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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현대와 나로부터의 유체이탈

by 격암(강국진) 2013. 5. 9.

2013.5.9

유체이탈이란 누군가가 누워있는데 그 사람에게서 영혼같은 것이 빠져나와서 하늘에 둥둥 떠있고 자신의 육체를 쳐다보는 그런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유체이탈을 아주 잘 하는 것같다. 나로부터 분리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의 언어생활에서 동사형이 줄고 명사형이 늘어난다는 것을 지적햇다.  그런 어법은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에서 방관자처럼 만든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던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에게 너의 사랑을 바친다던가 나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다라던가 산다는 동사형 대신에 사랑이라던가 삶이라는 명사형을 씀으로써 우리는 주체가 필요한 동사형과는 달리 홀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와는 상관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된다. 나는 죽어도 나의 사랑은 영원히 남을거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것은 세상이나 삶과 나를 분리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언뜻보기에 대단한 일이 아닌 것같지만 큰 차이를 만들수 있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하는 어떤 것을 객관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별다른 고민이 없을 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서 도망가게 한다. 이 자동차를 어떻게 느끼니라고 묻는 것과 이 자동차에 대한 너의 느낌은 어때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상 같지만 너의 느낌이라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우리는 너의 느낌 나의 느낌 하는 식으로 마치 느낌이란게 내가 가진 지갑이나 신발같이 나와 떨어져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리는 반드시 명사형의 사용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보다 기초적인 단계에서도 일어난다. 이는 명사 형용사를 따지기 전에 일어나므로 더 근원적이고 무수히 많은 말들이 만들어져서는 인터넷 같은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퍼부어지는 요즘 더욱 심각해 지는 문제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체험을 말로 표현해 낸다. 남과 소통하기 위해서 혹은 기록의 형태로 스스로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이나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 지금도 이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는 내가 모르는 말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했다. 예를 들어 생깐다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았다.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속어로 인터넷 사전에도 등장하는 이 말은 무시하거나 모른척 피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풀어서 표현한 것과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서로 다른 어감을 가진다. 앞으로는 그 아이를 무시하겠어라고 적는 것과 앞으로는 그 아이를 생까겠어라고 적는 것은 다른 효과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뭐라 한두줄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의미와 체험과 느낌을 우리는 한단어로 집약하고 그걸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물론 편리함과 통쾌함을 느끼지만 물론 동시에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감정과 행위를 표준화하고 축소하는 것이다. 모든 사과가 서로 같지 않지만 다 사과로 불리듯이 네가 생까는 것은 내가 생까는 것과 같지 않다. 생깐다같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말의 경우 아직 그 의미가 단단히 굳어지지않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보다 강하게 느끼지만 원칙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안전하게 쓰고 있다고 느끼는 평화나 사랑이나 인사나 시원하다같은 모든 친숙한 단어들도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말이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낸다. 우리가 우리를 보면서 그것을 말이라는 표준화된 틀에 끼워 맞춘다. 말이란 매우 편리하고 중요한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란 하나의 함정이며 틀이라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다. 

 

말이란 그렇게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간단한 언어활동을 하는 미개인들이나 과거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많은 면에서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일 수 있었던거 아닐까? 그들은 수없는 지식과 말들로 자기와 세상사람들을 세밀하게 분해하고 조립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들이 만들어 내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습관을 가질수 있지 않았을까? 

 

나역시 이런 저런 말들을 던져내는 사람이지만 세상에는 수없는 말들을 던져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그 단어들안에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의 답도 그 단어들을 조립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문제는 바로 그 단어들 자체일지 모른다. 그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단어카드로 만들어진 로보트 같은 것으로 대체해 버렸다는 것을 잊었는지 모른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외국어교육을 강조하고 3개정도의 언어는 구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한가지의 언어만을 쓸 경우 어떤 의미에서 그 언어가 만들어 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친구가 뭔지 깊이 알려면 프랜드와 토모다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말들을 배워서 상호비교함으로써 하나의 언어가 가진 틈새를 느끼라는 말이다. 

 

우리가 번역을 해보거나 외국서적을 원서로 읽어보면 느끼는 것으로 하나의 외국어로 만들어진 문장은 모든 의미가 번역되어지지 않는다. 두보의 시를 한문으로 읽은 것을 한글로 번역해서는 절대 그 뜻이 다 번역되지 않는다. 생깐다는 말이 다른 단어로 풀어서 설명한 것과 같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국어만 쓸 때는 우리는 마치 표현못하는것이 없는 것같고 그것은 영어나 일본어만을 쓰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우리의 말들은 결국 틈새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틈새들에 대해 장님이 되게 한다. 

 

그 틈새를 메꾸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바로 화이트헤드가 말한대로 하나 이상의 언어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생각을 한국어로 해봤다가 영어로 해봤다가 해보면 거기에 차이가 있다. 또한 소위 교양이라고 말해지는 넓은 여러 방면의 지식 즉 과학이나 음악 예술 정치 경제등 여러 방면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비슷한 방법일 것이다. 다른 학문이란 다른 언어를 개발해 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참선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닌가 한다. 꼭 참선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어를 가지고 맹렬히 우리의 머리를 돌려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세상을 언어없이 느끼는 시간과 작업이 필요한 것같다.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느끼는 시간, 느끼는 여유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책이나 인터넷에서 읽은 것의 노예가 되고 장님이 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말들이 세상에 있어서 오히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책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다.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좋다고 말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쁜 책은 안읽는게 좋다고 말하고서 세상의 대부분의 책, 특히 돈을 위해 쓰는 책들은 전부 나쁜 책이라고 말한바 있다. 현대인들은 돈을 위해 쓴 책, 돈을 위해 만들어 지는 광고나 기사 문구들에 포위되어져 있다. 눈을 감아 버리면 현대의 원시인이 될것이고 눈을 뜨면 광고의 노예가 될판이다. 나로부터 유체이탈하여 나를 잃어버리게 될 판이다. 사람들은 화이트헤드와 참선이라는 단어들이 주는 해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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