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따분함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2. 9. 17.

2012.9.17

우리는 얼마나 따분해 하며 사는가

 

쇼핑몰에 가서 생활 잡화를 둘러보다보면 별별 것을 다 보게 된다. 여러가지 컵이며 냄비며 접시, 수저는 물론 병따개며 벽걸이며 창문가리개며 그 종류가 어마어마 하다. 그런 것들을 둘러보다보면 나는 문득 나를 포함해서 인간은 참 따분함에 잘 빠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여러가지 사람이 여러가지 상황에 빠져서 살고 있지만 사람이 그저 살아남기위해 먹고 자며 쓰는 것, 그 최소한의 것이야 정말 얼마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은 이렇게 복잡하게 살고 많은 것이 필요로 한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근원으로 가면 따분함이란 녀석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우리는 무엇무엇때문에 이 일을 한다라는 발상, 계획하고 실천한다는 발상에 빠져서 우리가 항상 뭔가를 위해 그것을 하고 있으며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내지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 뭔가는 당연히 인정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대개는 그런 원리로 움직인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종종 훨씬 많다. 우리는 뭔가를 한다. 왜? 그냥 따분할 뿐인 것이다.

 

자동차를 새로 살까해서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모으다보면 자동차 동호회까페같은 곳에 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 자동차는 이래서 좋다는 둥, 자동차에 이런걸 달면 이게 좋다는 둥,( 텐트를 자동차에 설치하면 이젠 온 가족이 놀러갈수 있다는 둥, 크루즈기능이 있으면 장거리 운전에 걱정이 없다는 둥, 커튼 에어백이 없으면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둥, 18인치 휠이 승차감을 좋게해준다는 둥) 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거짓말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는 또하나의 분명한 진실은 자동차의 이런 저런 성능이 필요하다는 것 이상으로 그냥 이런 저런 기능이 있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게 재미있다는 것이며 사실 그것이 더 핵심이라는 것이다. 180킬로로 달려도 안정적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꼭가지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이 그렇게 고속주행을 많이 해야 한다거나 그런 안정성이 중요하기 때문 일 수도 있지만 그럴수 있는 기능을 즐기는 것뿐인 점도 있다. 300킬로로 달리는 자동차를 가지면 뿌듯할수 있지만 그게 왜 그리 중요할까. 따지고 보면 따분함이 저 밑에 있다. 

 

나는 온갖 캠핑장비를 다 갖추기만 할뿐 캠핑은 가지 않는 친구를 알고 있다. 이유는 그 친구의 부인이 캠핑에 질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마치 초원에다가 움직이는 전원주택이라도 짓겠다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경우에 대처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사들인다. 자동차를 텐트처럼 꾸미고 그릇이며 전열기구를 사고 캠핑용 대형배터리며 바베큐 도구며 산악자전거를 싣는 장비를 산다. 그 물건들은 물론 대부분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혹은 기껏해야 간단한 시운전 정도나 해보고 집에 쌓여있다. 그래도 크게 후회하는 편은 아닌데 그 친구는 그런 물건들을 사면서 상상하고 알아보는 즐거움을 가졌던 것, 다시 말해 그 일이 그의 따분함을 날려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쇼핑중독도 결국 사람들의 따분함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음악이라던가 패션이라던가 여행이라던가 하는 많은 활동들도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 평생을 두고 추구할 가치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따분함을 달래는 활동이다. 우리는 그냥 조용히 멍하게 있어서는 너무 따분하니 음악을 듣고, 그냥 추위만 피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는 따분하니 이런 저런 옷을 사입고는 생활에 변화를 준다. 우리 동네만 있어서는 따분하니까 가보지 않은 동네로 여행을 떠난다. 묘한 장식을 한 까페에 가서 수다를 떨거나 뉴욕식이라고 말하는 커피숍에서 이국적 분위기를 즐겨본다. 실로 사람의 삶이란 어떻게 말하면 따분함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나는 따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약간의 금기가 있다. 이 세상에는 따분함 따위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는 따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고 사회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으니 나는 따분하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따분하다라는 말을 자제한다. 하지만 실은 따지고 보면 생활의 상당 부분이 따분함과의 싸움이다. 세상사람들은 종종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의미있는 일들만 하는 사람을 칭찬한다. 그들은 마치 아침에 눈뜨고 잠잘 때까지의 모든 행동에 일일이 그 목적을 말할 수 있을 것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보통사람이 정말 꼭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친 듯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거 없으면 죽는다는 식의 절박함을 가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공포에 질려서 몰려가는 삶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결국 따분함때문에 자꾸 일을 벌이고 그 뒷처리를 하느라 바쁘다. 

