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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짧고 명확한 가르침

by 격암(강국진) 201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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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과학분야의 일이긴 하지만 발표를 하다보면 나는 소위 말하는 테이크 홈 메세지를 발표의 맨 서두에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간결하게 한 줄로 이게 이렇습니다라고 말해서 그 강연의 나머지를 하나도 이해못해도 핵심적 결론은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는 이게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면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 결과가 얼마나 나에게 흥미로운가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또한 중간에 자세한 것을 좀 놓쳐도 대충 자신이 아는 것으로 그 간격을 메꾸기가 쉽다. 사실 과학분야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짧고 명확한 메세지를 좋아한다. 길고 애매한 이야기를 누가 끝도 없이 듣고 있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큰 함정이 있다. 가르침이 짧으면 짧을수록 우리는 기본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문화, 같은 패러다임, 같은 언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내가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데 아내는 그것에 익숙하다고 하자. 그럼 나는 '내일은 좀 커피가 양이 많았으면 좋겠어'라고만 말해도 뜻이 통할런지 모른다. 그것은 아침에 마시는 커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냉커피도 아니고 설탕이나 우유가들어간 커피도 아니다. 이런 것을 다 설명할 필요가 없기에 그저 내일은 좀 커피가 양이 많았으면 좋겠어라는 문장만으로 뜻이 통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부부가 오래 살면 피차간에 의사소통이 너무 지나치게 잘되서 무서울 때가 있다. 앞도 뒤도 없이 '잘갔어?'라고만 말해도 상대방이 알아듣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도 의사소통이 되는 때는 이따금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아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짧은 메세지가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럼 메세지는 얼마나 길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론적으로는 무한대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사실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어를 하는데 당신은 외계어를 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친구와 당신이 말하는 친구의 의미는 서로 각각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삶과 생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가 소중해같은 이야기를 누가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뜻인지는 사실 알 수가 없다. 결혼 전에 나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어같은 유치한 말을 하는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보다 더 헌신적일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누군가는 목숨운운해봐야 별거 아니고 누군가는 그저 노력해볼께 정도의 약한 약속이면 이미 목숨건거나 다름없이 진지할 수 있다. 

 

당신은 프랑스어를 못하는데 내가 프랑스어로 한마디 한 것을 정말로 이해하려면 프랑스어전체, 프랑스문화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프랑스교육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면 프랑스 역사를 전부 공부해도 부족하다고 느껴지게 된다. 조선시대에 결혼해달라고 말하는 것과 현대에 결혼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 뜻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만 하다면야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래도 의사소통을 하면서 산다. 프랑스어도 직역하면 문장하나를 문장하나로 번역하는 것이 물론 가능하다. 가능한가 아닌가를 떠나 그렇게 하면서 산다. 

 

상황을 정확히 말하자면 짧고 간결한 메세지를 주는 것, 의미를 번역하는 것에는 문제가 작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과학적 메세지는 번역이 쉽고 오해의 소지가 작다. 그 이유는 과학은 환원론적인 지식이라서 그렇다. 환원론적이라는 것은 크고 복잡해도 결국 작고 대체가 가능한 부품의 조립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조각은 다른 부분과의 연결상태에 상관없이 홀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타이어를 보자. 우리가 자동차의 타이어를 이야기할 때 금호타이어 몇번 모델이다라고 말하면 그 타이어는 이러저러한 성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어느정도는 자동차의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타이어에 대해 좋다든가 나쁘다던가를 논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한 쌍의 연인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그 남자는 좋은 애인인가를 물었다. 환원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객관적인 수치분석에 의해서 마치 그 남자의 파트너가 되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객관적으로 그 남자가 좋은 애인인가 아닌가를 평가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건 적어도 진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사랑하는 연인이란 두 개의 부품이 조합되어 하나가 된게 아니다. 한 조각이 거기서 빠져나오면 나머지 조각의 의미도 사라진다. 이 남자에게 좋은 애인이었던 저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좋은 연인일거라는 보장은 없다. 연애경험이 좀 있는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다. 저 여자는 나랑 사귈때는 못먹는거 투성이고 깔끔떨고 사치스럽더니 다른 남자랑 사귈 때보니까 가정부처럼 마구 부림을 당해도 아주 기쁜 얼굴이더라.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우리가 교육같은 것을 이야기해봐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어떻게 키우는가. 아이는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듯 각자의 가정에서 메뉴얼대로 키우면 다 똑같이 크는가? 부모들은 똑같은 부모밑에서 자라난 두명의 아이들도 어쩌면 그렇게 서로 다른지 모른다고 놀란다. 똑같이 키웠다고 생각하는데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다른 경우가 많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인생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도 다 그렇다. 분리가 잘 안된다. 경우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어떤 분야의 이야기로 가면 짧고 간결한 메세지 같은 것은 설사 꽤 그럴듯하게 들려도 스스로 고민하고 자기에게 적용하려는 노력없이 그 자체로 끝나면 큰 의미가 없다.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메뉴얼 같은 것이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메뉴얼은 해결법의 아주 일부일 수 밖에 없다. 만약 그 짧은 메세지, 간결한 해결법을 듣고 진짜 의미를 알아들었다면 당신은 거의 그런 이야기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자신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의미없는 조각난 단어들을 던져주면 뭘 배웠다고 뭔가 소중한 것을 말한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란 단어가 요즘 선거판에서 나돈다. 듣기에 아름답고 자극적이지만 이게 무슨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나중이 되면 그 뜻을 이러저러하게 알아들었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또한번 속았다고 분통이나 터뜨리게 될것이다. 그말을 하는 정치인과 같은 패러다임,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진작에 소리없이 웃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무슨뜻인지 정확히 알지'하면서 말이다.

