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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과학연구에서 검증되지 않은 원리의 중요성

by 격암(강국진) 2010. 10. 29.

2010.10.29

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대개 매우 논리적인 일이라고들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자신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과학이란 현상에 대한 많은 관찰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그 데이터들을 잘 설명하는 원리를 관찰에서 도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이론내지 논리의 구축은 어디까지나 알려진 올바른 사실들만을 기반으로 해서 이뤄진다. 

 

물론 이러한 식의 과학연구는 많이 행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과학연구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실은 과학연구에서 핵심적인 부분이 되지 못하며 생각하기 나름에 따라서는 지엽적인 일이라고 까지 할수가 있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 세울 수 있는 가설의 수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모든 가설을 일일히 확인하면서 과학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근본적 발전은 실은 직관과 비논리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원리를 도입하면서 일어난다. 그것들이 모든 복잡성을 해결해 줄뿐만 아니라 가능한 가설의 수를 엄청나게 줄여주고 전체 과학연구 프로젝트에 구조와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없이는 과학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3류과학자고 그것을 모르는 나라가 과학적으로 3류인 나라다.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이전의 메타과학이고 인문학에 속하는 것이므로 철학적 근거가 빈약한 나라가 과학발전을 이루는데 문제를 가지는 원인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칼포퍼가 그의 자서전에서 진화론에 대해 쓴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칼포퍼는 진화론을 믿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은 관찰결과에 따라 반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화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다른 별에 갔더니 지구상에 있는 것과 비슷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데 인간이 없었다. 이 사실이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생물체라는 것을 반증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많이 그런 별을 관찰했다고 해도 인간은 진화로 나타난 생물이다라는 명제를 반증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화론이 틀리다라고 말하고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아니다. 진화론은 과학적 이론 이전의 형이상학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론이나 분명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관찰결과에 따르면 진화론은 창조론과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러운 형이상학이다. 그것은 많은 관찰결과를 간결하게 설명해 주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창조론도 세상을 설명할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자면 매우 복잡하고 정당화하기 어려운 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속의 뇌라는 철학적으로 유명한 예도 들어보자. 이것도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문맥에서는 형의상학적 원리의 하나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환상이다. 우리는 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은 지구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의 뇌가 단지 어떤 기계에 연결되어 환각을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도 세상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이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원리가 우리에게 직관적 만족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속의 뇌라는 가설을 믿는 사람을 미친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진화론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살아있는 생명의 관찰결과뿐만 아니라 화석의 관찰들도 모두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탐구하고 확인해 봐야할 것들을 많이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연구 시스템의 구조아래서 더 작은 연구프로젝트의 의미를 찾고 앞으로 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지금 그것이 형이상학이라고 불렸다고 해서 영원히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형이상학적 원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간결한 원리에 의해 대체될 수 있으며 그런 경우 더 근본적인 원리가 형이상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진화론같은 형이상학은 증명된 과학이 된다. 진화론을 확실하고 엄밀한 과학의 위치에 세우는 확실한 길은 역설적으로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한 그러나 검증되지는 않은 형이상학적 근본원리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길이다. 

 

이미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항상 정의없는 존재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모든 정리들은 공리라는 것들에서 출발되어진다. 공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옳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리는 어떤 개념들로 이뤄진것일까. 그 공리에 나오는 것을 A라고 하자. A가 뭔지 설명하려면 B가 필요하다. 그런데 B는 그럼 뭔가. B는 또 C가 필요하다. 순환논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멈춰야한다. 남자는 뭔가. 여자의 반대. 그럼 여자는 뭔가 남자의 반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이뤄진다고 하면 이번에는 인간이 뭔가로 나가야 한다. 

 

이런 연쇄는 사방에 있다. 과학적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검증된 원리로만 과학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어떤 원리는 너무나 본질적이고 자명해서 가설이 없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논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떤 삼각형이 있을때 그보다 항상 더 큰 삼각형이 존재한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이 옳다. 앞의 말은 가설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이 그걸 자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비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세상에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게 존재하며 그걸 기반으로 일반상대성 이론도 만들어졌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학이론의 엄밀성과 거대함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수학에서 공리를 변경해서 새로운 수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를 조합해서 새로운 정리를 밝히는 일이 큰 업적이듯이 과학에서도 수없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전체 과학프로젝트의 작은 부분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아주 작은 논리적 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중요성과 업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 본질적 과학발전을 일으킬수 있는 국가는 바로 전체 사이언스 프로젝트의 형이상학적 위치를 재점검할 능력이 있는 쪽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 테크니션에 불과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런 형이상학적 분야의 이해나 정보의 유입이 없는 사람은 금세 다음에 뭐를 해야 하는지 알수 없게 된다. 혹은 결국 아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자세한 세부사항의 늪으로 빠져서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써버린다. 

 

우리가 혁명적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역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원리 즉 형이상학을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혁명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이 세상을 뒤흔드는 이유는 그 원리가 우리에게 무한히 많은 해야할거리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주며 그것이 실제 관찰에서 오랜기간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흄이 귀납법에 대해 지적한 것과 같이 제 아무리 많은 관찰결과도 어떤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증명된다는 것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리로부터 해석적으로 도출될 때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한에서는 우리는 진화론을 도출하는 더욱 근본적이고 간단하고 강력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과학연구의 본질, 과학적 발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큰 호텔식당에 취직하는 순간 처음부터 최고 주방장의 일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순반복적이고 최고주방장이 시키는, 그가 가진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의 일들을 하고 배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접시를 아주 열심히 닦으면 최고 주방장이 될거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그는 단지 싸고 쓸만한 접시닦기가 될뿐이다. 마음속에서는 요리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허드렛일을 배워야 한다. 

 

과학연구를 하면서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완전히 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대단한 분, 대단한 그룹에서 할 일이고 우리는 그냥 출판된 연구들을 약간더 확장하거나 약간 다르게 바꿔보는 일, 선진국에서 중요한 질문이라고 던지는 질문을 대답해 보려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듭말하지만 철학적이고 대국적인 사고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요리건 음악이건 과학이건 다 마찬가지지만 허드렛일을 못배워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같은 사람도 시간배분이 필요하고 한 나라안에서는 일의 분담이 필요하다. 테크니션이 무시될만한 것은 아니다. 또 과학적 연구에서 동떨어져 형이상학만 헤매는 사람에게서 어떤 현실적 프로그램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장경험이 없이 형이상학적 말만들기만 하면 전혀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엔진만 있거나 구동축만 있다고 차가 앞으로 가지 않듯이 철학적 기초가 없으면 그래서 그들이 테크니션과 같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고 하지 않으면 발전은 금세 한계에 부딛힌다. 나는 이걸 경험적으로 느꼈다. 나역시 지독한, 남보다 더한 테크니션 편향이었다. 그거 아는가 테크니션의 제자는 더 심한 테크니션 편향이 된다. 얼마되지 않는 가치판단조차 지도교수가 해버리면 더더욱 장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문제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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