 

따분함이 없는 삶, 공포에 쩔은 삶

 

따분함이라는 것을 직시해 보면 따분함은 나쁜 것도 아니고 한가한 감정도 아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창의적인 학문과 예술의 시작은 따분함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문명의 업적이 대단하면 대단하다고 느낄수록 우리는 어느정도  사람들이 참 따분했나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길이의 교향곡이라던가 세계최고 높이의 빌딩, 세계에서 가장 어렵고 긴 계산을 요구하는 과학이론, 무한한 감탄을 주는 치즈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옷을 볼 때 우리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사람 참 무지 따분했나 보다. 필요한 것만, 합리적으로 하는 사람은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오히려 뭔가를 과도하게 불필요하게 파고든 인간이 그런 것을 만든다. 이뤄놓으면 아름답지만 이루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합리적이랄 수 없다. 어느정도 미친짓이었다. 진짜 혁신은 패러다임의 파괴이고 그런 일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미친 짓이고 비합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필경 따분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따분하지 않다고 말할 때는 흔히 공포에 질려있을 때이다. 즉 우리는 이걸 하지 않으면 안되고 만약 이것에 실패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거라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이다.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데 따분할 겨를이 어디있나라는 것이 한가지 예고, 어떤 이론따위에 빠져서 우리가 이러저러한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다 죽습니다라고 생각하며 열성을 부리는 것이 또다른 예다. 

 

그런데 대개 공포에 질려있는 삶에는 창의성이 없다. 공포에 질려있는 삶은 모든 것에 대해 이것은 반드시 이러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삶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삶을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다. 마치 한번 봐서 장면장면을 다 기억하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같은 그런 삶인 것이다. 미래는 다 정해져 있고 실패하지 않는 길은 무척 좁다. 삶이 레드오션이랄까. 살아날수 있는 길은 거의 없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겨우 그저 살아남았을 뿐 뭐하나 재미있는게 없고 정해져 있는 삶이다. 

 

대통령선거때가 오면 사람들중에는 그 대선이 끝나도 그 대선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논리에 너무 빠져서 그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이번에 대통령이 되지 않는다면 안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나중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바에야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생각에도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래서 마치 대선이 끝나는 날 지구가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명분과 믿음과 철학을 다 불살라 버린다. 그런사람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한다는 주장에 쉽사리 넘어간다. 공포에 질려있는 삶이고 창의성이 없는 삶이다. 

 

음악가가 내가 이 음악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절대 안된다는 의무감에서 음악을만든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나는 싫지만 이걸 해야한다는 발상을 하는 것이다. 의무란 누구에게나 싫은것, 부담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실은 빨리 집어치우고 싶다, 빨리 끝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정말 좋은 음악, 새로운 음악이 나올까. 누구나 좋다고 말하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해도 아냐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같아, 한번 더 해볼까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진짜를 만드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윤오영의 방망이깍던 노인이라는 수필에서도 우리는 이걸 배웠다) 

 

따분함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따분함 따위는 모르고 항상 해야할 일을 죽 알고 있으면서 정해진 사고방식으로 돌진해 나가는 사람이야 말로 열심히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일 수 있다. 무식한데 부지런하기까지한 사람중에는 위험한 사람이 많다. 빨갱이가 되어서 양민을 죽이던 사람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 빨갱이 잡겠다고 또다시 죄없는 사람 잡아다 죽이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게 너무 많다. 그러면서 종종 세상에서 자기가 모든 걸 제일 잘 알며 내가 해봐서 다 안다고 말한다.  

 

따분함을 올바로 즐기기

 

이렇게 따분함이란 금기시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나치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따분함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런데 따분함이란 왜 생기는 것일까.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그의 책 교육의 목적에서 헤겔의 정반합에 불만을 표하며 인간의 발전주기를 로맨스의 단계, 정밀화의 단계 그리고 일반화의 단계로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따분함이란 우리가 일반화의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따분함에 제대로 대처하고 그것을 즐기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독후감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을 읽고) 에서 인간의 3단계 발전주기에 대해 요약한 것을 좀 인용하도록 하자.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식의 단계-데이터 축적의 단계-일반화의 단계로도 말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식의 단계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단계다. 이것은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어지는 단계라고 말할수 있고 하나의 유기체가 자기의 벽을 허물고 보다 더 큰 유기체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단계로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연애나 고전읽기나 과학이나 어떤 스포츠의 세계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해보자.  전에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것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신은 문득 그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당신은 요즘 스스로의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당신은 이제 그런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맨스의 단계고 인식의 단계다. 

