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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찌질한 사람들의 찌질한 사연들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1. 8. 19.

2011.8.19

세상에는 소위 막장 드라마라는 것이 많다. 막장언론이나 막장 소설에 음란물도 있다. 아고라 같은 곳에 가면 이런 저런 찌질한 사람들의 찌질한 사연이 잔뜩 올라와서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사실은 막장언론이건 좋은 언론이건 뉴스의 본질이 그래서 인지 방송을 통해서 들리는 뉴스의 대부분은 사악하거나 찌질한 사람들의 막장 인생에 대한 것이 많다.  이런 찌질한 사연들을 듣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피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불신하게 되는 것 혹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웃기는 일을 생각해 보자. 권투중계만 열심히 보는 축구선수가 있다. 그 남자가 중계를 보면서 스트레이트는 이렇게 날려야 한다는둥 풋워크는 이래야 한다는 둥하면서 떠들고 있다. 그러다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축구경기장에 가서 심판이 시합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자 상대편선수에게 강한 스트레이트를 날린다. 물론 이 사람의 축구선수 인생은 그걸로 끝일 것이다. 

 

이런 바보같은 짓은 진짜 바보나 하는거라고 낄낄거릴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중에 이렇게 안 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막장드라마나 아고라에 올라오는 찌질한 고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나는 현실에 그런 악성 시어머니가 존재하고 악성 며느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시어머니가 이래야 하는데 아 며느리가 이래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문제를 일반화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원래 이렇다. 며느리가 원래 이렇게 느끼고 시어머니가 원래 이렇다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 나가기 쉽다. 어떤 해법이나 처세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방 여러가지 그럴듯한 사실들을 들고 와서는 인간이란 본래 이러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때 큰 피해를 입게 된다고 근엄하게 조언해 주는 것이다. 남의 집 남편에게 조언할 때는 여자는 원래 이러니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고 뭘 가르쳐주면 안되고 대화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한다. 여자들도 모이면 남자들이란 원래 이렇다면서 이렇게 저렇게 감시하고 이런 건 허락하면 안되고 이런건 따져야 하고 조언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결국 만들어 지는 건 상호불신이고 인간은 본래 나쁜 놈이라는 논리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증거에 근거해서 그런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당신은 믿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래 늑대눈에는 늑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일단 수용하게 되면 많은 이야기들이 증명이 아닌데도 마치 증명처럼 보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때문에 음모론이 끝없이 퍼지고 피라미드 사업같은게 계속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보자. 당신이 성폭행범이 가득한 동네에서 혼자 길을 걷는 미모의 젊은 여자라면 당신은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남자가 오는 것은 의심하고 되도록 빨리 도망가고 이런 저런 행동은 당신을 납치하려고 하거나 성추행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즉각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여자가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혹은 가족들끼리 있는 곳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어떨까. 상대편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지극히 불쾌감을 느낄것이고 그녀를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것이다. 일단 서로 불신하면 그 불신에 들어맞는 행동은 더 많이 보이게 되고 결국 남는 것은 싸움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찌질한 싸움은 이동네니 저동네니 남자니 여자니 화이트칼러니 불루칼라니 하고 선을 긋고 불신을 만들다가 커져서 일어나는 것이다. 바보들은 스스로 불신을 만들고 상황도 맞지 않는곳에서 만들어진 행동패턴을 기계처럼 실행한다. 

 

그런데 소위 막장 드라마나 찌질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 세상은 이런 곳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한다.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 박스안의 사고라는게 있다. 그 드라마나 이야기에 빠져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절대 보지 못하는게 있다. 징기스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만화를 보면서 징기스칸이 나쁜인간인가 좋은인간인가를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영화나 만화자체가 닫힌 작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찌질한 사람들의 찌질한 사연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찌질하고 우울한 세계로 끌려들어가 이상한 행동패턴을 배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 잘모르고 그 이상한 나라의 행동패턴에 따라 한두마디의 말을 하고, 한두가지의 행동을 한다. 그것이 쌓이고 번지면 모든 것이 망쳐질수 있는데도 그렇다. 

 

나는 이 글에서 왜 우리가 그런 찌질한 사연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는 설명하지않겠다. 각자 생각해 볼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진흙탕세상에서 발을 빼고 살기는 쉽지 않다는것을 자세히 내가 설명안해도 되지 않을까. 중요한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자기를 지키는 일을 끝없이 해야 한다. 바깥에 나가서 더러워지면 집에 와서 손을 씼지 않는가. 목욕도 하지 않는가. 우리는 진흙탕에 둘러쌓여 있고 그걸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자주 자주 목욕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회복해야 한다. 사람을 수많은 방법으로 쳐죽이는 영화에 빠졌었다면 우리는 뭘해야 하는가.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가서 잠시 정신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전쟁터에 있지 않으며 내 주변의 사람과 죽고 죽이는 너죽고 나살자식의 상황에 있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돌릴 필요가 있다. 

 

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를 지키는 일중의 하나는 내 생각을 쓰고 다시 그걸 읽는 것이다. 혹은 조용히 혼자 산책을 하거나 하는 것이고 여행을 하는 것도 좋다. 집안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도 괜찮고 기타를 꺼내 노래를 불러보는 것도 괜찮다. 나를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내주변을 느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타고난 겁쟁이에다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잘 휘둘려서 내 내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용해지면 그저 가만히만 있는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오랜만에 꽃을 한다발 사서 꼽아볼까하는 생각일수도 있고 다 집어치우고 나가서 좀 걷자는 생각일수도 있고 생각은 그만하고 어떤 일을 지금 좀 처리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아내나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나의 상황, 나의 욕구를 느껴야 내가 되는 것이다. 분노하거나 슬프거나 억지로 꼬여진 생각으로 머리가 채워져 있으면 작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어떤 일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을 들을 때면 가끔은 그런 생각이 난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발 좀 돌아오세요.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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