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8
우리는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그리고 종종 어려움에 처한다. 인생이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실패인지 성공인지 모른다. 사실은 인생이 끝나도 그 사람의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수 없으니 성공과 실패란 하나마나한 소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삶에는 초조함과 어려움이 있다. 그걸 살아가는 우리가 유한하므로 삶이란 결국 유한하다. 당장 살기 쓸쓸하고 어려운데 심지어 죽을 판인데 우리가 했던 결정에 대해 회의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결정에는 개인적인 결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결정이 사회적이다. 한국사회의 결정이나 한국 대통령의 결정은 내 뜻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 결정이 내 뜻과 달랐는데 그 결과조차 처참하다면 우리는 대개 분노하게 된다. 좋은 예가 이명박 전대통령이나 오세훈 전서울시장이다. 나는 그들과 뜻이 다르므로 그들이 내리는 결정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대강이나 경인운하가 뉴타운이 역사를 지우고 사람을 죽이고도 모자라 엄청난 빚을 남기고 엄청난 유지비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슬프다. 대통령부인이 참여했다는 한식세계화 사업에 천육백억이 들었는데 흥청망청 돈을 썼을 뿐 남은게 없다는 말같은 것을 들으면 슬프다. 나는 도대체 그들이 잘한게 뭔지 모르겠다. 버스보조금 문제로 서울시가 가난해 지고 성공이라고 말하는 청계천은 해마다 80억이나 되는 유지비를 쓰고도 모자라 돈쓸곳이 점점 늘어만 간다. 청계천 상인들은 이리저리 내몰리고 그때문에 생긴 가든파이브는 조단위의 빚이 되어 다시 이자만 물게 할뿐 별 쓸모가 없다. 이명박 정부기간동안 늘어난 빚 이야기가 나오면 쉽사리 몇백조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하고 성공한 사업이 뭔가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정도 인데도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것이 실패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내일 해가 뜰지 안뜰지 모른다라는 회의론과 비슷한 수준인 것같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 직면한 삶의 어려움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눈앞의 성공과 실패보다 그 뒤에 있는 철학과 꿈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집안 재산을 모두 털어서 카지노에 가서 도박에 걸고 그걸로 돈을 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집안의 영웅인가? 도박이란 결과를 모르니 도박인데 도박에 졌다면 모두가 파탄에 처할 행위를 하는게 올바를까?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삶이 가난하다. 지면 돈이 없어서 못하지만 이기면 더 따기 위해 더하고 결국은 그 돈이 다 없어질때 까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오류를 범할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란 항상 불확실성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겠으나 오류를 범했다는 것, 결과가 희망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에 나가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전쟁에서 패배한 자를 더더욱 숭고히 높여야 할 때도 있다. 그나 그녀가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말이다. 목숨걸고 싸운 사람을 뒤에서 아무것도 안하던 사람이 비난하는 일은 공평하지 않다.
우리가 걱정하고 조심해야 할 일은 어떤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 우리의 철학 혹은 삶의 방식이다. 어떤 젊은이가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 가서 이 앞의 논밭을 다 팔아서 쇼핑몰을 세우고 우리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자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의 주장대로 쇼핑몰을 세웠더니 장사가 안되서 망하고 말았다. 엄청난 유지비때문에 쇼핑몰은 곧 흉물이 되었다. 그 젊은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문제는 쇼핑몰이 실패했다는 것보다 더 깊은데에 있다. 문제는 그 젊은이는 그 마을에 필요한 것은 쇼핑몰이며 그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쇼핑몰에서 노인들이 일하는 것도 아닌데 논밭을 없애고 쇼핑몰을 만들면 노인들은 익숙한 농사일대신에 뭘 하게 되는 것일까. 고가의 토지보상금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보상금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고 충분하다고 한들 자기의 추억과 역사가 있는 마을에서 하던 일을 하면서 이웃과 조용히 살아가는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일상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수 있을까? 그 노인들이 그 마을을 떠나 어디 다른곳에서 정착하여 다시 예전만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이 개발에 대한 반대논리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사실 얼마든지 반대로 쓸 용의도 있다. 마을은 황폐해져 가는데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노인들의 이야기,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 마을도 유지되는 것인데 자기만 외로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것처럼 생각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개발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가 뭔가를 할때 그것이 왜 좋다는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냥 개발하면 돈버니까 무조건 좋다고 하거나, 그냥 살던대로가 좋지 변화가 왜 필요하냐고 말한다. 뭔가가 원래 그런거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양쪽이 똑같다.
