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3
예전에 장자의 독후감에서 (장자를 읽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심재라는 것은 장자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언급되어지는 것중의 하나다. 심재에 대해 독후감에서 몇단락 인용해 보자.
세상을 구하려고하는 사람은 이제나 옛날이나 많다. 안회도 그와 같아서 위나라로 가서 젊은 혈기에 권력을 남용하는 어리석은 왕을 깨우쳐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안회를 공자가 말리면서 한마디로 너 가서 뭘하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공자에게 안회가 근면히 열심히 하면 안되냐고 하자 공자는 안된다고 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옛 성인들의 말에 빗대어 말하며 나를 숙이면서 따르겠다고 하니 공자는 그것도 안된다고 한다. 마침내 안회가 모르겠다고 하니 공자가 말하는 것이 심재하라는 것이다.
심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이니라. (인간세)
애매하게도 들리는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옳은 소리도 없다. 다시 말해 행복해지기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사는 방식은 나와 틀리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음식만 먹는데 그 사람은 중국음식만 고집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중국음식이 기름져서 이 사람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서 중국음식만 먹지 말고 기름기가 덜한 한국음식 좀 먹어보라고 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을 아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간단해 보이는 일이 종종 참으로 어려워진다. 사실 중국음식만 먹는 사람이 한국음식 한번 먹어보는 일은 실제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지만 여가를 즐긴다던가, 인생의 계획을 세운다던가,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한다던가, 더 나아가 자본주의와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문제로 나아가면 즉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소수파적인 견해가 될수록 사람 사는 방식의 변화, 안하던걸 한번 해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느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고부간의 갈등이 있고, 지역감정도 있고, 세대간의 갈등도 있다. 온갖 인간사이의 갈등은 이 간단해 보이는 일과 크고 작게 연결되어 있다.
심재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안회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법하다.
먼저 중국음식이 왜 나쁜지 이리저리 따져서 말해 주면 안되겠습니까?
안된다. 세상일에 100% 괜찮은 일은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다. 소금도 몸에 안좋고 하얀 밀가루도 몸에 안좋고 기름도 않좋고 후추도 안좋고 다 안 좋다고 말하면 다 안 좋다. 그러니 누가 가서 이러저러해서 안 좋다고 말해봐야 대개 잘 안된다. 여러분은 짜장면의 광적인 팬이 짜장면 열량운운하는 소리듣고 마음 바꾸기 쉽다고 생각하는가?
그 다음에 안회가 말할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럼 유명한 황수관박사라던가 KBS, MBC같은 공중파 방송에서 중국음식이 몸에 안 좋다고 말했다고 말하면 안되겠습니까?
안된다. 이 말은 자기 말로는 권위가 안서니까 유명한 누군가의 말을 빌려서 내가 듣기에 중국음식이 안 좋다더라 유명한 누군가가 한국음식 권하더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책이든 누구 이름이든 방송국이든 그런 걸로 줄줄이 늘어 놓아 누가 설득이 제대로 되던가? 정치판에서 주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방법을 많이 쓴다. 무슨 책, 선진국 어디, 무슨 무슨 대학교의 교수가 하는 식으로 숫자와 이름을 나열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바뀌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잘 안바뀐다.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말을 사용하지 말을 믿고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바꾸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기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다.
그 다음에 안회는 이렇게 말할 법하다.
그냥 바꾸자고 하면 거부감도 느끼고 저항을 할테니 그 옆에 가서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중국음식최고입니다라고 계속 말해주면서 그 사람 의견대로 하고 그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하다가 가끔 가끔 내 의견을 내면 어떻겠습니까.
안된다. 이렇게 어렵게 해도 겨우 그 사람과 의가 상하는 것이나 면할 정도다. 결국 오히려 한국음식 먹는 네 삶이나 망가지고 말뿐 그 사람하자는 대로 하다가 진전은 없는 경우가 고작일 것이다.
