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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청춘소설과 우리의 세계

by 격암(강국진) 2013. 8. 8.

2013.8.8.

 

어릴적에 내가 좋아하던 청춘소설이 있었다. 그 소설에는 삽화도 나와 있었는데 잘생긴 남학생 3명과 여학생 3명이 활짝 웃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소설의 줄거리는 그런 선남선녀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같이 웃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때로 짝사랑에 빠지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그 소설속의 인물중의 하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인간관계속에 빠져들었다.

 

나이가 좀 들고 어느날 돌아보니 나는 비로소 당시에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소설은 어떤 소설이건 현실과는 다르다. 특히 그것이 명작이라고 불릴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과 놀랄만한 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저 세상경험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만한 것을 뒤범벅해서 만들어 놓은 이야기들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읽어서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현실적인가에 대해 칭찬하곤 하지만 말이다.

 

어릴 적에 내가 그 이야기에서 보지 못했던 것은 어떤 특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는 것 즉 개연성이 적은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개연성이 적은 사건들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1억명중의 한명만 걸리는 병을 내가 걸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개연성이 낮지만 이 세상에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존재하고 때문에 그 병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일년에 천억쯤을 번다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낮지만 이 세상에는 그 정도의 돈을 버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한다.

 

내가 개연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이야기가 현실과 다르다라고 말하면 그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개연성이 적은 이야기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개연성이 적은 이야기가 계속되는 소설이나 드라마는 3류 인것이 확실하지만 개연성이 적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점에 가면 수많은 성공담을 담은 논픽션 책을 찾을수 있고 그 이야기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모두 개연성이 적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예수나 부처라던가 아인쉬타인이나 전태일같은 사람들은 모두 개연성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적에 청춘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것 그리고 내가 어떤 소설이 현실과 다르다고 느낄 때 말하는 것은 개연성이라기 보다는 게임의 법칙이랄까 자연의 법칙이랄까 하는 부분이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어떤 이야기는 그 안에서 일정한 법칙이 통하는 세계다. 만약 아무런 법칙도 통하지 않는 세계라면 그 이야기는 전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수 없을 것이며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서로간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이유없이 일어나는 세계는 이야기라고 부를만한 것을 만들어 낼수 없으니까 그렇다. 때문에 하나의 세계는 항상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 다만 그 법칙을 보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을 뿐이다. 분명히 불확실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소녀가 어떤 소년을 만났다고 하자. 소녀가 소년에게 다정히 인사를 했을 때 소년은 인사를 받아줄 수도 있고 얼굴을 붉히고 도망갈 수도 있고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다. 이렇게 결과가 여러가지 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일어나는 세계는 어떤 법칙이 없는 것같지만 이야기가 계속되고 그 세계의 여러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서로와 접촉하면서 그 세계의 법칙은 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것을 물리법칙과 비교하면 이런 식이다. 우리가 공을 던지면 공은 앞으로 갈수도 위로 날아갔다가 떨어질수도 있다. 뒤로 날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공은 여러가지로 움직이니까 세상에 물리법칙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뉴튼의 운동법칙이라는 물리법칙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같은 법칙이 충실히 적용되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초기조건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뉴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이다. 우리가 모두 뉴튼은 아니기 때문에 그 법칙이 무언지를 정확히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그런 법칙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던지고 받는 것이 가능하다. 날아오던 야구공이 어느 순간 이유없이 90도 각도로 꺽어져서 날아가는 일은 경험에 따르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공의 미래 위치를 어느정도 예측하고 손을 들어 공을 잡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뉴튼법칙이란 것을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도 물리세계의 법칙을 경험에 의해서 어느정도 익히고 그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벌어지는 사회는 문화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 문화적 법칙이 뭔지를 설명할 수 없는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마치 공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느끼듯 우리는 문화적 법칙을 느끼고 그것에 적응하면서 산다.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법칙이 변화할 때 보다 분명하게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에는 허용되지 않거나 허용되던 것이 이제는 그 반대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오는 여러가지 여자 그룹들의 야한 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몇십년전에는 그런 춤들은 물론 허용되지 않았다. 지금도 방송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기노출은 범죄로 여겨진다. 문화적 법칙은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무엇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 것이고 어느 정도는 지나친 것인지를 말해준다. 적어도 영화를 보면 서구에서는 결혼한 여자라도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을 별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결혼한 남녀가 다른 이성과 육체적 접촉을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을 대부분의 상황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기 위해 성적인 문화규칙을 이야기했지만 물론 문화규칙은 단순히 성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예절을 가지고 있고 그 예절이 망가질때 극단적으로 화를 내곤한다.