결론이 같아도 생각과 느낌이 다르다면 그들은 미래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다르게 느껴야 하고 느낄 것이다. 나라의 미래가 곧 나의 미래라고 생각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는 사람은 후회가 없겠지만 전쟁이 출세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나갔는데 죽는 사람은 전쟁에 나온 것을 후회할 것이다. 결과가 같다고 뜻도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판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문화와 철학의 수준에 도달하면 다른 의미를 가진다. 결국 오류에 대한 반성이란 결과론적인 반성이라기 보다는 문화와 철학에 대한 반성과 확인이어야 한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서있는가, 나는 왜 그런 것을 했던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론만 같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아 나는 복잡하게 철학니 인생관이니 꿈이니 그런건 몰라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점을 망각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철학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생각을 하건 안하건 우리는 어떤 가치관에 따라서 산다. 생각을 안하는 사람은 남이 주입해준 가치관에 따르고, 대개 원초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철학에 따라서 사는 것이지 철학없이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동차나 건물과 같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규칙이다. 자동차를 몰면 편하지만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 위험한 물건이 될것이다. 그러나 기본적 이해를 가진다면 자동차는 인간의 힘을 크게 증대시킨다.
생각없이 철학없이 살아보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21세기에 맨발로 걷고 벌거벗고 살며 불도 없이 살아보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훌룡한 선택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 훌룡한 선택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철학이니 가치관이니 하고 불렀던 것에는 다른 이름도 있다. 그것은 꿈과 희망이다. 꿈이 뭔가. 우리가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고 우리의 목표점을 주는 것이다. 그런게 있으니까 우리는 희망을 가지게도 된다. 나는 철학같은 것은 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철학을 모르는게 아니라 대개 인간의 행복은 부자가 되어 권력을 쥐면 얻어지는 것이라는 철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아내나 손자같은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살면 행복할 사람이 쓸데없는 명예욕과 돈에 대한 욕심으로 손안에 있는 행복을 파괴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마치 그런 것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었다는 듯이.
우리의 오류, 우리의 실패에 대한 평가는 그게 뭐건 어떤 철학을 전제하고 만들어 진다. 돈에 미친 사람은 돈을 벌려다가 실패했어도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를 구하려다가 죽어도 자랑스러워 하듯이 그는 자신이 돈에 미쳐있던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사람이란 자기합리화에 능해서 몇마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그런 일을 쉽게 할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출세나 돈에 미쳐있었던 것이 아니라 꿈에 미쳤던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경우의 비극은 자신의 그런 가치관을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발만능주의에 빠졌던 정치인들처럼 말이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결국 우리의 눈을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투자를 해서 백만원을 손해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에 따라서 세상의 어떤 특정한 면을 맘대로 본다.
얼마전에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나쁜 딸이라고 우는 여자를 본적이 있다. 자식의 교육이나 먹거리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미안해 하면서 손녀를 봐주기 위해 딸집에서 기거하는 어머니가 조금 더 고급 쥬스를 사마시면 싼거 마시라고 금방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돈 만원이 누구입으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엄청 크게도 보이고 엄청 작게도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을 안하니까 행동이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딸입에 들어가는 소고기는 아깝지 않으나 부모입에 들어가는 소고기는 아깝게 느끼는 배은망덕한 일을 하게 된다. 그 부모는 힘들여 자기를 키워주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크는 손녀는 뭘 보고 배울 것인가. 스스로 자기의 미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도 그렇게 대접받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무심한 실천도 다 뜻이 있고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철학없이 살게 되지는 않는다. 그건 마치 방향없이 움직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움직였다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인 거니까 그건 불가능하다.
손으로는 뭔가를 계속 집어먹으면서 머리로는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뜻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순간순간을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결정으로 채워가면서 나는 왜 사는게 이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고 지난번에 산 로또가 맞지 않았기에 내 삶이 이렇구나. 로또만 맞았으면 나는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철학을 배우고 지혜를 배우고 그걸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또 나만 그렇게 한다고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가능하다면 주변사람도 공감해야 우리의 삶이 쉬워진다. 우리는 나라라는 장벽이 우리에게 뭘 해주는가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라가 분열하고 내전에 빠져서 끔찍하게 살아가는 곳도 많다. 그런 곳을 보면 우리의 행복이란 우리가 나라라는 공동체를 지켜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는 뭐가 만드는가. 바로 공감되어지는 철학과 가치관과 문화가 만드는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답답하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궁핍해지는 일이 많다.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각하기를 멈춘 것은 아닌지,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뼈아픈 오류와 뜻밖의 행운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적 판단도 그렇고 정치적 판단도 그렇다. 짐승같이 판단하면 짐승의 세계에 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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