 

세밀화의 단계는 그 인식이 계속되어 더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단계다. 로맨스의 단계 혹은 인식의 단계에서 당신은 서투른 초보자일 뿐이며 아직 과거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에 많은 경험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얻는 단계는 아니다. 책읽기라면 당신은 아직 어느책이 재미있는지 어느책은 재미없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어떤때는 재미를 느끼지만 어떤때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밀화의 단계 혹은 데이터 축적의 단계에 이르르면 당신은 이제 뭘해야 하는지 잘알고 있다. 당신은 빠르게 정보를 축적한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실패는 사람들이 주로 교육이 세밀화의 단계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교과서나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주입받는 행위가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밀화의 단계는 로맨스의 단계를 거친 경우 통쾌하고 즐거운 것이 된다. 그리고 유기체의 성장의 경우는 빠르게 몸이 부풀어 오르는 단계다. 그러나 이런 세밀화나 데이터축적은 영원히 계속될수 없다. 결국 경험의 양이 너무 많아지면서 당신은 이제 혼돈을 느끼게 된다. 

 

일반화의 단계는 말하자면 지식압축의 단계다. 세밀화의 단계를 통해 배운 것들은 일반론적 이론을 통해 압축된다. 일단 그런 경험과 지식들을 모두 일반론적인 이론의 관점에서 볼 수있게 되는데 성공하고 나면 개개의 경험들은 일반론적 지식의 한 예에 불과하게 되고 다시 혼란스런 머리는 정돈을 이루게 된다. 이 일반화의 단계가 오랜동안 지속되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흥미를 느끼는 로맨스와 인식의 단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화의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 알아버린 것이다. 아니 다 안다고 느낀다. 우리가 보고 듣고 축적한 세계에 대한 정보들을 뻔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우리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동시에 그만큼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폭이 좁다는 뜻일 수도 있다. 청소년도 초등학생도 인생이 따분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벌써부터 인생이 시시하다고 야단인 아이들도 많다. 

 

무슨 이유건 일반화 단계의 마지막에 이르르고 다음번 로맨스의 단계가 시작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루한 삶, 따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따분함에 대해 대응하는 잘못된 견해는 인생이 세밀화의 단계의 연속으로 이뤄져야 하며 그것이 주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견해다. 외적으로 볼 때 세밀화의 단계나 일반화의단계 초기단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많은 성취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화의 단계를 마치고 로맨스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화의 단계를 넘어 다시 로맨스의 단계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우리는 외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세밀화의 단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따분함에 마주했을 때 자꾸 그저 이제까지 성실하게 열심히 했던 것을 더 열심히 하려는 것은 올바른 자세일 수 없을 것이다. 문득 해왔던 것이 큰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린 그것이 단순한 피로의 누적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인생의 벽에 도달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가 일반화의 단계에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우리가 아는 것에 골몰해서는, 우리눈에 보이는 것에 골몰해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제 아무리 오래 쉬어도 휴식이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다음번 로맨스의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보이지 않던 것 너머에 있는 광대한 세계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세계를 여행해보고 하는 일도 필요할테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고요하고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에 얽매이는 것도 나쁘지만 뭔가를 하면 될꺼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도 도움이 안된다. 보고 듣고 먹기도 전에 우리는 에이 그건 이렇잖아 전에 다 해봤어라고 새로운 세계에 눈감아 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볼 때 이미 우리는 선입견속에서 알고 있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를 선입견없는 상태, 예민한 마음의 상태로 만들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봐도 우리는 우리가 보던 것만 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진리는 코 앞에서 외치고 있는데 우리가 외면한다는 말을 듣는데 이것이 그것이다.

 

따분함의 단계는 창조하는 사람들이 벽에 부딪혔다고 말하는 단계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고 도무지 뭘해야 될지 모르겠는 상황, 다 하나마나인것 같은 상황이 따분한 일상을 만든다. 난 어제 했던 헛 짓을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분함은 괴로운 것일수 있다. 아니 괴롭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따분함을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그 방법은 대개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이다. 뭔가 자극적인 것을 계속 제공하면 마음이 둔해진다. 그러면 따분함이 날아간다. 술을 먹고 친구랑 내용도 없는 잡담에 빠지고 막장드라마라도 보고 있으면 따분함이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따분함이라면 즉 성장을 위해 넘어야 하는 벽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은 발전을 느리게 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해결책이 못된다. 따분함은 결국 돌아오고 세상은 시시해 보이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자극들도 시시해 보이게 된다. 

 

자신의 벽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그 벽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찾는 사람도 있다. 확실한 것은 따분함이란 하나의 비약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하는 것도 없는 일상이라고 좌절하지는 말아야 겠다. 삶은 항상 세밀화의 단계만으로 이뤄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분함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갈 생각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몸담았던 세계가 이제 좀 비좁게 느껴지고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 어디로 가는가가 인생을 크게 결정한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챙기면서 다음번 비약이 나에게 도달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영영 우리의 벽을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분한 일상은 계속되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죽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이 따분함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제대로 대처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는다  (0) 2012.10.18
세탁기의 역설  (0) 2012.09.24
이름없는 호의  (0) 2012.09.10
예술작품과 삶  (0) 2012.09.07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교육  (0) 2012.09.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