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24
뉴스를 읽다보니 기사의 한 부분에서 세탁기가 생각만큼 시간을 절약해 주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세탁기가 생김으로해서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아마도 불필요한) 빨래를 하게 되어 실제로 세탁시간을 크게 절약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읽고 보니 이 세상에는 수많은 비슷한 종류의 역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나도 전에 싸구려 물건의 역설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생활수준은 올라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싸구려 물건을 만들어 내서 돈을 절약하는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활수준은 그다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상 심지어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는 걷는 일을 줄여준다. 세탁기처럼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생김으로해서 인간은 좋아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전같으면 걸어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이 상사의 명령을 듣는 월급쟁이 인것이다. 전같으면 서울서 부산까지 다녀오라고 하면 엄청난 일이었지만 이제 자동차를 타고 하루만에 다녀오라고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당신은 부산출장을 자동차때문에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쁜가?
이런 역설들은 우리 주변에 끝도 없다. 스마트폰은 과연 우리의 시간을 절약해 주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사람들이 발표할 때 쓰는 파워포인트같은 발표 프로그램은 발표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 주는가? 비싸고 호화로운 아파트는 과연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가?
그 역설의 핵심이 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가지가 있는 것같다. 하나는 나의 변화에 대해 잊기 쉽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사회적 압력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다.
나의 변화
빨래를 해주는 세탁기가 있으면 세탁하는 일에서 이론적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자신의 변화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앞에서 말한대로 쓸데없는 빨래를 점점 늘린다. 그래서 결국은 기계에 의존하는 것만 늘어날뿐 빨래를 하는 시간자체는 줄어들지 않을 수 있다.
다리가 약해진다고 해서 자동차타기를 멀리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차가 없을 때는 왠만하면 걸어가던 거리를 자가용을 사게되면 일일이 자동차를 타게 되는 일은 흔한 일이고 그때문에 건강을 잃게되는 사례도 많다. 즉 자동차는 우리를 편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그런 환경에서 우리는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같으면 불평없이 걸어가던 거리를 이제는 꼭 자동차를 타야 된다. 자동차는 물론 경우에 따라 시간을 아끼게 해주지만 자동차관리를 하는 것때문에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면도 있다.
차를 타면 다리가 약해진다 같은 우리를 바꾸는 효과에 대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변화는 소리없이 온다. 그리고 나에게만 오는게 아니라 주변사람들 모두에게 오기때문에 결국 충분히 알기는 어렵다. 즉 '나도 알아 그런건. 하지만 그럼 모든 걸 다버리고 원시인처럼 살라는 말이야? 어쩔수 없는거 아냐. 조심만 좀 하면 되지 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쉽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그걸 아는게 아니다. 우리 삶에 존재하는 군더더기를 빼기 위해서는 깊은 사색과 끊임없는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은 문화운동이다. 왜냐면 결코 '그래 모든 문명적인 것을 버리고 원시인의 삶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게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명적인 것을 버리지 않되 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흑백론적으로 원시인이냐 아니면 이웃처럼 사는 것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이해해서는 결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결혼을 하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면 배우자와 강력한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먹고 자는 사람을 하나 구하는 것이 아니며 결국 나를 바꾸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한다는 행위하나가 결국 수많은 일을 만들어 인생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다. 그러니 어느 경험없는 젊은이가 결혼에 대해 '나도 알아 그런건'이라고 재빨리 말한다면 오랜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대개 그 사람이 결혼의 영향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거라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많은 것과 결혼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탁기와 스마트폰과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집과 자동차와 결혼하고 있다. 그것들은 다만 좀더 은밀하게 우리를 바꾼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우리는 종종 우리가 그 결혼에 대해 완전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결혼도 우리를 바꾼다. 생각만큼 우리가 완벽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남녀간의 결혼은 화학적 결합처럼 양자간의 궁합에 따라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주곤한다. 객관적으로 착하고 좋은 남자나 여자랑 결혼한다고 그 결혼이 반드시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될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유하는 물건들은 우리의 자아와 화학적으로 결합하고 우리를 바꾼다. 그 결과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압력
문제를 훨씬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결혼이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많은 부분이 사회적인 일이다. 하루에 오렌지를 손으로 따면 천개밖에 따지 못하지만 기계를 쓰면 수십만개를 딸수 있다고 하자. 이것은 분명 발전이지만 만약 결국 노동시간이나 강도로 보았을때 차이가 없다면 이 발전은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어차피 하루 8시간이나 10시간 일하는 것이 똑같고 기계의 발명으로 오렌지 값이 떨어져서 월급도 꼭같다면 손으로 일하는 대신 기계로 일하게 되었다고 해서 뭐가 그리 기쁜 일일까.