 

여기 수소원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가 과학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는 쉬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그런 것처럼 이 우주에 수소원자 하나만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문제가 없고 실제로 종종 그렇게 한다. 즉 어떤 것이 그 하나로 홀로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같은 것을 이야기해보면 전혀 다르다. 여기 격암이라는 한 인간이 있다고 하자는 말에는 사실 매우 복잡한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우주에 홀로 이 격암이라는 인간만 있다는 말은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런 진공상태에 가져다 두면 나는 곧 죽을테니까. 설사 물도 공기도 있는 곳이라고 해도 나는 사회적 인간이라 많은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소통속에서 균형을 이룬결과 지금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지 무인도에서 홀로 된다면 나는 통상의 사회적 기준으로는 매우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말할 때도 가정상황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빼고 우리 그 아이에 대해서만 말해봅시다라고 하는게 별로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세계에는 한 쪽끝에는 짧고 명확한 메세지를 던지는 과학의 극단이 있는가하면 다른 쪽 끝에는 이 우주 모든 것에 대해 다 이야기해도 부족한, 그런 세상이 있다. 그 곳은 말을 넘어서 있는 세상이다. 이쪽으로 가면 우리는 서로가 스스로의 체험과 생각에 의해 같은 것을 느끼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아이스크림 먹은 사람이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 아무리 길게 이야기해도 아이스크림을 먹은 체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불쌍한 아이에 대해 느끼는 내 감정을 제 아무리 길게 이야기해도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이 그 감정, 그 체험을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합리성? 체험이 없는데 무슨 합리를 논하는가. 

 

불행한 일은 아주 많은 사람들은 말할수 없는 것은 단지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좌파라는 겁니까 우파라는 겁니까 라던가 그러니까 FTA찬성이라는 겁니까 반대라는 겁니까 라는 질문이 중요해 지는 문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문맥을 훨씬 초월한문맥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짧고 단순한 답을 원한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은 사실상 자신의 문화, 자신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이다. 혹은 그런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문제의 본질이 패러다임 자체라면 어쩔것인가. 내가 자주 드는 예에 일본 유신혁명당시의 이야기가 있다. 그때 개국파가 있었고 쇄국파가 있었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선택이라고는 개국이냐 쇄국이냐 둘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반만 문을연다같은 우스꽝스러운 답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일본유신지사가 내놓은 답은 개국이냐 쇄국이냐 이전에 막부체제하에서 일본이 번으로 갈라져있으면 외세에 의해 각개격파당하고 마니까 하나의 일본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국이냐 쇄국이냐라는 질문은 결국 막부체제라는 패러다임을 깰생각도 하지 않고서 던지는 것이었고 유신지사는 막부체제라는 패러다임자체가 문제라고 본것이다. 문제는 개국이냐 쇄국이냐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였다!

 

기존의 패러다임의 자리에서 들으면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는 간결한 요점이 없다. 모든 걸 뒤집어 엎는 것이니까. 간결한 요점으로 정리한 것을 듣고 알아듣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니 하면 알아듣지만 공자시대에 그런 단어를 던지면 사람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까?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뭔가를 정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의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혁신적인 것들 중에는 요점이 없다. 교육에 대해 한말씀해보시죠라던가 과학정책에 대해, 문화에 대해, 경제에 대해 한말씀 해보시죠같은게 실은 불가능하다. 그런 게 가능해 진다면 사실상 그런 말을 들으러 온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종자로 자신이 이미 아는 것을 확인받으러 온것 뿐이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이미 일어났거나 임박했다는 이야기다. 벌써 답은 안다는 이야기다. 그게 아니면 언제나 이야기는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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