이렇게 까지 안된다고 하자 현대의 안회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부모님 모시는 것에서 친구와 만나고 자식을 키우고 이웃과 살아가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개인대 개인뿐만 아니라 개인대 사회로 정치적인 사회적인 운동을 벌이는데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다. 항상 안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많은 경우에 우리는 벽에 부딛힌다.
시시비비를 따져도 안되고 어떤 권위있는 지식을 동원해도 안되며 상대방이 옳다라고 하면서 비위를 맞춰줘도 잘안된다. 만약에 상대방을 무시할수 있다면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라 자기가 그렇게 산다는데 어쩔수 없지 하고 포기를 할수도 있지만 그것이 부모님이나 자식이나 배우자처럼 가족이거나 내가 사랑하는 조국의 사람들이거나 하면 그래 관둬라라고 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알콜중독으로 나날이 기력이 떨어져 간다고 하자. 그런데도 아버지가 나는 술없으면 불행하니 상관하지 말라고 한다고 자식이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이니 그렇게 하십시요라고 신경을 끊을 수가 있을까?
한국을 사랑하는사람이 있다고 하자. 자기가 보기에 한국은 권위주의적인 문화때문에 불투명성이 늘고 그때문에 온갖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이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좀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한국사람들은 대다수가 나는 이게 좋다, 사람은 본래 이렇게 살아야 맛이다라고 말한다. 계속 그렇게 하면서 비극을 양산해 낸다. 그런다고 그래 니들은 그러다가 죽던 망하던 그렇게 살아라라고 쉽게 말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생긴다. 우리의 행복은 상당부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다 쳐내고 혼자 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똑같은 고민을 공자나 장자도 수천년전에 했을 것이다. 장자가 안회라는 이름을 통해 말하길 이것저것 통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심재하는 방법밖에 없다. 심재의 의미는 장자가 쓴 것안에 있다. 그걸 내가 이해한 식으로, 내가 쉽게 표현할수 있는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선입견없는 감수성을 가져라라는 말이 된다.
시시비비 따지지도 말고, 잘난척, 아는척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비굴하게 계속 아부해서 어떻게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도 말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는 계산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뭘 할 수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면서 상대방에게 오직 나로서 응답해 준다. 나를 붙잡고 그걸로 설득이 되건 말건, 이야기를 들어주건 말건, 내가 나로서 있으면 결국 상대방의 응답이 있을 것이고 응답이 없어도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장자에 보면 하나를 붙잡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 나를 지킨다는 이야기다.
아주 어린 학생이 아니라면 살면서 사람때문에 답답한 일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결혼같은 걸 하려고 하면 다들 지뢰를 밟을까 조심스럽다. 어디서 어떤 선입견과 집착이 터져나와서 부질없이 나는 이거 아니면 안되겠다고 하는 두개의 생각이 정면 충돌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종종 안된다고 하는 안회의 방법을 택한다. 섣불리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의가 상하고 잘난체 한다는 말이나 듣거나 오히려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게 나선다는 모욕이나 당한다. 어떻게 일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여기 저기에 머리숙이며 네네 하면서 상대방 요구하는거 다 들어주다가 인생이 수렁에 빠지듯이 힘들어 진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고생하는거 알아주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받는 사람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가슴에 울화만 쌓인다. 그래서 사랑하다 야속함에 사랑이 미움이 되는 일도 흔하다. 예를 들어 사회운동같은 거 하다가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우리 나라 국민은 절대 안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남편도 친구도 부모님도 자식도 마찬가지다. 이래서는 행복해 질 도리가 없다.
결국 우리는 남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입장바꿔서 생각을 할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남의 발을 밟고서 뭐라고 하면 진작에 아프다고 하지 그랬어, 나는 아픈지 몰랐어라고 하는 식의 무감각이 정작 입장바꿔서 남이 자기 발을 밟으면 펄펄 뛰는 몰지각과 만나면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것이다. 자기를 지키고 남을 느끼고 존중하고 사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산으로 가서 혼자 사는 수 밖에 없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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