기계를 써서 많은 것을 생산하게 되면 더 풍요롭게 살지 않냐고 대답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답이다.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생산된 것들이 균등하게 쓰이는가? 서구 중세의 농노는 과연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 공장노동자보다 더 열악하게 살았을까? 전태일이 자살하던 시대의 한국의 노동자는 과연 조선시대의 농부들보다 더 행복했을까? 우리는 그런 불행한 시대의 노동자가 아니니까 괜찮나. 정말 우리는 괜찮나? 자살률이 전세계 1등이고 출산율은 전세계 꼴찌여도 우리는 괜찮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냥 많은 것들에게 대해 그건 원래 그런거라고 세뇌되어 괜찮다고 느끼는 것뿐 아닌가? 사회는 종종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우리는 정말 눈을 뜨고 있는거 맞는가?
요즘 빚내서 집을 산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인 하우스 푸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들은 부동산 불패시절에 지금보면 거의 무모해 보이는 빚을 지고 집과 결혼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대부분 괴물인건 아니다. 대부분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사회적인 목소리가 그들의 상식을 흔들었을 뿐이다. '요즘 집사는데 X억쯤 빚안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도장만 찍으면 아파트를 사게 되고 나중에 싫으면 언제든지 팔수 있다. 이런 작은 아파트에 살면 사람들이 비웃는다. 우리 남편은 그래도 회사중역인데 사회적 지위가 있지 아파트가 xx평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목소리가 그들의 상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종종 그건 그냥 원래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강남의 10억짜리 재건축예정 아파트를 6억이나 빚을 내서 사는 한 아주머니는 우리같은 힘없는 중산층, 보통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은 그저 보통사람이라고 강조한다. 하우스푸어가 아니더라도 결국 평생 뭘했나 봤더니 집과 결혼하여 그 집한채를 가지고 아둥바둥하다 늙었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많다. 언젠가 후세의 한국인들은 집을 사겠다고 노동에 시달리며 살았던 한국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노동자의 암흑기라 불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물과 올바로 결혼하기.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머릿속에서 '대안이 뭔가. 그래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인가?'라는 말이 계속 들려올 것이다. 그 목소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기성사회의 목소리다.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친숙한 세계로 돌아오라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우리는 원하지 않는 결혼의 불행한 노예가 된다. 그럼 뭘해야 할것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먼저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사물과의 관계를 결혼이라고 부르자면 우리는 수많은 것들과 결혼상태고 잠재적으로 우리와 결혼상태가 될 수많은 것들에 둘러쌓여 있다. 내가 보기엔 먼저 그런 관계들을 결혼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집에 케이블 방송이 있다 없다, 우리 집 거실에는 큰 티브이가 있는가 아니면 큰 책장이 있는가 하는 것이 다 결혼의 형태다. 우리는 케이블 방송과 결혼하고 티브이와 결혼하고 책장과 결혼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방용 칼이나 냄비를 사면 그 칼과 냄비와 결혼하는 것이고 커피메이커를 사면 그 커피메이커와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은 우리를 바꾼다. 당신이 아주 멋진 주방용품을 가지고 있다면 그 주방용품은 당신에게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줄 수 있다. 당신이 청바지와 결혼하는가 양복정장과 결혼하는가에 따라 당신은 그 옷들이 어울리는 곳에 가는 버릇을 가지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결혼상태를 가지게 되면 물건의 노예가 되기 쉽다. 모든 물건들이, 당신 생활의 유무형의 많은 형식들이 당신을 당겨대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나를 잃어버리게 되기 쉽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당신은 불필요하게 힘을 쓰고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커다란 짐을 끌고 살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삶을 단순화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무조건 단순하게 살라,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집을 사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집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예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집이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다. 날마다 전원주택을 관리하는 두사람이 있어도 한 사람은 집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고 한 사람은 불쌍한 노예일 수 있다.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케이블방송도 심지어 책도 학위도 친구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과 올바로 결혼하는일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컵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컵을 하나 샀다. 그 컵으로 맥주를 마시고 물을 마신다. 탁자위에 올려놓고 구경하기도 하고 세제를 풀어서 씻어주기도 한다. 그 컵과 함께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컵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지, 그 컵이 우리에 의해 어떻게 바뀌는지를 느낄 필요가 있다. 생각하는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생각은 상상력을 빼앗아간다. 우리의 결혼은 행복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지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놓아주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 가까운 관계라던가 너무 관계가 멀다던가 하면 바꿔주는것도 필요하다. 관계란 결국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렇게 하기에 우리가 너무 가진 것이 많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삼거나 일회용 컵처럼 소비하고 만다. 거기에는 자기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다. 식상한 인간의 이미지만 있다. 그것을 입거나 그 안에 살거나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느끼는 것보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배우들을 느끼고 광고속에 나오는 남자나 여자를 느낀다. 아름다운 모델이 차고 있는 팔찌를 보면 그녀에게 그것은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그저 나이기 보다 그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식의 소비나 소유가 많다. 그것이 세상과 우리와의 결혼이 종종 불행한 것이 되어가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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