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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좋은 말이 세상에 많은데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0. 8. 11.

10.8.11

갈무리님이 댓글로 세상에 너무 말이 많아서 문제라고 하셨던 것처럼 세상에는 참 말이 많다. 그리고 대단하고 좋은 말도 많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너무 많은 것도 같다. 그 많은 말의 더미에 왜 내말의 더미를 더하는가 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가능하면 자제하려고 하고 글을 더 줄이지 않는 것을 반성하고 있다. 변명해 보자면 거기에 더하여 단순히 말이 많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양의 문제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적절한 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절한 말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연구에서 적절한 모델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 보자. 우리가 원자내의 전자의 성질을 연구하려면 양자역학의 쉬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양자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 쉬뢰딩거 방정식 운운하면서 의자를 만들거나 경제, 사회,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그런다면 그것은 전혀 엉터리가 될 것이다. 

 

뇌를 연구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은 뇌 세포막의 이온통로를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뇌의 일정부분이 통째로 없어지면 뇌의 기능은 어떻게 변하는가를 연구한다. 이 두 연구자가 뇌를 연구할 때 생각하는 모델의 엄밀성은 전혀 다르다. 모래를 보고 있다고 해서 거대한 건축물을 이해할 수 없고 거대한 건축물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실용적 구조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모래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 작은 지구위에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사소한' 문제로 둔다. 연구하는 단위가 커서 그렇다.

 

따라서 과학적 연구를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연구의 목적에 맞는 단순화의 적절한 수준을 찾는 것이다. 수식으로는,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의 지력으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부분을 한계를 가지고 보고 상호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아인쉬타인이라고 해서 가장 맛있는 호두파이를 만드는 법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또다른 예술의 분야이며 세상은 그렇게 끝없는 새로운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재미있고 살만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당연히 여러가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범위가 다르고, 시급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는 악의 근원, 세상문제의 근원이 서로 다르다. 이런 종교적, 형이상학적, 철학적 문화적 기반을 무시한 채 여러가지 말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주론을 설명하는 과학자에게 요리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둘을 연관시키려는 시도같이 잘 되지 않고 시간낭비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가 가지는 많은 혼란은 이런 기본적인 것에 대한 혼선이 크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여기저기서 다른 걸 가져와서 다르게 말하니까 서로 말이 잘 안 통하고 오해가 생긴다.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도 생겨난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많은 사람들은 그저 더 복잡한 모델이, 더 기기묘묘하고 더 많은 지식을 포함하는 설명이,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론과 요리라는 장르를 혼돈하는 것보다 더 자주일어나는 일이다. 한마디로 쓸데없이 문제를 복잡하게만 만드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나라, 여러가지 사회, 여러가지 계층에서 나온 자료를 동원하고 역사를 파헤쳐 여러가지 자료를 꺼내오며 무수한 사람들의 말과 그 말을 해석한 말, 그리고 그걸 번역한 말까지 동원해서 뭔가를 만든다. 그와중에 말은 끝없이 추상화될뿐만 아니라 복잡해진다. 이러다보니 복잡한 말을 하는 당사자 자신도 어떤 이해에 이르고 있지 않게 되기 쉽다. 즉 자기도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모른다. 그들은 남의 말을 부정확하게 인용할 뿐이며 그나마 책임을 지고 하나의 설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설명을 나열한 후에 그냥 그렇다라고 하거나 미심쩍은 이유로 그 중하나를 선택하는 척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당신이 식당에 들어가 피자를 먹을 것인가 파스타를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사람은 이 식당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식중독사건이 일어났다라는 소문과 주장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피자에 들어간 저 미심쩍은 물건의 실체를 알고 있는가로 나아가고 파스타가 건강에 매우 해로우며 당신을 비만하게 만들것이라는 이야기, 피자와 파스타 소비의 사회적 영향등, 무수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당신은 이런 사람과 식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 뭐하나 확실하게 책임질 이야기는 없이 밥맛만 없게 만들고 당신이 뭘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가 그래서 결국 파스타를 권한다고 하자. 물론 그는 파스타와 피자 모두를 매우 비판하고 난 이후다. 그런 의견에 믿음이 갈까. 그냥 피자하나 먹는다는데 무슨 세계역사씩이나 등장해야 할까.

 

나는 아는 것이 나쁘고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취직을 하고 책을 팔자면 아무래도 더 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더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쓸데도 없는 수없는 기능을 덕지덕지 붙인 제품이 가장 좋은 제품이 아니다.  때로는 적절한 기능을 갖추고 그 기능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명품이다. 

 

사람들이 사회적 시스템을 논할 때도 흔히 사람을 잊어버린다. 더 복잡한 규칙, 더 많은 예외조항으로 소수자를 보호하는 시스템만 이야기하며 모든 것이 시스템의 탓인것 처럼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따스한 인간들이 단순한 시스템과 결합하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다. 시스템을 넘어서 규칙따위 넘어서서 따스한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있고 이해하기 좋은 단순한 시스템이 있는 것이 좋다. 세세하게 뭐든지 법을 만들고 그 법대로 하자는 것은 인간미를 파괴하며 오히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시스템의 구멍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만 된다.

 

그럼 적절한 기능, 적절한 수준의 단순화, 적절한 양의 지식과 적절한 수준의 복잡성을 가진 시스템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시스템이 그렇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학자도 소설가도 예술가도 산책을 한다. 적절한 수준에 대한 느낌과 영감은 평정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평정심을 지켜야한다. 되도록 천천히 판단하고,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일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스피린 하나 먹으면 해결될 아이의 두통에 잔뜩 질려서 앰브란스 부르고 아빠 회사 조퇴하게 하고 펑펑 울면서 소란피우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살다보면 실은 그런 일을 많이 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뒤를 돌아보면 애초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때문에 그 소동을 피우며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버렸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우리에게 책을 팔고 지식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우리의 그 평정심을 깨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권력욕이다. 다른 사람들이 평정심을 잃고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권력욕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저러한 위기에 있다라고 말하는 전문가가 모두 사기꾼은 아니다. 문제는 바로 적절하지 못한 복잡성을 가지고 세상을 시끄럽게만 말하는 엉터리 전문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고 어떤 사람이 가짜인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의미의 진짜 가짜에 대한 정의도 없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가짜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짜일 수도 있다. 그 답은 각자의 내적 외적 필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다시 한번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누가 나에게 진짜 도움되는 사람인지 누가 믿어야 하는 사람인지 누가 가치있는 말을 하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다고 반드시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불완전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좋은 말이 세상에 많은데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 이유. 그건 모두가 미친사람처럼 뛰어다닐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가 좀 더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안에 있는 알맹이가 뭔지 사색해보고 정말 생각해 본 것, 정말 해야 할 말, 정말 들어야 할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것일까에 집중한다면 세상은 훨씬 투명해 지지 않을까. 한 집에서 티브이를 크게 틀었더니 옆 집도 크게 틀고 그 옆 집도 크게 틀어대는 식으로 결국 온 세상이 시끄러워 질 수 있다. 세상에는 기기묘묘한 무수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책파는 사람들, 가르치는 사람들,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시끄럽게 선전을 하고 그들이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동안 세상은 오히려 더 살기 나쁜 곳, 뭔가 진전이 있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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