 

문화라고 하면 사실 지나치게 복잡하고 큰 주제가 되니까 다시 처음에 말했던 청춘소설로 돌아가 보자. 그 청춘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러가지이고 그 소설속에 세계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는 매우 균질한 세계다. 그래서 주인공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에 반응한다. 소설안의 세계는 현실보다 단순해서 우리는 어떤 법칙이 그 세계를 지배하는지 보다 쉽게 파악한다. 그리고 그 법칙과 그 결과가 우리의 마음에 들때 그 세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아 그래 친구와 오해가 생긴다면 이런 식으로 풀어야겠군이라던가 그래 가족의 화합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는 위험이 있다. 그것은 마치 뉴튼의 물리법칙이 아닌 또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우리 세계에서 흉내내는 식의 문제다. 물속이나 달에서 벌어지는 운동은 지구의 땅위에서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이 부분이 바로 내가 어릴 적에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다. 나는 그점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예전에 인기가 좋았던 미국드라마중에 프랜즈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프랜즈는 내가 좋아했던 청춘소설처럼 미국 뉴욕에서 여러명의 친구들이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서로 돕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프랜즈는 프랜즈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한국드라마도 한국드라마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법칙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때 생기는 문제는 목욕탕의 법칙을 일반적으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걸어다니는 식의 문제다. 실제로 외국에 처음가는 사람은 자신이 책이나 드라마에서 본 법칙이 통하는 세계로 뉴욕이나 파리를 상상하기 때문에 괴상하게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파리에 있어도 그나 그녀는 그들이 상상한 판타지 세계에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혀 그럴것같지 않은 사람들이 외국에 가면 기괴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또 영어로 대화할 때와 한국어로 대화할 때도 같은 두사람이 대화를해도 대화의 내용은 전혀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심지어 혼자 생각을 할때도 영어로 생각하는 것과 한국어로 생각하는 것은 차이를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뭘 배워야 할까. 어쩌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이봐. 이러니까 책벌레들이나 티브이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감각이 없다니까. 책도 덮고 티브이도 끄고 현실세계로 나와서 실제의 사람들도 만나고 그러면서 살라구.”

 

이러한 그들의 지적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이며 어떤 문맥에서 매우 쓸모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드라마나 이야기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심지어 드라마와 현실간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이다. 책과 티브이 바깥의 세계는 정말 생생한 현실인가? 과학이 발전해서 오늘날처럼 과학의 시대가 오기전에는 사람들은 신화나 요정, 귀신의 이야기들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책을 너무나 많이보고 티브이를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세계에서 살았을까?

 

우리는 사색과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법칙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내려고 노력할수도 있고, 공을 던지는 사람의 예에서 말했듯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수 없지만 어떤 감으로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느끼고 배우면서 살아갈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건 결국 우리는 우리 세계의 법칙에 대해 배우지 않고서는 우리 세계를 살아갈수 없다는 것이다.

 

책과 티브이를 멀리하고 현실에서 사람들과 만나는데 집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경우에따라서는 가장 깊이 판타지 세계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전세계인데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나고 직접체험할수 있는 세계는 아주 작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아주 능하기 때문에 ‘현실론’을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실은 가장 자기맘대로 만들어낸 환각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고 그 연애소설대로 연애를 하려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연애에 실패한다. 우리가 만약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느끼고 배우고 그 안에 존재하는 법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중단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서도 실패할 것이다. 연애소설에 나온대로 했는데 감동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나빠하는 남자나 여자를 보면서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은 판단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막장드라마나 저질 농담만 가득한 사람들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때 이 세상에는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은 판단일 것이다.

 

시각을 사건에서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으로 한단계 높여서 생각하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종종 쉽지 않은 일이다그러나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관점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필요하다왠지 세상에는 어떤 사기가 존재한다는 느낌이유없이 비극이 반복된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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