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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는 것

by 격암(강국진) 2012. 11. 26.

2012.11.26

내가 좋은 하는 소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아주 멋진 분위기를 가진 산이나 계곡에 가서 감탄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사진을 찍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은 대개 그 사진에 실망한다. 분명 그 현장에서는 뭔가 멋진 것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서 보면 그 안에 있는 것은 대단할 것이 없다. 

 

또다른 예는 도시에만 사는 사람이 시골에 가서 느끼는 것이다. 어느 도시 사람이 한적한 도로를 따라 나있는 시골 거리를 좋아했다. 그는 그 거리를 다녀오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나고 그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시로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질문을 받는다고 하자. '거기가 좋다고? 그래 거기에는 뭐가 있는데?' 라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뭐하나 이거라고 말할만한게 없다. 녹지가 웅장한 것도 아니고 산세가 멋진 것도 아니며 장대한 폭포나 호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식당이 감탄할만하지도 않고 무슨 성당이나 절이 있어서 구경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면 좋은데 돌아와 생각해 보니 뭐가 좋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니 별 것도 없는데 괜한 착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것은 너무 커서 보려고 하면 오히려 더욱 보이지 않게 된다. 너무 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아주 크다는 의미일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아주 많은 것들이 동시에 연결되어지고 조화되어서 생겨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우리는 분위기가 좋다는 둥 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그걸 표현하기도 한다. 

 

보려고하면 보이지 않게 되는 이유는 의식적으로 뭔가를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눈이나 관심이 머무는 곳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이나 개념으로 집어 내려고 한다. 어떤 맛있는 음식을 한수저 먹었을 때 그 맛과 향과 촉감이 너무나 새로운 것이라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았다고 하자.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았다면 그냥 그 느낌을 그대로 기억하면 좋을텐데 우리는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아삭거린다는 둥, 쏘는 느낌이라는 둥, 부드럽게 녹는다는 둥한다. 그런것들이 유용한 이유는 많다. 남에게 설명을 하기 쉽고 자기가 기억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개념화는 동시에 모든 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고 개념화한대로만 기억하려고 하는 특징이 있으므로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제한하거나 우리가 가진 개념에 지배당하게 만든다.

 

에지있다는 둥, 시크하다는 둥 하는 외국어가 자주 쓰일 때가 있다. 거기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 것같다. 밝은 면은 그런 외국어가 자주 쓰이는 것에는 어느정도 지금의 한국어나 한국어적인 개념으로 잘 표현되지 못하는 감성이 있는데 그게 그 단어로 표현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 단어를 쓰면서 뭔가 쾌감을 느낀다. 말이 척척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유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행은 어떤 의미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남이 만든 개념에 지배당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몇 개안되는 틀을 가지고는 보이는 것마다 남이 준 그 틀에다가 찍어 붙인다. 그래서 섹시하다라는 표현이 원래 뭐였는가따위는 잊혀지고 심지어 가족끼리 서로 섹시하다고 하고 물건도 섹시하다고 하며 좋다라는 표현의 이음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이건 사소한 일일까? 그것 좀 보지 못하면 뭐가 어때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서 여러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관심 많은 지자체 가꾸기 운동과 대선에 대해 말해보자. 우선 동네를 가꾸고 지역을 가꾸는데 있어서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돈만 잔뜩 들여서 그 지역을 마치 여기저기 유명한 곳의 짜집기처럼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 수십편을 골라서 그걸 짜집기로 맞춰본다면 제 아무리 잘짜맞춰도 그저 그럴뿐이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당연히 자기 색깔이 없고 그런 지역가꾸기에도 자기 색깔이 없다. 뉴욕에 가봤더니 브런치 식당이 있어서 분위기 좋더라 우리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동네 이부분을 뉴욕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한다면 잘되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짝퉁이고 둘째로 억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높이 들며 마지막으로 다른 동네부분들과의 조화문제, 지역민과의 조화문제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오페라를 보지 않는 동네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세워놓으면 아 좋다라고 할 수 있을까? 

 

오세훈과 이명박 전임서울시장이 서울가꾸기를 어떻게 했는가. 전통있던 인사동을 깨끗히 중국산 기념품만드는 곳처럼 만들고 사방을 뒤집어서 새 아파트 세우고 괴상한 건물들세우고 하는 것을 했다. 종로 피맛골 같은 곳은 없애버리고 말이다. 역사를 가진 청계천도 결국 아무 역사가 없는 어항이 되었다. 그들은 도대체 뭘 추구하고 있었을까? 뉴욕의 짝퉁인가 파리의 짝퉁인가.

 

대선에 대해 말해보자. 대선이 되면 사람들은 흔히 대선후보들이나 화제가 되는 선거이슈에 대해 치열하게 분석하고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절반만 맞는 것이다. 그림을 가까이 가서 보는 것 이상으로 그림의 전체를 보는 것을 함께 하지 않으면 질문을 던지고 비교하면서 급격히 전체 그림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이명박 안철수 노무현은 모두 같아 보이게 된다. 몇월 몇일 어디에서 뭐라고 말했다더라라고 하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언론의 조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전에 문맥을 잃어버린 몇몇 사실에 근거하여 전체를 보기시작하는 것은 나름의 위험성이 있다. 자칫 전체적인 동기나 목적을 잊게 된다. 일단 사람들이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통 이해하지 못한다. 자잘한 질문들이란 때로 큰 독이다. 진실이야 말로 여러 층위로 되어 있으며 때로 작은 진실들이 가장 큰 독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차피 모든 진실을 다 알 수 없다.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로 말하자면 큰 그림을 대충 스케치하고 작은 부분을 조금씩 더 채워나가는 것이지 한구석을 완벽히 다 그리고 다른 부분을 채워나가기로 하자면 영원히 그 구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휴식장소였던 분위기 좋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동네에 다녀온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말한다. 야 거기 뭐가 있냐. 이거도 없고 저거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시골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골을 버린다. 심지어 때로는 그 시골을 파괴하는것에 대해 동의한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는 후추를 너무친 음식같이 천박하고 우리를 해치는 장소를 대신 간다. 소중하고 거의 공짜고 매우 효과 좋은 어떤 것은 버리고 가치없고 매우 비싼 값을 치뤄야 하며 지속되는 효과도 별로 없는 것을 선택한다. 대통령이나 휴가지만 그런게 아니다. 친구나 스승을 선택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가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뒤로 하고 별 가치 없는 친구나 스승에게 달려가지 않는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이래서 위험하다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단지 보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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