딘가라는 질문은 지구표면에서는 절대적인 질문같지만 지구를 떠나 우주공간에 이르면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질문이듯이 말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 인생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다에서 한 줌의 물을 퍼서 이 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다는 것은 그 한줌의 물이 항상 실존하며 다른 물들과 다른 존재로 분리하여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바다는 바다요 모든 것은 하나로 존재하다고 생각하거나 시공을 따라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억지로 분리한 한줌의 물이 가지는 의미는 애매할 뿐입니다. 하나의 질문은 흐릿하던 뭔가를 그 답으로 생생하게 실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종종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방정식을 푸는 것에 좀처럼 익숙해 지지 못하는 아이를 봅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는 존재하는 않는 것을 마법처럼 x라고 쓰고 존재하게 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 인지도 모릅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불만인 것이 뭔가를 안다면 그것이 방정식풀기의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일겁니다. 방정식을 배워서 유령을 실체로 느끼게 되는 것보다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아이에게 답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떠들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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